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나를 불안하게 만든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미국의 의료체계였다. 각종 유학 관련 사이트들에 무수히 올라와 있던 미국의 복잡한 의료체계와 비싸기 이를 데 없는 의료보험에 관련된 정보 때문이었다. 그런 불안감이 현실화된 것은 입학과 동시에 의료보험에 가입하면서다.
학교 당국이 한 보험회사와의 특별 계약을 통해 만들어낸 그 의료보험의 가격은, 가족이 있는 경우 그 수와 상관없이 1년에 2500달러, 우리 돈으로 약 330만원이나 되는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험으로는 미국에서 비싸기로 악명 높은 치과진료나 안경, 콘택트렌즈 등과 연관된 비용과 보험에 가입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질병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따라 아프지도 않았던 사랑니를 뽑고, 안경도 두개나 더 만들어간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그렇다면 소득도 없는 학생들이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내야 하고 또 왜 비싸기로 유명하다는 치과나 안경 등은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전 국민이 직장 건강보험이건 지역 건강보험이건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고, 대부분의 병원에서 보험혜택을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나라처럼 국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강제적 성격의 공보험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의 의료체계에 대해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전체 의료보험을 사설 보험회사에 맡기고 국민들이 자신이 원하는 보험 서비스를 선택하여 쓸 수 있도록 하는 사보험 정책을 가지고 있다. 언뜻 들으면 훨씬 능률적으로 보이는 이런 철저한 사보험 제도는, 그러나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시켜왔고 이로 인해 미국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신의 소득에 따라 사보험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인들의 약 20% 정도(5천만명 이상)가 아무런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미국인들은 회사쪽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되고, 65살 이상 노인들의 경우 정부가 제공하는 Medicare라는 의료혜택을 이용할 수 있으며, 빈곤층의 경우는 주정부가 주도해 제공되는 Medicaid라는 의료보험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주도의 의료보험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학생이나 저소득 자영업자 그리고 비정규직 근로자 등은 연간 수백만원에 달하는 사보험료를 지급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그중 상당수가 보험가입을 포기하고 의료보험 없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가 그런 보험 미가입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존 큐>에서처럼 직장 혹은 개인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이들에게 생겨나는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그 근본적인 문제는 전통적인 미국의 사설 의료보험이 환자가 의료 서비스를 받은 데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Fee for service(우리말로는 의료행위별 수가제) 방식에서 의료 서비스의 내용에 관계없이 환자의 수에 비례해서 일정한 액수를 병원쪽에 지불하는 Managed care(관리의료)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는 환자나 보험회사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병원이 비싼 진료방식이나 약품을 사용하는 과잉진료를 선호함으로써 보험회사들이 병원에 지급해야 하는 금액을 지속적으로 상승시키는 문제점이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적자의 부담이 커진 보험회사들이 보험가입자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요구하는 악순환을 해결하기 위해서 Managed care 같은 고육지책을 도입했던 것.
개인이건 회사건 보험가입자 입장에서는 보험료가 저렴하다는 면에서는 Managed care 방식이 매력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료 서비스를 많이 제공함으로써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종전과는 달리, Managed care 도입으로 병원은 환자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돈을 벌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따라서 <존 큐>에서 그려진 것처럼 많은 병원들이 당장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예방차원의 각종 검사들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 또한 영화에서처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의료 서비스에 대해 보험회사가 그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경우가 빈번히 발생해, 환자들이 제대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상황도 흔하게 연출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답은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 우리나라처럼 국가가 나서서 공보험을 제공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예산이 매년 투입되어야 하는데, 미국에서 이에 대한 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도 건강보험의 만성적인 적자와 아주 낮은 보장성 때문에 정부와 정치권에서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좋은 대안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미국과 같은 사보험제도를 도입해 의료 서비스의 차별화를 제공하고 공보험의 부담을 줄이자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을 정도.
따라서 <존 큐>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은 결코 남의 나라 불구경만은 아니게 느껴진다. 죽어가는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수술비를 내지 못해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도 일반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영화 속 존 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심장을 주기 위해 자살을 택하며 “돈을 벌어라. 돈이 많으면 모든 것이 다 쉽게 해결된다”라는 말을 남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철민/인터넷 칼럼리스트chulmin@hipop.com
<존 큐> 공식 홈페이지 http://www.iamjohnq.com/
미국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글모음 http://heartkorea.com/med/usmed.htm
사진설명
그림1: <존 큐> 공식 홈페이지.
그림2: 사보험제도로 운영되는 미국 의료체계에서는 영화 속에서와 같은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그림3: 아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영화 속 주인공 존 큐를 열연한 덴젤 워싱턴.
그림4: 미국의 Managed care 의료체계 중 하나인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건강유지기구)의 부실운영으로 딸을 잃은 한 어머니가 쓴 책 <Death by H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