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아이덴티티는 즉각적이고 간결하다. 화려하고 빽빽하게 프레임을 채웠던 기존 국내 영화제들의 접근과는 많이 다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그래픽디자인 전반을 담당한 스튜디오 헤이조의 조현열 디자이너는 “가장 단순한 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적은 게 가장 많다”고 생각한다. 평소 작업에서 과감하게 글자를 배치해온 그는, 전주와 필름페스티벌이라는 키워드의 자소가 ‘ㅈㅈ’와 ‘ㅍㅍ’ 형태로 반복되는 특징을 활용해,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쓴 지읒과 피읖을 큼직하게 배치했다. 자신의 취향을 고수하면서도 한글 사용을 강조하는 지자체의 보수적인 성향에도 부합되는 결과물이었다.
그와 전주국제영화제와의 연이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영화제에서 열린 전시 <왕빙: 관찰의 예술>의 포스터와 리플릿을 디자인하고, ‘100 Films 100 Posters’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럼에도 영화제 아이덴티티를 비롯해 티켓 카탈로그, 기념품, 현수막 등 영화제의 디자인 전반을 담당하는 건, 주로 미술계와 작업해온 그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영화제쪽에서 리스트를 보여주는데 까무러치는 줄 알았”을 만큼 양부터 엄청났다. 그래서 그는 여러 에이전시에서 경험을 쌓은 권택수 디자이너를 비롯한 여러 디자이너의 손을 빌렸고, 덕분에 급박한 일정과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준” 영화제의 협조 역시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한번 해보니까 감이 오는 것 같다.” 고된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현열 디자이너는 내년에도 제의가 온다면 다시 참여하고 싶다고 흔쾌히 말한다. 이번 작업에 만족했다기보다는 아쉬움을 보완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대개 디자인 작업을 마친 후엔 제작하는 곳에 찾아가 감리까지 보기 마련인데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해 아쉬웠다고 한다. 디자인 작업을 하고 싶은 영화제가 있냐는 물음에 단박에 “로테르담국제영화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평소 남의 것을 참고하지 않은 편이지만 이번에 첫 영화제 작업을 하면서 로테르담국제영화제의 아이덴티티를 많이 참고했다고. 미니멀한 방식과 도시적인 느낌이 잘 맞았기 때문이란다. “아이덴티티와 카탈로그 작업에 에너지를 많이 쏟았는데, 이번에 전주에 와서 영화제 거리를 둘러보니 공간에서 보여지는 그래픽 형태의 중요성이 크더라. 그래서 그런 부분을 더 많이 신경 쓰고 싶다.”
일상 속 판촉물들
조현열 디자이너의 취향은 ‘작품’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일상 곳곳에서 마주하는 갖가지 그래픽을 관찰하는 걸 즐긴다. “지역적인 토대에서 나온 형태든, 무성의해 보이는 사인이든, 기이한 형태로 거리에 나붙어 있는 인쇄물이든” 가리지 않아서 발견할 때마다 휴대폰에 저장해놓는다. 간결함의 원천이 저런 일상적인 오브제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