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5발. 양궁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선수가 대표팀에 선발되기 위해 나선 평가전과 선발전에서 쏜 화살의 숫자다. 얼마 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2016 리우올림픽 특집-숫자의 게임>(이하 <숫자의 게임>,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 할 수 있다.-편집자)에서 아주 미세한 점수 차이로 희비가 교차되는 양궁 선수들을 보면서 피가 마를 뻔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게 훨씬 어렵다는 양궁 대표팀을 카메라에 담아낸 사람은 KBS 스포츠국 이태웅 PD다. 2003년 KBS 스포츠국 PD로 입사해 축구 전문 해설 프로그램인 <비바 K리그>, <일요스포츠>의 ‘그때 그 경기’ 코너 등 여러 스포츠 프로그램과 중계방송을 연출하고, 한국 씨름 현대사를 2부작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천하장사 만만세>, 홍명보 감독이 이끈 런던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담아낸 <공간과 압박>과 <선택> 등 많은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그다. 내레이션과 자막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요즘의 방송 다큐멘터리와 달리 그의 작품은 내레이션이 없고, 단순한 폰트의 자막이 꼭 필요할 때만 쓰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8월6일 개막하는 리우올림픽에서 양궁 시합이 열리기 전에 <숫자의 게임>을 미리 보길 권한다.
-그 많은 올림픽 종목 중 양궁 대표팀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뭔가.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특집 다큐멘터리 하나를 만들어야 했다. 소재를 찾다가 우연히 대한양궁협회 전무님과 양궁 대표팀을 소재로 한 영상을 찍으면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양궁협회에 공식적으로 촬영을 제안했을 때 협회 반응이 어땠나.
=처음에는 양궁협회가 거절할 줄 알았다. 대표팀의 시스템이 공개되는 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제안했을 때 협회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오간 것으로 알고 있다. 촬영협조 제안서에 협회가 솔깃해할 만한 내용들을 많이 썼다. 최근 ‘흙수저’니 ‘은수저’니 계급론이 많이 나오지 않나. 그점에서 양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스포츠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 올림픽에 나가면 중압감이 더 커질 텐데 카메라가 선수들을 따라붙는 분위기를 미리 경험하는 것도 훈련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무엇보다 양궁협회는 스스로 구축한 시스템에 큰 자부심이 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촬영에 협조해준 것 같다.
-카메라가 올림픽 축구 대표팀 선수들을 가까이서 담아냈던 <공간과 압박>과 달리 <숫자의 게임>은 몰래카메라처럼 선수들과 거리를 둔 채 관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선수가 아닌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의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대표팀 안에서 선수들과 감독이 훈련하고 시간을 보내는 내용보다 대표팀이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선수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긴장된 상태로 선발전에 나서더라. 그런 선수들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게 무척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처음에는 되게 부담스러웠는데, 선수들이 생각보다 벽을 두진 않았다. 국가대표 선발전 일정이 길고, 선수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활을 쏘는 것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정이다. 찍을 만큼 찍었으니 쉬자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러면 선수들이 카메라에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수들이 우리(제작진)도 같은 팀이라 생각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나중에는 조금이라도 늦게 현장에 도착하면 ‘왜 일찍 안 다니냐”고 한소리 들을 만큼 마음을 열어주었다. (웃음)
-<천하장사 만만세> <공간과 압박> 등 전작이 그랬듯이 이번 다큐멘터리 또한 자막 폰트가 단순하고 내레이션이 없다.
=전에는 자막을 성의 없게 뽑았다고 많이 혼나기도 했다. (웃음) 인터뷰와 그림(이미지)만 보고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면 이상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내레이션과 자막에 기대지 않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방송이 끝난 뒤 시청자 게시판에서 ‘내레이션을 왜 안 넣냐’는 항의도 많이 받았다. (웃음)
-<천하장사 만만세> 이후 지금까지 자막 폰트를 작업한 김기조 디자이너와의 호흡이 잘 맞나보다.
=옛날 폰트 스타일 때문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김기조 디자이너는 생각보다 훨씬 젊다. <천하장사 만만세>가 1980년대 배경이라 김 디자이너의 작업 스타일과 잘 어울릴 것 같아 트위터로 연락해 섭외했다. 그 이후 계속 함께할 만큼 호흡이 잘 맞는다. 특히 이번 작업은 그를 완전히 믿고 맡겼다.
-DJ 소울스케이프의 음악은 화면, 편집 호흡과 절묘하게 어울리더라.
=<숫자의 게임> 이전에는 DJ 소울스케이프에게 음악을 먼저 받아서 음악에 맞게 내용을 편집했다면, 이번에는 양궁 종목 특성상 이미지가 다이내믹하지 않아서 편집을 먼저 한 뒤 편집본을 그에게 넘겼다. 이미지에 맞게 음악을 작업해달라고 요청했다.
-KBS는 왠지 보수적일 것 같다는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김기조 디자이너의 자막, DJ 소울스케이프의 음악은 KBS와 상반된 색깔이라 무척 신선했다. 스포츠국 내부에서는 당신의 연출 스타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나.
=스포츠국은 내 스타일에 관심이 별로 없다. 덕분에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것 같다. 자유롭게 만들어서 반응이 괜찮으면 사람들도 ‘그래, 하던 대로 내버려둬라’라고 하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양궁 대표팀을 찍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은 뭔가.
=선수들은 짧게는 닷새, 길게는 열흘짜리 시합을 1년에 다섯번 정도 치른다. 그들이 1년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인물이 카메라 앞에서 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양궁 선수들은 툭 치면 눈물이 나온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그만큼 힘들다는 거다.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양궁이 심리적인 압박감이 엄청난 종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목을 ‘숫자의 게임’이라고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9점과 10점짜리 과녁 사이에 9.1점부터 9.9점까지 또 나뉘어 있다. 10점 과녁에 얼마나 가깝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진다. 두 점수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는 얼마 안 되는데 그 작은 차이로 희비가 갈리는 것이 너무 잔인한 종목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숫자의 게임’이라고 지었다.
-2003년 KBS 스포츠국 PD로 입사했다. 보통 PD 지망생은 예능이나 드라마쪽을 지원하지 않나.
=원래 방송국 일에 뜻이 없었다. 대학생 때 고시 공부를 하다가 잘 안 풀려 취직을 해야겠다 싶어 스포츠국 PD로 지원했다. 고시 공부가 잘 안 풀렸던 이유가 풋볼매니저 게임(축구 감독이 되어 실제 축구팀을 맡아 운영하는 게임으로, 유럽에서는 이 게임 때문에 이혼하는 사례도 있다.-편집자)을 하도 많이 해서. (웃음) 축구를 무척 좋아하고,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직후라 스포츠국에 지원했더니 면접에서 축구 관련 질문만 물어보더라.
-2005년 백정현 PD와 함께 만든 <비바 K리그>는 의 <매치 오브 더 데이>를 모델로 한 축구 전문 해설 프로그램이라 꽤 신선했다.
=선배인 백정현 PD가 축구를 엄청 좋아한다. 그가 <매치 오브 더 데이>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주도해 함께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축구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당시 동원할 수 있는 장비, 데이터 자료 모두 투입해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스포츠 중계를 하면서 <천하장사 만만세> <공간과 압박> <선택> 등 여러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건 회사의 뜻인가, 아니면 당신의 의지인가.
=사실 나를 포함한 스포츠국 PD들은 다큐멘터리 제작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계방송은 2시간만 하면 되는 반면 다큐멘터리는 손이 많이 가니까. 그러다가 일요일마다 방영된 <일요스포츠>의 ‘그때 그 경기’ 코너를 맡게 됐다. (웃음) 옛날 경기를 찾아 편집해 내보내는 꼭지였는데, 씨름 경기에 재미있는 장면들이 많더라. 그때 만들었던 15분짜리 영상이 <천하장사 만만세>의 원형이 되었다. 매주 그 꼭지를 만들면서 과거 아카이브를 모아 편집하고, 그 영상과 어울리는 사람들을 섭외해 인터뷰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이후 <천하장사 만만세>도, <공간과 압박>도 회사에서 만들어보라고 해서 작업한 거다.
-마르티 페라르나우가 펩 과르디올라 전 바이에른 뮌헨 감독을 따라다니면서 취재해 쓴 책 <과르디올라 컨피덴셜>처럼 <공간과 압박>은 홍명보 감독의 올림픽대표팀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카메라에 담은 프로젝트였다. 스포츠 저널리스트로서 특정 팀을 계속 따라다닐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 아닌가.
=대표팀 옷을 입고 코칭 스탭, 선수들과 함께 생활했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취재진이 모이는데, 저쪽(취재진)에 있다가 이쪽(대표팀)에 있으니 낯설었다. 저쪽에 있었을 때 선수들이 인터뷰를 안 해주면 ‘잠깐이면 되는데’ 하고 불만스러웠는데, 막상 이쪽 생활을 해보니 다 사정이 있더라.
-PD 생활을 한 지 13년째인데, 그간 스포츠국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많이 있었다. 요즘에도…. 힘들다기보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는데 스포츠국에서는 기회가 주어질 때만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기획을 맡아 준비하고 있다. (웃음)
다큐멘터리 <공간과 압박>
“내 마음속에 항상 칼을 가지고 다녀. 남을 해치기 위한 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희(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칼이야.” 런던올림픽 특집 다큐멘터리 <공간과 압박>은 홍명보라는 축구인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어떤 선수가 자신을 보호하고 책임지겠다는 감독을 믿고 따르지 않으랴.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건 단순히 사료로서 가치를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태웅 PD의 절제된 연출이 김기조 디자이너의 단순한 자막과 DJ 소울스케이프의 개성 있는 음악과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실력 있는 DJ의 리믹스 음악 같은 세 콤비의 조화가 매력적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