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만화와는 점점 멀어졌다. 그 당시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헌책방은커녕 만홧가게도 없었다.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가면 여자 고등학교 앞에 서점이 하나 있기는 했고, 조금 더 걸어가면 레코드 가게가 있기는 했지만, 서점을 가느라 길을 걸으면 왼쪽에는 한없이 이어진 담벼락이었고, 오른쪽에는 차가 달리는 차도. 그것밖에는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구경할 것도 없었고,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다. 길을 걸으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 나를 붙잡아 헤드록을 걸거나 간지럼을 태워 나에게 애정표현을 하던 구두닦이 소년도 없었고, 휴가 나와 대낮부터 술에 떡이 되어 거품을 물고 쓰러진 이등병 따위는 절대 볼 수 없었다. 신촌 목마 레코드의 고색창연한 나무 미닫이문의 낭만적인 분위기나, 홍익서점의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책들이 뿜어내는 코를 찌르는 종이 냄새에 비해 이사 간 동네의 서점과 레코드 가게는 뭔가 비어 있고 급조된 듯한 엉성한 곳이었다. 이제 동네는 친구가 있어서 그들과 놀고, 돌아다니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그런 재미있는 곳이 아니라 그 동네에 집이 있으니 나갔다가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이 되어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에게 만홧가게는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갈 택시비가 없을 때 새벽 첫차를 기다리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거나, 방위병이 되어 예비군 훈련통지서를 돌리다 아픈 다리와 추위를 피해 잠시 들러 쉬어가는 곳이거나, 영화 상영시간 사이 남은 시간을 죽이러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재미있는 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히트작이었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과 <지옥의 링>이 그 시기의 만화였고, 김수정의 <아기 공룡 둘리>, 박봉성의 <신의 아들>이 있었고, 고행석의 <구영탄 시리즈>를 안 보고서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친구들끼리 별명을 고행석 만화의 주인공들 이름을 가져와 부르면서 낄낄거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때는 이두호, 이희재, 박흥용, 백민석의 새로운 만화들이 나온 시기로 한국 만화의 새로운 전성기였다.
만화보다 더 좋은 것들
만홧가게의 의자도 딱딱한 나무 의자가 아니라 푹신한 소파가 되었고, 500원만 내면 하루 종일 만화를 볼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라면까지 끓여주는 신세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만홧가게에 가기보다는 레인보우의 새 앨범이 레코드 가게 유리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떠날 줄 모르게 되었고, 제프 벡 그룹의 69년 데뷔 앨범을 사서 바람에 레코드판이 깨질세라 가슴에 안고 집으로 종종걸음을 쳤으며, 산울림의 새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전곡 감상의 기회를 준다는 <두시의 데이트>를 듣기 위해 여자 친구와 한 데이트 약속도 취소하는 바보짓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까만 표지의 동서추리문고는 모두 다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사고 싶은 추리소설의 구입희망 목록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놓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게다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이청준의 <조율사>, 김홍신의 <해방영장>을 읽으면서 만화는 점점 더 멀어졌다. 이제 만화책은 문방구에서 파는 물건이 되어 동생이 사오는 조악한 해적판의 <마징가 Z>나 <루팡 3세> <동짜몽(도라에몽)>을 보며 킬킬거리기는 했지만, 만화책을 보고 열광하는 것은 동생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나는 평생 사랑에 빠져버릴 엄청난 것을 만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술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혼자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나는 당시 노는 애들이 입고 다니던 나팔바지에 무늬가 요란한 남방을 입은 눈매가 무서운 또래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눈싸움을 했다. 그 소년은 건들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눈싸움에 안 지려는 나를 보고 피식 비웃고는 “임마 난 네 선배야”라고 했다. 알고 보니 퇴학당한 선배였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든다며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고 그에게 지기 싫었던 나는 그와 함께 광화문까지 나가서 세종문화회관 뒤편, 튀김골목이라 불리는 판잣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늘어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소주 한병에 튀김 한 사발을 시켜놓고 호기롭게 한잔씩 주고받았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소주 두병을 나눠 마시고 튀김집의 문턱을 밟고 나올 때 내 가슴속에는 활활 타는 태양이 들어가 있었다. 그와 2차로 광화문 덕수제과 옆의 중국집으로 들어가 군만두에 고량주를 한병 더하는 2차를 하면서 그는 나에게 자신의 가출 내력을 말하며 가출 성공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가출하면 먹고 자는 것이 문제인데, 값싸고 부피는 작게 차지하지만 포만감이 으뜸인 중국 월병을 사들고 가출하면 일주일은 견딜 수 있다는 믿기지는 않지만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이 세상에는 만화보다 더 좋은 것이 천지에 깔려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둘씩 만나는 중이었다.
항상 패기만 하던 것이 선생이었는데,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해주는 선생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이었다. 단과 학원을 땡땡이친 재수생인 내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층 창문에서 아침 햇살이 들어와 화실 안에는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그가, 당시에는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수감 중인 시인 김지하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게 김지하에 대해 물었다.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그림을 그리는 내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시를 나지막이 읊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날 아침의 햇살, 그가 읊조렸던 시구,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 또한 멋있었다. 그들이 참여한 ‘현실과 발언’이라는 전시회를 보고 너무 놀라 뒤로 자빠져버렸다. 미술이란 것이 세상에 대해 저렇게 멋진 일을 할 수 있구나를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은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와우산 자락의 꼬불꼬불 비탈진 골목길을 돌고 돌아가면 친구의 관 같은 방이 있었다. 그곳에서 제프 벡의 <푸른 옷소매>를 들으며 밤새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베니어판 칸막이로 막아놓은 옆방에서 자는 가족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친구는 내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회색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창비쪽 글만 보지 말고 문학과지성사와 김현의 글을 읽으라 했고, 이성복의 시를 이야기해주었다. 술이 다 떨어질 무렵 그는 나에게 칸트와 헤겔을 안 읽는 것은 대학생으로서 직무유기라 했고, 나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창피했다. 그는 나에게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얼마나 재미있는 소설인지를 알려주었고, 그와 영화를 보고 나면 나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는데 그는 보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감탄할 만했고, 그것을 혜안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를 다니고, 금요일 심야극장에서 에로영화를 보고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방패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어 교문 안으로 들어갔었다.
<닥터 슬럼프>와의 만남
그 옛날, 삼촌이 우리 집에 오면 “뭐 재미있는 만화 없냐?”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삼촌 집에 가서 삼촌의 아들, 딸들에게 “뭐 재미있는 만화 없냐?”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촌 동생들은 자기들이 보는 만화책을 나에게 던져주었는데, 아주 작은 포켓북 사이즈에 표지 색깔도 울긋불긋 몰취미 가득한 만화책이었다. <닥터 슬럼프>. 그날 나는 재수, 군대, 대학생활 동안 못 웃었던 웃음을 모두 웃어버렸다. 도리야마 아키라라는 만화가가 그린 일본 만화로 13살 소녀가 주인공이었다. 소녀는 인간과 똑같은 외모를 한 로봇이고, 게다가 시력이 나빠 안경을 써야 한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서클에 가입하고 싶어 학생회관을 기웃거리다 만화 연구회라는 곳이 있어 들어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일본 만화 <내일의 죠>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발길을 돌렸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과 친구에게 마카로니 웨스턴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그런 것은 쓰레기야!”라고 너무나 단호하게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해,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던 나는 이 바보 같은 만화가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리고 80년대 말 요요코믹스에서 조악한 표지로 <드래곤 볼>이 해적판으로 나왔다. 나는 또다시 으하하하! 웃으며 이 바보 같은 만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사람을 그리는 것보다는 기계, 특히 자동차와 오토바이, 비행기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고, 너무나 뛰어난 그림솜씨에 비해 너무나 게을러서 대충대충 그리고 대충대충 스토리를 짜고, 마감 시간을 코앞에 두고도 프라모델을 만들고, 커피가게에 가서 만화책을 뒤적이며 늦장을 부리다가 부랴부랴 울면서 밤새워 만화를 그려 겨우 마감을 맞추는 이 만화가는 엄숙주의에 코 아래까지 빠져 있던 나에게 구원이었다.
그의 만화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슈퍼맨, 고르고 13, 미야모도 무사시, 더티 해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질라도 그의 만화 속으로 들어오면 귀여워진다. 만화의 주인공 아라레는 학교에서 돌아와 자신을 만든 박사인 센베에게 남들 다 있는데 자신에게 없는 게 있다며 만들어달라고 한다. 센베는 고민한다. 이 여자아이에게 없는 것은 뭘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아라레가 자신에게 없는 것은 배꼽이었다고 한다. 이 만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연재 초기의 에피소드를 보다가 센베 박사가 도라에몽 같다고 독자가 느낄 무렵 아라레의 입에서 이 만화는 도라에몽 같다는 대사가 흘러나온다. 만화가가 스스로 자신의 만화의 치부를 들춰내 웃기는 것이다. 만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콧구멍이 없다. 이것 역시 도리야마는 개그의 소재로 삼아 하나의 에피소드로 만든다. 이야기의 소재가 떨어지면 태연하게 지난 에피소드를 약간 변형하여 레벨업된 형태로 그려낸다. 펭귄 마을의 자동차 대회 에피소드들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징가 Z>처럼 한 에피소드에 하나씩 아라레와 센베를 해치려는 악당을 등장시켜 몇주의 에피소드를 거저먹는다. 어찌 보면 별 생각 없이 한회 한회를 막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재미있게 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를 먹어야 하는 주인공의 문제
아라레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는 센베의 무신경으로 중학교 1학년생이 된다. 아마도 <소년 점프>의 연령층이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뭐 한 일년 정도 연재하면 성공한 것 아니겠어, 했는데 이거 참. 로봇 소녀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인기를 얻어 1980년 초에 시작된 것이 1984년까지 이어진다. 장장 5년간 연재를 한 것. 따라서 아라레는 중학교 1학년이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를 먹어야 한다. 애초에 시공간을 무시한 만화였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아라레가 학교에 다니고 학교 여선생인 미도리도 중요 캐릭터로 등장하고, 사계절이 만화에 언급되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도 중요한 개그 소재가 되니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아라레가 성장하는 현실의 시간을 만화에 넣어야 한다. 따라서 아라레는 연재가 끝날 무렵에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야 하는 주인공의 문제는 만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골칫거리다. 처음 등장한 얼굴이 독자에게 환영받았다면 그 얼굴을 나이가 들게 고쳐 그리기란 극화가 아닌 만화의 세계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10여년을 연재한 <도라에몽>의 진구는 중학생이 되지 못하고 항상 모호한 초등학생의 연령대이다. <괴짜가족>의 주인공들 역시 그렇다. 이 만화의 주된 에피소드는 모두 학교에서 일어나고, 작가는 처음에는 주인공들의 진급을 염두에 두고 만화를 그렸으나 연재가 3년 이상 늘어나자 주인공들의 얼굴을 나이가 들게 그릴 수 없는 노릇이어서 그만 포기하고 대충 넘어가버린다.
도리야마 아키라는 그것을 대충 넘기지 않는다. 아라레는 로봇이기에 언제나 같은 얼굴이고, 나머지 주인공들은 성장한다. 미래를 찍어주는 사진기 에피소드에서 모두들 나이를 먹지만 아라레와 가짱만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이다. 작가는 한번 더 심술을 부린다. 아라레가 만화를 보는 독자들을 사진 찍는 것. 사진기가 찍은 미래의 연도는 2080년. 아라레가 찍은 독자의 모습은 해골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성장하지 않는 로봇 소년 아톰을 가지고 로봇 소년의 고통에 포커스를 두고 만든 에피소드가 있다. 아톰이 늙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외계인이 아톰과 이별하며 그에게 준 선물은 늙은 아톰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연재가 계속되며 데즈카는 늙지 못하는 소년 아톰에 대해 성찰하기를 포기하고 만다. 이 문제는 <드래곤 볼>에 가서 더욱 커진다. 애초 사랑스런 캐릭터였던 어린 오공이 성장하면서 썩 매력이 없는 어른이 되자, 그의 아들을 등장시켜 공백을 메우지만 이미 주인공은 별 매력이 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렸으니, 주인공의 캐릭터가 주는 맛으로 이끌어가던 만화의 초반부에 비해 중반 이후부터는 싸움의 긴장감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야 하는 고생을 한 것이다.
도리야마가 만든 <닥터 슬럼프>의 세계는 거칠 것이 없다. 센베를 깨우기 위해 입속에 폭탄을 넣어도 센베의 머리카락만 약간 탈 뿐이고, 아라레가 몇번이나 달 깨부수기를 하고 지구 깨기를 해도 펭귄 마을은 평화롭다. 월트 디즈니가 만든 만화의 세계와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일본 만화의 세계, 극화가들이 만든 일본 극화의 세계를 도리야마는 비틀고 과장하고 약점들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웃겨버린다. 그렇다고 뭐 굉장한 무엇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매주 시간에 쫓기며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는 고민은 십분만 하고 두 시간은 놀다가 시간이 되면 부랴부랴 콘티를 짜고 그것을 복사하여 차를 타고 공항까지 가서 우편으로 도쿄의 편집부에 보내고 편집자의 오케이 사인을 기다려 펜 선을 입히는 일을 5년간 한주도 쉬지 않고 시시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게으른 천성을 밀어내고 필사적으로 울면서 마감을 맞춘다. 그렇다. 그런 것이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