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나온 게임 <우주 전쟁>에서 우주는 시커먼 모니터로만 표현되었다. 하지만 게임 속에 우주가 있었다. 몇개 되지 않는 하얀 점은 장엄하게 펼쳐진 은하 세계고 몇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우주선의 위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별빛이 쏟아지고 장엄한 우주 공간이 펼쳐진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물론 게이머의 상상력 덕분이다. 게임과 게이머의 공모가 빚어내는 환타지는 게임이 가진 힘의 가장 큰 원천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환타지는 현실로 끌어내려졌다. 어쩌면 잘못은 게임에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게이머 잘못일지도 모른다. 하얀 점 대신 사실적인 행성의 모습이 제시되었고 우주선 역시 진짜보다 더 화려한 모습이다. 게이머의 환타지가 사라진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교한 그래픽으로 상상력을 거세하는 게임과 그래픽 퀄리티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게이머다. 게이머가 볼 수 있는 것은 보여주는 것뿐이지만 눈을 홀리는 사실적인 그래픽에만 손을 들어준 처지에 누구를 탓할 것인가. 아무리 뛰어난 그래픽이라도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불확정 이미지의 확장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백년이 지나고 2백년이 지나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그렇다.
음악 슈팅 게임 <레즈 Rez>는 게임 그래픽의 메인스트림에 정면으로 맞서는 게임이다. 게임 스토리는 단순하다. 인공지능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온 세상의 시스템이 마비된다. 게이머의 역할은 사이버 히어로다. 총 한 자루만 가지고 넷 속으로 들어가 바이러스들을 제거해야 한다. 흔하다면 무척 흔한 스토리다.
반면 시스템은 독창적이다. 넷 공간을 돌아다니는 바이러스들에는 모두 저마다의 음이 있다. 총을 쏘아 맞혀 바이러스를 파괴할 때마다 각각 소리가 난다. 무작위로 쏘더라도 묘하게 음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가 고조된다. 하지만 모아서 쏘면 더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최대 8개까지 모아서 쓸 수 있는데, 지정해주는 순서대로 ‘록 온’하면 목표물마다 번호가 매겨진다. 다 모으면 슛을 쏜다. 목표물들이 차례대로 연속해서 터진다. 어떤 순서로 쏘느냐에 따라 다른 멜로디가 울린다. 바로바로 처리하지 않고 모았다 쏘면 슈팅의 난이도가 높아지지만 대신 많이 모을수록 더 풍성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슈팅 자체로는 크게 난이도가 높거나 디자인이 탁월한 건 아니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이리저리 만들어내는 재미 때문에 몇번이고 플레이하다 보면 어느새 <레즈>의 세계로 빠져들어 있다.
<레즈>는 독창적인 공간을 창조해낸다. 이 매혹적인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게이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실체가 없는 공간의 환타지를 노래하기 위해 <레즈>가 택한 방법은 게이머의 상상력에 기대는 것이다. 극도로 추상화된 선과 면, 도형들이 빠른 속도로 던져진다. 던져지는 이미지들의 상징 속에서 게이머는 자유롭게 공간을 떠돈다. 현실의 정밀한 모방으로 공간을 채우는 대신 무한한 여백을 만들어놓고 게이머의 상상이 스며들도록 청한다. 게이머는 기꺼이 공모에 동참한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음악이 이를 용이하게 만든다.
<레즈>는 폴리곤 개수를 내세우지 않는다. 화려한 텍스처를 자랑하지 않는다. 화면에 펼쳐지는 점과 선은 상상을 지배하는 대신 자유롭게 분출하도록 부추긴다. 게이머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느낀다. 공간은 게이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 놓여 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