“Just like a star across my sky/ Just like an angel off the page~.” 얇은 유리문 너머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넘어온다. 수애가 코린 베일리 래의 <Like a Star>를 따라 부르는 중이다. 약속한 인터뷰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여유 있게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짧은 기다림의 시간에도 수애는 자신만의 호흡으로 여유로운 분위기를 마련해두었다. 서두름이나 분주함 하나 없이. 똑똑똑.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선 그곳에서 수수하고 말간 얼굴의 수애가 마중한다. 이번에 수애는 <국가대표2>에서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급조된 국가대표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에이스 리지원 역을 맡았다. 북한에서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다가 남한으로 온 리지원에게는 아픈 가족사가 있다. 스포츠 현장의 빠른 호흡과 뜨거운 기운을 만들어내는 일 못지 않게 깊이 있는 감정 연기까지 선보여야 했던 과정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감기>(감독 김성수, 2013) 이후 오랜만의 영화 작업인 만큼 수애에게는 반가움과 함께 얼마간의 긴장감도 느껴지는 듯했다. <국가대표2>의 개봉(8월10일)을 하루 앞둔 날 저녁이었다.
-개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작품을 선택하고 촬영할 때는 개봉 이후의 상황으로부터 자유롭다. 며칠 전까지도 여러 인터뷰를 진행하며 설레기도 했다. 근데 막상 개봉일이 닥치고 보니 솔직히 부담감이 밀려온다. 워낙 쟁쟁한 영화들과 같은 날 개봉하는 탓에 체감하는 게 확 달라졌다. 관객이 <국가대표2>를 보며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길 바랄 뿐이다.
-<국가대표2>의 시나리오를 읽고 주저함 없이 곧바로 선택했다고 들었다. 어떤 면이 마음을 움직였나.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이야기다보니 여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춰가야 하는데 그게 어떤 결과로 만들어질까가 정말 궁금했다. 내 필모그래피를 보면 대부분 남자배우들과의 끈적한 멜로이거나 <심야의 FM>(감독 김상만, 2010)처럼 혼자 극을 끌고가야 하는 유였다. 서른여덟살이 되고 배우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뭔가 새로운 도전, 해보지 않았던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나 혼자 온전히 주도해나가는 게 아니라 6명의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과 감독 역의 (오)달수 선배님까지 하나가 돼 만들어가면서 느끼는 재미가 분명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인물간의 완급 조절도 필요했다. 스포츠영화이기에 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거기에 후반에 리지원이 감정을 터뜨려야 해서 배우로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지점도 분명 있었다. 모든 면에서 나를 충족시켜주는 시나리오였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에 서서 극을 이끌어나가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솔직히 시나리오를 선택할 당시만 해도 여성주인공들의 이야기라는 데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오히려 촬영을 하면서, 개봉을 앞두고 홍보를 하면서 책임감을 느낀다. 여성주인공들을 내세운 이야기로 가장 치열하다는 여름 극장가에 나섰으니. <국가대표2>가 잘돼야 또 다른 여성영화들도 만들어질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리지원은 북한에서 국가대표 아이스하키팀 선수로 살다 탈북해 한국으로 오지만 제3국으로 가길 바란다. 북에 두고 온 동생에 대한 마음, 아이스하키를 할 수 없는 현실적 한계 등으로 감정적으로 상당히 억눌려 있는 인물같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북한에 동생을 두고 남한으로 와야 했다. 한국에 정착하려는 생각보다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는데 그건 결국 동생에 대한 리지원의 죄책감 때문이 아닐까. 리지원은 무언가에 도전하거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려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큰 인물이다. 후반에 북한 아이스하키팀 선수가 된 동생과 리지원이 경기장에서 재회하는데 그때가 이들 자매의 감정적 해소의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도 같았다.
-그래서인지 후반에 감정을 터뜨리기 전까지의 리지원을 보고 있자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면서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감정을 자기 안에 많이 담아두는 인물이니까. 그게 이 영화의 색깔이기도 하다. 6명의 팀원들 저마다의 사연을 조금씩 다 담아야 했기에 물리적으로 각 인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한 면도 있다. 하지만 연기를 할 때는 이미 리지원의 마음 상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어서 전체 그림을 그리며 만들어갔다. 초•중반까지는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가다가 후반에 딱 터뜨리는.
-리지원이 북한 출신이다보니 사투리 연기에도 신경써야 했다. <나의 결혼원정기>(감독 황병국, 2005)의 라라 역으로 이미 북한 사투리를 구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워둔 게 도움이 됐다. (웃음) 사투리 연기를 처음 시도해야 했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다. 대사 그대로 연습하다보면 일종의 ‘조’가 생겨서 그렇게는 안 했다. 일상 대화로 연습을 이어갔다. 그래도 스트레스가 없진 않더라. 영화에서 혼자만 북한말을 구사해야 했기에 너무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고 감정 표현에도 제약이 따랐고. 그나마 스포츠영화다 보니 후반부에 감정 연기를 하기 전까지 대사가 많지 않았다. 리지원이 감정을 절제하는 외유내강형이기도 했고.
-크랭크인 3개월 전부터 아이스하키 연습을 했다고 들었다. 대역이 있다고 해도 직접 아이스하키를 연습해야 했기에 정신적, 육체적 부담이 컸을 거다.
=도전을 즐기는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는 내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 끌렸다. 얼마나 멋진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평상시에는 (본명) 박수애로 살지만 작품 안에서는 국가대표가 돼볼 수 있고. 부담이라고 느끼기보다는 배우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인라인을 즐겨 타온 덕을 봐 동료 배우들보다는 수월하게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육상부였기도 해서 달리는 건 자신 있었다. <심야의 FM> <감기> 때도 뛰는 신에서 감독님이 카메라가 따라가야 하니 좀 천천히 뛰라고 하실 정도였다. 이번에도 체력적으로는 뒤지지 않았다. 그래도 촬영 때마다 한계에 부딪혔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긴장을 놓지 못했다.
-여섯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운동으로 땀 흘리고 소리 지르고 하다보면 자연스레 어떤 끈끈한 감정이 생기기도 하잖나.
=끈끈함이라는 걸 제대로 느꼈다. 배우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준다? 배려한다?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다들 자신의 평소 모습, 이미지를 다 내려놓고 시작했다. 첫 촬영 때 갯벌에서 단체로 훈련받는 신을 찍는데 정말 모두가 <국가대표2> 하나만을 위해 뭉쳤구나 싶더라. 달수 선배님도 마찬가지였다. 재숙씨가 내게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기분”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일로 만나다보면 그런 감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데 그만큼 편안했다. 다른 배우들도 나를 선배라기보다는 언니로 대하며 마음을 나눴다. 매 순간 촬영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동료 배우 들의 힘이 컸다. 아이스하키장 대관 시간이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라 12시간씩 촬영하고서도 다같이 모닝 술을 한잔씩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웃음)
-동료 배우들도 당신을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라고 평하더라. <그해 여름>(감독 조근식, 2006) 때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이병헌도 “자기 틀을 깨길 주저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말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다. 배우가 되고 나서야 배우이기에 가능한 일들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았다. ‘배우’가 울타리가 돼줘서 그 안에서 나는 오히려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는 거다. 책임감만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작업인가. 배우 하길 정말 잘했지. (웃음) 내 직업을 사랑한다.
-데뷔 이후 드라마와 영화 현장을 자연스레 오가며 활동해왔다. 각 현장에서 느끼는 성취라는 게 꽤 다를 것이다.
=드라마는 시청자와 바로바로 소통한다는 게 매력이다. 나처럼 (팬들과 직접 만나는 일에) 적극성을 띠지 않는 배우에게는 그런 피드백이 때론 채찍이, 때론 긍정적인 자극이 돼준다. 영화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미처 몰랐던 내 안의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긴 호흡으로 공들여 내놓는 면이 있다.
-요즘은 배우들도 개인 SNS, 인스타그램 등을 많이 하는 데 그런 걸 일절 하지 않는다.
=소통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그런 방식이 익숙지가 않다. 개인 소장용 사진이야 나도 찍지만 어디 올려둘 만큼의 사진을 찍을 만한 실력도 안 되고. (웃음)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거의 하지 않았다. 얼마 전 <일요일이 좋다-런닝맨>에 출연한 게 이례적이다.
=3년 전 <해피선데이-1박2일>에 출연한 이후 정말 오랜만이다. 근데 방송을 보면서 내내 아쉽더라. 예능은 촬영하는 하룻동안 내 안의 다양한 모습을 꺼내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내 호흡이 너무 길다. 나를 보여준다는 건 여전히 어렵고 하루는 너무 짧다.
-예능을 하더라도 장기 프로젝트로 가야겠다.
=하하하. 여행을 좋아하니까 여행 관련 장기 프로젝트를 맡아야 할까. <님은 먼곳에>(감독 이준익, 2008) 촬영을 끝내고 혼자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국가대표2> 끝내고도 홀로 유럽으로 3주 정도 다녀왔다. 그런 시간이 환기가 돼준다.
-수애 하면 단아함 속에 강인한 면모가 엿보이는 캐릭터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 인물들에 유독 끌리는 건가.
=강한 여인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일 수도 있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모성애나 강인한 사랑의 감정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규정 짓지는 않는다.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작품의 선택도 달라진다. 어떤 면에 결핍이 있다 싶으면 그 결핍을 채워줄 작품에 도전하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택한다. 그래서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게 결국 작품 선택에도 영향을 주니까.
-결핍이라는 말을 좀더 해보자. 자신에게 없는 것,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보여줘온 강인한 인상의 인물들은 배우 수애에게 결핍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핍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나도 해봤다. 20대 때부터 그런 캐릭터에 눈이 갔으니까. 그때부터 강인한 엄마를 꿈꿨다. 나의 엄마를 보면 내겐 없는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나는 엄마처럼은 못할 것 같다”고 엄마에게 말하기도 했다. 닮고 싶고 동경하는 모습이지만 그런 면이 내 안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로 엄마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곤 하나.
=당연히 생각해본다. 시간 날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하는데 그럴 때면 지인들이 “어디 해외 진출하니?”라고 묻는다. “나중에 내 아이와 같이 여행가고 싶어서”가 내 대답이다. 소박하지만 큰 소망이다.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와 같은 이유가 아니다. 그저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일일 것이다.
-다음 작품으로 얘기되고 있는 게 있나.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지만 살펴보고 있다. 다양하게, 그러면서도 나답게 해나가고 싶다. 좋은 작품만 있다면 그게 뭐든 항상 도전할 준비는 돼 있다. 기회나 연이 닿아야 하는 일이지만. 일단은 주어진 것부터 열심히 할 거다. 뭐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배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