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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재 뮤지션 프린스를 추모하며

PRINCE(1958-2016)

<퍼플 레인>

‘팝의 전설’ 프린스가 지난 4월21일 향년 57살로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외곽 카버 카운티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80년대부터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과 함께 팝음악을 주도했던 그는 1978년 데뷔 앨범 발매 이후 39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으며, 7개의 그래미상을 받고 1억장이 넘는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줄곧 공연에 열정적이었고 사망하기 직전에도 곡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그 소식은 더욱 안타깝다. 프린스의 공연을 무려 세번이나 직접 봤다는, 프린스야말로 진정한 음악 천재라고 말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배순탁 작가가 추모글을 보내왔다.

처음엔 거짓인 줄 알았다. 진짜다. 최근에 이른바 ‘뻥카 기사’가 워낙 많은 터라 “어떤 놈이 또 장난질했구먼” 하면서 스크롤을 내렸다. 아마 새벽 3시나 4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 이상하다? 다시 한번 기사를 처음부터 확인해본다. 웃음을 유발하려는 농담 섞인 문장은 단 한줄도 없다. 속보라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일까. 기사는 건조한 톤으로 왕자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사망 원인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프린스라는 뮤지션이 이제는 부재한다는, 그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신이 말하는 대로>라는 만화책이 떠올랐다. 나와 당신에게도 죽음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나는 자랑이 심한 편이다. 내 페친들은 잘 알겠지만, 뭘 사든지 일단 페북에 사진을 찍어 자랑부터 해야 안도하는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중 최고 자랑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국내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프린스의 공연을, 무려 세번이나 본 남자라는 것이다. 장소는 2013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프린스가 사흘간 헤드라이너로 나선다는 사실이 발표되자마자 티켓은 동났고, 나는 방송을 위해 그곳을 찾았다. 내 인생에서 ‘배순탁, 너 성공했구나’ 하고 느낀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프린스는 과연 굉장했다. 폭넓은 음역대를 바탕으로 저음부터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오갔고, 100% 라이브를 지향하는 백밴드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여성 드러머의 빼어난 미모가 남성들을 홀렸다는 건 비밀). 그러나 프린스는 무엇보다 환상적인 기타리스트였다. 화려한 속주에 함몰되지 않고 기타를 마치 자신의 팔과 다리처럼 부릴 줄 알았다. 짜릿한 펑키 루브를 기반으로 날카로우면서도 육중한 블루스 애드리브에 이르기까지, 솔로면 솔로, 리듬 커팅이면 커팅, 못하는 게 없었다.

프린스가 투어 수익에서 언제나 정상을 놓치지 않는 이유를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하긴 어떤 미친 뮤지션이 자신의 신보 CD를(비록 구운 CD였지만) 공짜로 관객에게 나눠주겠나. “그거 들으면 넌 다시 공연장으로 오게 될 거야.” 자신의 라이브가 그 정도로 자신 있었기에 가능한 호방함이었을 것이다.

프린스만의 음악 제국

프린스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에서 그랬다. 《Purple Rain》의 그림자만이 일렁이던 이 땅에서 기타리스트로서의 프린스는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의 멘트 아닐까 싶어 다음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나야 모르죠. 프린스한테 가서 물어보세요.”(I don’t know. Ask Prince.) 다른 누구도 아닌 ‘기타의 신’ 에릭 클랩턴의 대답이다. 슬프게도, 남녀의 성(性) 기호를 합쳐 만든 그의 ‘러브 심벌’(The Love Symbol) 기타 보디는 이제 더이상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다.

프린스는 기타 외에도 못 다루는 악기가 거의 없었다. 30종 이상을 다룰 줄 알았으니 편곡 작업이야 숨쉬듯이 했을 테고, 이를 통해 펑크, R&B, 록, 신스팝, 재즈 등의 장르를 무람없이 오가며 자기만의 제국을 완성했다. 세상은 그의 제국을 가리켜 ‘미네아폴리스 사운드’라고 불렀다. 워낙 장르가 많았기에 오히려 하나의 장르로 수렴할 수 없었고, 결국 그의 고향을 장르명으로 대치한 것이었다. 고로 ‘프린스가 곧 하나의 장르’라는 표현은 적확하다. 천재라는 별명 역시 이렇듯 수많은 장르를 질료 삼아 끊임없이 자기를 혁신했기에 가능한 찬사였다.

그런데 오디션 프로에서 누가 조금 잘했다 싶으면 천재라고 치켜세우는 게 영 못마땅했던 사람들, <씨네21> 독자 중에도 분명 있을 것이다(그렇게 믿는다). 오로지 최상급만이 살아남는 언어 인플레의 시대에 천재라는 수식은 더이상 특별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장담컨대 프린스만큼은 천재였다. 그것도 천재 중의 천재. 일례로 고 신해철은 그를 “20세기에 태어난 흑인 모차르트”라고 표현했다. 미친 듯이 작품을 써내던 모차르트처럼 프린스도 생전에 수많은 곡과 앨범을 남겼다. 세상에. 정규작만 따져도 39장에 달하는 그의 디스코그래피가 이를 잘 말해준다.

《Purple Rain》으로 정점에 오르다

장르의 한계를 허문 뮤지션이지만, 39장에 이르는 앨범의 광대한 영역을 관통하는 핵심은 어디까지나 펑크다. 특히 2000년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지금 당장 2007년 앨범 《Planet Earth》에 수록된 <Chelsea Rodgers>를 들어보라. 쫄깃한 그루브가 넘실거리는 이 곡은 프린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이를테면 그는 펑크의 전설이라 할 제임스 브라운의 발전적 완성태다. 최근의 행보를 살펴보면 2014년 발표한 《Art Official Age》에서는 아예 <Funknroll>을 기치로 내세워 특유의 반복의 미학을 경험하게 했다. 어디 이뿐인가. 3인조 여성 밴드 서드아이걸과의 콜라보레이션의 결과인 《Plectrumelectrum》(2014)의 <Another Lovegt;에서는 강렬한 록과 펑크를 섞어내 찬사를 받았다. 참고로 아까 언급한 미모의 드러머가 바로 이 서드아이걸의 멤버 한나 포드다.

이 위대한 역사의 시작은 1978년이었다. 데뷔작 《For You》를 시작으로 《Dirty Mind》(1980), 《1999》(1982) 등으로 재능을 입증한 프린스는 <I Wanna Be Your Lovergt; <Little Red Corvette> 등의 히트 싱글을 발표하면서 상업적인 잠재력도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 온 정점이 바로 1984년작 《Purple Rain》이다. 수도 없이 격찬을 받은 이 음반으로 프린스는 베이스를 아예 삭제해버리는 파격(<When Doves Cry>)을 시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장기인 성적인 노랫말(<Darling Nikki>)을 십분 살려 우리가 익히 아는 스티커를 음반에 붙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 유명한 ‘Parental Advisory’(부모의 동의하에 청취 가능)의 탄생 배경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뒷날 미국 부통령 자리에 오르는 앨 고어의 부인 티퍼 고어다. 티퍼 고어는 당시 11살이던 딸이 <Darling Nikki>를 듣는 데 충격을 받고 행동에 나섰다. 이른바 ‘학부모 음악 조사 센터’를 설립해 음반업계로 하여금 특정 레코드의 표지에 경고 딱지를 붙이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물론 프린스가 성적 환상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점을 티퍼 고어가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또한 그의 음악이 전례 없이 독창적이라는 사실 역시 티퍼 고어의 관심 밖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이같은 조치는 즉각 반발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언론, 출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에 역행하는, 사전 검열의 성격이 농후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는 격언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상황은 티퍼 고어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결과적으로 <Darling Nikki>를 수록한 앨범 《Purple Rain》은 두곡의 넘버원 싱글 포함 네곡의 톱10 히트곡을 쏟아냈다. 그래미에서는 두개 부문, 아카데미에서는 최우수 주제가상을 휩쓸었고, 미국에서만 1천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대중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프린스를 둘러싼 파문이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촉발하는 작용을 한 것이다.

이후 《Purple Rain》에 대한 평가는 끊임없이 올라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2008년 이 음반을 ‘지난 25년간 최고작 1위’로 뽑았고, 2012년에는 미의회도서관에서 주관하는 ‘내셔널 레코딩 레지스트리’에 영구 등재되었다. 참고로 후자의 선정 기준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중요한’(culturally, historically, or aesthetically important) 작품이다. ‘Parental Advisory’ 스티커가 그야말로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할까.

<체리 문>

“난 전부가 될 거야!”

<Darling Nikki>처럼 섹스는 프린스의 주요한 창작 동력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그는 지루한 평화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밀어붙였다. 동료이자 라이벌이던 마이클 잭슨이 ‘아메리칸 스위트하트’였다면, 프린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표현 그대로 “어두운 동굴의 사자”였다. 그렇다고 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생전 공동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공식 석상에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적도 있었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후 프린스는 한 인터뷰에서 짧은 단어로 대답해달라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질문에 “완벽한 천재”라고 답했다.

이후 1987년의 《Sign ‘O’ the Times》를 비롯해 프린스의 걸작 퍼레이드는 계속되었다. 음반사와의 불화로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러브 심벌’로 사람이 아닌 기호가 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프린스라 알려졌던 아티스트’(The Artist Formerly Known as Prince)라고 불렀다. 음반사와 화해하고 다시 프린스로 돌아온 그는 2000년대 이후에만 16장의 레코드를 만들어냈다. 가히 가공할 창작력이라 할 숫자다.

그가 생전 발표한 39장의 음반 중에는 졸작도 있고 평작도 있다. 수작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삼켜버린 걸작도 최소 5장은 된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는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1994)처럼 아름다운 멜로디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자인 동시에 <Kiss>(1986)처럼 거의 우기듯이 리듬을 반복하는 마이너한 구조로 빌보드 1위를 일구는 기적도 행했다. 더 나아가 그는 스티비 원더의 말마따나 “원하면 어떤 음악이든 할 수 있는” 뮤지션이었다. “난 전부가 될 거야!” 1884년 화가 마리 바시키르체프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써서 후대의 여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랬다. 적어도 음악에 관한 한 프린스는 전부가 되었던, 전례 없는 아티스트다. 그는 음악 그 자체였으니까.

그는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대부분의 뮤지션이 신곡의 홍보 도구로 사용하는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그는 자신의 영웅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커버해 연주했다. 이유는 단 하나. 관객에게 좀더 훌륭한 음악과 무대를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었다고 당시 이 쇼의 프로듀서는 회상한다. 쇼가 시작되기 전 하늘에서 비가 엄청나게 퍼붓고 있었다. “지금 비 오는 거 알아요?” 프로듀서가 물었다. “알아요.” 프린스가 대답했다고 한다. “(감전 사고를 걱정하며) 괜찮겠어요?” 프로듀서가 이렇게 묻자 프린스가 대답한다. “좀더 세게 내리게 할 수 있어요?” 쇼의 대미는 당연하게도 <Purple Rain>이었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으니 꼭 찾아서 보기를 바란다. 인터뷰가 삽입된 버전이라 좀 짜증나지만 그래서 더 좋기도 하다.

프린스, 음악을 살다 가다

이 에피소드를 전하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의 공연 도중 그는 자신의 백밴드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저 말에 모든 관객이 환호하며 물개 박수를 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 이 뮤지션들을 봐라. 진짜 악기를 연주하는, 진짜 뮤지션들이다.”

어쩌면 꼰대 발언 같을 수도 있지만 세상에, 프린스가 하니까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음악을 ‘하는’(do) 뮤지션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의 그는 음악을 ‘사는’(live) 뮤지션이었다. 왕자님에게 경배를. 앞으로는 우리가 그의 음악을 영원토록 살게 할 것이다.

<그래피티 브리지>

영화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던 왕자님

프린스의 영화들

<퍼플 레인> Purple Rain, 1984

프린스의 연기 데뷔작이자 뮤지컬 형식의 영화. 프린스 자신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볼 수 있는 키드(The Kid) 역할을 맡아 나쁘지 않은 연기를 보여줬다. 중간중간 삽입된 프린스의 공연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이 영화가 거둔 상업적 성공은 프린스와 관련된 작품 중 가장 돋보이지만, 사운드트랙의 엄청난 히트에 가린 감이 없지 않다. 《Purple Rain》 앨범이 영화 사운드트랙인 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꽤 된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비평적으로는 안타깝게도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 2개 부문 노미네이트.

<체리 문> Under the Cherry Moon, 1986

프린스의 감독 데뷔작. 뮤지컬과 드라마가 혼재된 형식의 작품으로 프린스가 직접 출연했고, 프린스와 함께 미네아폴리스 사운드를 구축했던 모리스 데이 앤드 더 타임(Morris Day and the Time)의 멤버들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프린스의 예술적 야심과 별개로 <퍼플 레인>보다 더 참혹한 성적과 평가를 거두는 데 그치고 만다.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에서 무려 5개 부문을 수상한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래피티 브리지> Graffiti Bridge, 1990

<퍼플 레인>의 후속작으로 볼 수 있는 영화. <퍼플 레인>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감독까지 맡았다. <퍼플 레인>에서 그랬듯 프린스는 키드 역을 맡아 연기에 다시금 도전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그렇게 좋지 못했다. 영화와 프린스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게 최종적으로 증명된 셈. 그러나 사운드트랙으로 발표된 앨범만큼은 《Purple Rain》과 마찬가지로 예외였다. 빌보드 6위, 영국 1위에 오르며 1990년대에도 프린스가 기세를 이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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