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까지 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최승연 감독은 무척 쑥스러워했다. 그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수색역>은 1999년 수색을 배경으로, 윤석(맹세창), 상우(공명), 원선(이태환), 호영(이진성), 네 친구의 사연을 그린 이야기다.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가 결정되면서 수색에 재개발 열풍이 불었고, 한때 절친했던 네 친구는 그로 인한 어떤 사건을 겪으며 우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엇갈린 우정이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최승연 감독이 빚어낸 인물들은 꽤 생생하다. 무엇보다 감독의 겸손한 태도와 달리 이 영화는 사건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힘이 세다. 3월31일 극장 개봉한 이 영화를 기억해야 할 이유다. 중앙대 연극영화과(04학번)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차례로 졸업한 뒤, 데뷔작 <수색역>을 만들어 관객 앞에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6여년. 개봉한 다음날, 최승연 감독을 만나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제작 뒷이야기에 대해 들었다.
-개봉 전, 직접 쓴 긴 제작기를 보도메일로 공개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와 ‘아쉽다’로 많이 갈리는 것 같다. 중간층은 없고. 영화를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려서 영화를 좀더 많이 알리고 싶었다.
-<수색역>은 2010년 12월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시작한 작품이라고.
=재능 많은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많았다. 조성희 같은. (웃음)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안 되겠다, 연출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도 교수였던 박헌수 감독님이 점심을 사주시면서 자극을 주셨다. 너는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 있고, 영화도 못 찍고, 앞으로 영화도 안 할 거라고 하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생각하면서 다음주까지 뭐라도 좀 써오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 수색 근처 증산동에서 살았다. 수색에 사는 친구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어울렸는데, 그때 함께 보냈던 친구들을 생각하며 써내려갔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시나리오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감이 없었고 나름 재미있었다. 쓰다 보니 이걸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더라. 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에 지원했더니 시나리오를 보신 선생님들이 ‘이거 정말 네가 쓴 거 맞냐’고 의심하면서 칭찬해주셨다. 결과는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지만 말이다. 박헌수 감독님께서 다시 밥을 사주시면서 학교 밖에 나가서 시나리오를 돌려보라고 하셨다.
-영화는 네 친구의 엇갈린 우정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중앙대 연극영화과 시절부터 늘 청춘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수색역>을 쓰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면, <수색역>은 외부의 시선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되더라. 그동안 청춘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해왔고, 좋아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해보자 싶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하고, 도전에 실패해 쓰러지는 어린 친구들의 사연 말이다.
-시나리오를 여러 제작사에 돌렸을 때 돌아온 반응은 어땠나.
=‘재미있는데 상업적으로 만들긴 힘들다.’ (웃음) 2012년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을 때도 같은 이유로 논쟁이 치열했다더라.
-영화의 초반부, 네 친구의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순으로 보여줘도 될 텐데 교차편집을 시도한 이유가 뭔가.
=원래 시나리오에는 시간순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어려운 제작 여건 때문에 총 11개 신 중 4개를 찍지 못했다. 나머지 7개 신을 가지고 편집했는데 상우의 시선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상우 중심의 이야기를 찾다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교차편집으로 서사를 진행시키기로 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배우들을 처음 캐스팅했을 때 그들에게 주문한 건 무엇인가.
=벌써 2, 3년 전 이야기라 배우들의 현재 상황과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겠다. 당시 배우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너희들에게 연기를 잘하게 해줄 순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좋은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너희들이 잘돼서 나를 이끌어달라.’ (웃음) 윤석을 연기한 맹세창에게는 연기학원 출신 아역배우 느낌을 좀 버리고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하듯이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상우를 맡은 공명은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친구라 상황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었다. 원선을 연기한 (이)태환이는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발전 속도가 무척 빨랐다. 호영을 맡은 (이)진성이는 연기를 편하게 할 줄 아는 배우였다. 되돌아보면 내가 캐스팅해서 그 친구들이 잘한 건 아니고 원래 잘했던 친구들이 어울리는 역할을 맡아준 것 같다.
-당신을 반영한 캐릭터가 있나.
=리더 같은 원선을 제외한 나머지 세명은 나를 조금씩 섞어놓은 것 같다. 영화를 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왜 몰라주지’ 하며 원망할 때는 상우와 닮은 것 같고. (웃음) 있는 듯 없는 듯하는 존재감은 호영 같고.
-상우를 연기한 공명은 다이너마이트처럼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몰라 이야기가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평소 좋아했던 캐릭터의 특징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좋은 친구들>(감독 마틴 스코시즈, 1990)의 토미(조 페시), <미스틱 리버>(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1993)의 지미(숀 펜)나 한국영화로는 <짝패>(감독 류승완, 2006)의 필호(이범수), <태양은 없다>(감독 김성수, 1999)의 홍기(이정재)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다보니 상우 같은 캐릭터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다.
-상우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릴 때 신경 썼던 건 무엇인가.
=그가 괴물이라고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웃음) 주변 사람 누구도 상우가 다친 원선을 위해 일을 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몰라주고, 상우는 상우대로 원선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드러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변해간 것 같다. 영화의 후반부, “나는 도와주려고 한 건데”라는 상우의 대사도 있지 않나. 하지만 행동은 그의 마음처럼 되지 않고, 상우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개봉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0년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영화를 포기하지 않고 장편 데뷔작을 만든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내렸던 결정이 다 좋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보다 재능 많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항상 무언가를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또 기대하다가 실망했는데,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대로 열심히 하고 싶다. 영화가 언제까지 상영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영화로 기억되고 평가받는 작품이 되길 원한다.
-대학 때 영화를 전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KBS 방송국에서 일하셨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영상을 자연스럽게 접했다. 광고든 방송이든 영화든 영상 매체와 관련한 일을 해보고 싶었다. 우연히 한겨레문화센터에서 16mm 영화 워크숍을 시작한다는 광고를 보고 거기에 다니면서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찍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이를 계기 삼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지원한 것이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써놓은 시나리오가 있다. 다음 영화는 <수색역>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상업영화면 더 좋을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