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구치 지로의 <아랑전>
한 젊은 사내가 60층 높이의 도쿄 선샤인 빌딩을 마주하고 서 있다. 가라테 도복을 입은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매서운 눈매를 하고 약간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겨루어볼 테다”라고 중얼거리고는 성큼 빌딩 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기를 모아 풀스윙으로 주먹을 빌딩 벽에 날린다. 쾅!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당연히 빌딩은 꼼짝도 안 한다. 오히려 젊은 사내의 주먹이 얼마나 깨졌을지 걱정될 정도. 그러나 젊은 사내는 최소한 경보기 정도는 울릴 줄 알았다며 아쉬운 표정으로 벗어던졌던 도복 상의를 입는다.
다음 페이지. 선샤인 빌딩 59층에 있는 레스토랑의 식탁 위 샴페인 잔이 파르르 흔들린다. 하하하! <격투왕 바키>로 유명한 이타가키 게이스케가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장편소설 <아랑전> (餓狼伝)을 원작으로 그린 만화 <아랑전>의 첫 장면이다. 근육을 키워 갑옷처럼 만들고 주먹을 해머보다 단단하게 단련하고, 수도(手刀)는 칼보다 날카로워 맥주병의 병목을 내리쳐도 안의 내용물은 쏟아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은 채 두 동강 나며, 전화번호부를 맨손으로 찢고, 담배를 물고 빨아들이면 한 모금에 필터 앞까지 타버리는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등장하는 과격한 만화다.
살벌한 격투의 세계
이런 종류의 과격한 남성 격투 만화가 소년들에게 인기를 끈 것은 1960년대 말에 등장한 가지와라 잇키 원작, 지바 데쓰야 그림의 <내일의 죠>부터 본격화되었을 것이다. 그 이전 60년대 일본 만화에는 유도를 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년들의 우정과 정정당당한 스포츠맨 정신에 중심을 둔 스포츠 만화가 대부분이었다. 가지와라 잇키의 <내일의 죠>는 스포츠 만화라기보다는 ‘싸움 만화’라 불러야 할 정도로 사나이들끼리의 싸움에 초점을 맞춘다. 단행본 분량 한권이 전부 링 위에서 싸우는 이야기라면 독자들은 만화가 연재되는 두어달간 싸우는 장면만을 매주 보는 셈이다. 스포츠맨 정신과 소년들의 우정은 약화되고 오직 강한 적과 싸우는 과정에 집착하고 피 흘리며 싸워 이겨야 할 적만이 진정한 친구다.
가지와라의 시대가 지나가고, 90년대 이타가키 게이스케와 유메마쿠라 바쿠의 만화에는 사내들의 진한 우정 따위는 사라진 살벌하고 흉포한, 말 그대로 싸움의 세계만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 만화의 주인공들은 오직 상대를 쓰러뜨리고 최강자가 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를 백드롭으로 넘길 때 상대가 낙법으로 위기를 모면하지 못하도록 전봇대에 머리를 박아버린다. 주인공이 주먹을 날리면 그 충격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엑스레이 사진이 등장해 상대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것을 그려 넣는다. 그들이 싸우다 결정적인 정타를 맞으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체액이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목숨을 건 사내들의 이야기를 껄껄 웃으면서 보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웃으면서 보는 싸움 만화는 어떨까 해서 나온 소년 만화가 <드래곤볼>일 것이다.
무심한 사내들의 얼굴
90년대 중반에 나온 이타가키와 유메마쿠라 콤비의 <아랑전> 이전에 다니구치 지로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을 원작으로 그린 또 다른 <아랑전>이 있다. <사자왕>이라는 SF소설 잡지에 1989년 2월부터 1990년 4월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1년간 연재된 다니구치 지로의 <아랑전>이다. 이타가키의 <아랑전>이 떠들썩하다면, 만화가이며 만화평론가인 이시카와 준의 말을 빌리자면 다니구치의 <아랑전>은 “조용하게 차오르는 열기”다. 다니구치의 <아랑전>은 나라의 중세 건물들이 아름다운, 호젓한 공원을 걷는 한 사내의 뒷모습에서 시작된다. 공원에 놀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오고 곰같이 덩치가 커다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기보다 무심해 보인다. 다니구치 지로가 그린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얼굴에 흉터가 있고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사내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내가 걷는 거리에서 소매치기가 지갑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와 부딪치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어떤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소매치기 청년의 사건에 휘말려 야쿠자들과 싸움을 벌이는 곤란한 상황이 닥쳐도 사내는 무심하게 ‘나는 관계가 없다’라고 할 뿐이다. 권투를 배운 야쿠자의 우두머리가 그에게 덤벼들어도 그의 얼굴은 무심하다. 야쿠자의 우두머리가 날린 주먹을 한손으로 막아서 무심한 얼굴로 손목 관절을 꺾어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만들어버리면서도 사내의 얼굴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나머지 칼을 든 야쿠자들의 얼굴을 박살내버릴 때 두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빼면 사내는 표정의 변화가 없고 무심하다. 사내가 도장 깨기를 하려고 프로 레슬링 도장에 들어서서 옷을 갈아 입으려 탈의실 겸 샤워실로 들어설 때 그의 숙적 카지와라와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막 샤워를 끝내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출입구에 우뚝 선 레슬러 카지와라의 얼굴 표정 역시 무심하다.
다니구치는 이런 사내들의 얼굴을 너무나 잘 그리는 만화가다. 이들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진짜로 싸우는 것을 뺀 세상 모든 일에 무심한 종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건 오직 강적을 만나 싸울 때뿐이다. 그들은 폭력의 진흙탕에 코 밑까지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백치들이다. 싸울 때는 교활하기 짝이 없고 찰나의 순간에 영감을 발휘해 상대의 정강이뼈를 부수어버리는 싸움 천재들이지만 그외 모든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만화의 마지막, 주인공 탄바는 그가 싸움에서 진 유일한 인간 카지와라와 대결한다. 두 사람 모두 무표정하다. 오직 상대의 관절을 꺾어버리려 힘을 쓰거나 정타를 맞았을 때만 다니구치는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심지어 싸움에 이긴 주인공 탄바의 얼굴에는 피와 땀만 흥건할 뿐 어떤 표정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은 만화책의 종잇장 속에서 타오른다.
다니구치는 그런 종류 인간들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리는 만화가다. 그가 그린 늑대왕 로보나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동토의 여행자>의 늙은 사냥꾼, <신들의 봉우리>의 주인공. 그들은 하나같이 한 가지 일에 미쳐 있고, 나머지 일에는 백치 수준의 사람들이다. 다니구치는 한 페이지를 그리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로 스크린 톤을 덧대어 붙이고 또 덧대어 주인공들이 걷는 거리를 그리고, 싸우는 남자들이 흘리는 땀과 피, 으스러지는 관절과 깊게 갈라진 긴장된 근육을 정교하게 표현해 강건하고 고독한 사내들의 모습이 담긴 가장 아름다운 한컷을 만들어낸다. 그와 그가 그린 만화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