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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숨은그림찾기] ‘인간적인’ 가능성은 존재할까
정지혜 2016-06-02

현실, <네메시스> 그리고 <곡성>… 불행 앞에 놓인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다

<곡성>

01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 백색 마스크 군단이 쏟아져나온다. 행여나 서로의 몸이 닿을세라 미묘하게 움찔거리면서. 누군가 밭은기침을 내면 그 주변인들의 미간에 주름살이 간다. 주의와 경계를 넘어선 어떤 적개. 옆칸에 탈 걸, 다음 기차를 기다릴 걸, 괜스레 집을 나와 이 난리를…. 수많은 가정형의 후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자책한다. 그리고 두렵다. 어느새 자책은 화가 돼 분출된다. 불특정한 다수의 타인이 잠정적인 적이 돼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지하철, 공원, 식당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적개의 감정이 일상의 감정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난해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메르스가 몰고 온 일시적인 상황 속 감정만은 아니었을 거다. 부정확한 정보와 불확실한 조치는 불신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급기야 무작위적인 불행의 전의에 끝모를 적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02

그때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게 된 건 우연치고는 참 묘하다 생각했다. 일상의 공간을 잠식했던 공동의 우울과 적대는 <네메시스>의 세계에 일던 불안과 맞물린다. 1944년 여름의 뉴어크. 그곳에는 폴리오(polio)가 유행처럼 번져간다. 주로 열여섯살 이하의 아이들이 많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도 폴리오의 불운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스물세살의 청년 버키 캔터도 두렵다. 버키는 2차대전에 참전한 친구들과 달리 마을에 남아 아이들의 놀이터를 감독하는 자신에게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던 청년이다. 소설의 표현대로라면 ‘특권이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 여름 동안 도시에서 (폴리오를 피해) 사라지고 나면’ 버키 같은 사람들은 도시에 남아 자신의 일터를 지킨다. 그 와중에 버키는 애인이 있는 인디언 힐로 잠시 가게 되는데 그곳에도 폴리오가 들이닥친다. 버키는 자신이 인디언 힐에 폴리오를 가져왔다며 자책한다. 그 자책은 평생 그에게 죄의식으로 남는다. 우연히 찾아온 폴리오를 힐난하는 건 버키에게 있어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같았다. 필립 로스는 네메시스(Nemesis)를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이라 말한 바 있다. 폴리오가 버키에게 네메시스였을까. ‘비극이라는 것, 그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비극을 죄로 바꾸어야만 했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했다. 유행병이 생겼고 그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는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급격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져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 (<네메시스> 266쪽) 이러한 버키의 마음에 독자가 감정이입해 따라가려할 때쯤, <네메시스>는 화자를 버키에서 폴리오에 걸린 한 아이에게로 변경한다. 아이는 자신이 불운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버키에게 말한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이어서 아이는 버키가 그 자신이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죄책감이 생기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네메시스>를 끝으로 필립 로스는 절필을 선언했고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현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온성을 냉기 어린 문장으로 써내려간 노작가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 ‘네메시스’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불행의 불가항력성 앞에서 인간은 미약하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나도, 그리고 당신도 한계투성이의 미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일을 말하려던 것일까. 어쩌면 그 미약함을 계속 생각한 뒤에야, ‘인간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네메시스>

03

<곡성>(2016)을 생각했다. <곡성>은 불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찼다. 어떤 설명도 없는 대책 없는 불행들이다. 그 살을 맞아 종구(곽도원)와 그의 가족과 마을 공동체가 철저히 파괴돼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종구는 적의를 드러내보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완전한 패배다. 출구 없는 미궁 속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나홍진 감독이 한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결국 <곡성>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에 대한 위로라고 봤다. 불행을 미리 알면 막을 수 있었을까? 그건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가 내리면 옷이 젖게 되듯 누군가의 불행도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행에 대해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씨네21> 1054호) 불행의 가해로 파괴된 자를 위로하는 자리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 <곡성>은 ‘인간적인 것들’이라 불리는 것들을 경유해 인간을 파괴하는 방식을 취한다. 종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불행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려 의심할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버린다. 그곳에서 생각하고 의문을 던지는 인간의 행위는 불행의 씨앗이다. 인간과 귀기 어린 것들 사이에다 인간성의 특성들을 무작위적으로 뒤섞어두기도 한다. 예컨대 자신을 추격하는 마을 청년들을 피해 암벽에 피신한 (귀신 같은) 외지인(구니무라 준)이 느닷없이 눈물을 흘린다. 꽤 개탄스럽거나 슬픈 감정이 실린 눈물이다. 종구에게 닭이 세번 울기 전까지 집으로 가지 말라던 (귀신 같은) 무명(천우희)은 어쩌자고 손을 내밀어 덥석 종구의 팔을 잡은 걸까. 그리고 왜 처연한 얼굴을 하고 길에 앉아 세 번째 닭울음을 듣는 걸까. 외지인의 눈물과 무명과 종구의 접촉에 대해 영화는 끝내 모르쇠로 넘긴다. <곡성>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라기보다는 한없이 무력해 보인다. 거의 무(無)의 상태로까지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럼 어디에다 대고 누굴 위로해야 하는 건가. 그걸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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