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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종주님 때문이다
윤혜지 2016-03-29

윤혜지 기자는 어떻게 중국 드라마에 빠져 설 연휴와 숱한 주말을 탕진하였는가

<랑야방: 권력의 기록>

시작은 보통의 토요일과 같았다. 때마침 건강이 좋지 않아 몸져 누워 있던 지난 설 연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습관적으로 TV를 틀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야심만만해 보이는 귀공자와 신하로 보이는 자의 대화였다. “(북연의) 6황자가 태자가 된 비결은 무엇이라더냐.” “랑야각에서 금낭을 받아왔답니다.” “천하에 모르는 게 없고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는 그 랑야각 말인가? 금낭 안엔 무어라 쓰여 있었더냐.” “기린재자. 그를 얻는 자, 천하를 얻을 것이다.” …두근두근.

종주님! 종주님! 종주님!

<랑야방: 권력의 기록>(이하 <랑야방>)은 수수께끼의 책사 매장소(호가)가 수도 금릉으로 건너와 황제의 눈 밖에 난 7황자 정왕 소경염(왕개)을 황제로 옹립한다는 내용의 정치 시대극이다. 천하에 모르는 일이 없다는 랑야각은 의술과 무공에 뛰어난 린신(근동)이 지배하는 강호의 정보 수집 기관으로 해마다 나름의 기준을 두고 재능 있는 자들을 분류해 목록을 작성한다. 앞서 언급된 “기린재자”란 뛰어난 재지를 갖춘 이들을 줄 세운 공자방의 1순위, 매장소를 이른다. 황위를 놓고 겨루고 있는 태자 소경선(고흠)과 5황자 예왕 소경환(황유덕)은 매장소를 자신의 책사로 데려오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고, 매장소는 손안에서 그들을 쥐락펴락하며 뒤로는 변방의 정왕에게 충성한다.

매장소는 칼을 든 무장들 사이에 혈혈단신으로 나타나 몇 마디로 상황을 제압하고는 위기에 처한 한 가족을 구해주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강호를 호령하는 강좌맹의 종주라는 그는 무공은커녕 약간의 추위조차 못 견디는 병약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화로와 손난로, 털망토를 늘 곁에 두고 살아야 남들처럼 앉아라도 있는다. 강호를 지배하며 편안히 살아도 될 그가 금릉의 황권 다툼에 굳이 끼어드는 이유는 과거의 원한 때문이다. 매장소의 진짜 이름은 임수. 13년 전, 1황자 기왕을 모시던 적염군의 장수였다. 적염군은 황제를 위해 외세와 전투를 벌이던 중 난데없이 역도로 몰려 몰살당한다. 세간에는 임수도 그때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품이 올곧은 정왕은 임수의 소꿉친구이자 과거 기왕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을 만한 인물이다. 매장소는 정왕부에 힘을 실어 기왕과 적염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책사 매장소로 살아간다. 세상에 이렇게나 사연 있는 남자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몇편을 더 봤다. 비극적인 과거사를 품은 병약한 매장소가 저 음험한 세계에서 얼마나 버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뜻밖에도 매장소는 몸만 허약할 뿐 입만 열었다 하면 독설을 퍼붓고 당한 건 배로 갚아주고 마는 대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매력적이야. 다음날도 방송 시간에 맞춰서 꼼짝하지 않고 <랑야방>을 봤다. 그다음날도, 그다음 다음날도 그랬다. 연휴 내내 속으로 “종주님!”을 부르짖으며 54부에 이르는 매장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고구마’와 ‘사이다’가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랑야방>은 믿고 싶지 않은 꽉 닫힌 결말을 맞았다. 나보다 훨씬 앞서 <랑야방>에 입덕한 천계영 작가는 트위터에 <랑야방>이 “사람의 감정을 온통 휘저어놓는데 그 방식이 너무나 세련되고 깊어서 계속 감탄하며 보게 된다”는 멘션을 올렸다. 요새 가장 행복할 때는 “<랑야방> 54회를 보자마자 바로 다시 1화를 클릭할 때”라고 했다. 덕심으로 대동단결. 나는 눈물을 삼키며 VOD 전편을 대여하고 말았다.

‘2015 올해의 드라마’

두 번째 볼 때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랑야방>은 중국 드라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여유로운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시각적 스펙터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액션과 전투 신들,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촬영, 치밀한 플롯까지 제대로 갖춘 기품 있는 고전극이었다. 현지에서 방영될 당시도 아이치이, 유쿠, 토도우 등의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평균 시청점유율 90%를 기록한 화제작이었고, 중국의 유력 시사지 <신주간>은 지난해 ‘2015 올해의 드라마’로 <랑야방>을, ‘올해의 배우’로 호가와 왕개를 선정했다. 호가야 원래 ‘고전극 남신’으로 유명했지만, 10년간 무명이었던 왕개는 <랑야방>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제작자 후홍량이 자신의 제작사 동양정우양광영시에서 만든 첫 작품이자 첫 번째 시대극인 <랑야방>은 철저한 고증과 디테일하에 만들어졌다. 가상의 양나라를 배경으로 했기에 딱히 고증에 매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지만 후홍량과 감독 공생, 이설은 궁궐 내 법도, 지위에 따른 복식과 장식의 차이와 머리 모양, 인물들의 행동 하나까지 철저히 중국의 고대 예법을 따랐다. 복식은 당나라 이전, 세트와 소품을 포함한 전체적인 미술은 송나라 이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옷감과 색채에까지 구분을 두어 각 인물의 성격도 분명하게 살렸다.

웹소설 시장이 발달한 중국에선 많은 드라마가 인기 웹소설을 각색해 제작된다. <랑야방>도 그러한데, 원작자 해연은 <랑야방>의 각본까지 도맡았다. 해연은 티도 안 나게 은근히 깔아둔 복선들을 아주 꼼꼼하게 회수하는데, 별 의미 없어 보였던 소품과 설정이 뒤에서 시의적절하게 활용될 때에야 비로소 복선들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무엇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상세히 적고 싶지만 <랑야방>을 영접하지 못한 독자에 대한 배려로 차마 쓰지 못함이 심히 통탄스럽다). 심지어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같은 이유로 자세히 쓰기 힘들지만, 매 장소가 임수로서 본래의 성격을 드러낼 때, 매장소의 호위무사 비류(오뢰)와 린신 각주가 아웅다웅할 때, 임수의 무술 스승이었던 금위군 통령몽지(진룡)가 눈치 없는 (없어도 너무 없는) 행동을 할 때는 정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도 못지않게 인상적이다. 임수의 연인이었던 예황(류도)은 10만 군대를 이끌며 어린 동생 대신 운남왕부를 대리청정하는 군주이자 강건한 무장이다. 황제 직속 수사대인 현경사의 수사관 하동(장령심) 역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로 언제든 수사관답게 냉철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캐릭터 설정이 강력해서만은 아니다. 평범한 궁녀나 시녀들도 각기 뚜렷한 목적과 주관을 갖고 움직이며 후궁들도 전면에만 나서지 않을 뿐 어디서든 발 빼는 일 없이 치열하게 싸운다.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하며 여권신장에 주력했던 마오쩌둥의 영향으로 현대 중국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상승했다. 엄격히 따지면 양성평등한 사회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최소한 중국 드라마 속의 여성 캐릭터들은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몰입이 가능했다. 심지어 예황은 화약방 폭발 사건의 배후로 매장소를 의심해 그에게 모욕을 주는 정왕을 “소경염! 잘못을 해놓고도 사과할 줄은 모르는구나!”라고 맹비난한다(그래도 정왕이 황자인데…. 이름을 막…). 중국 드라마에 센 여성 캐릭터가 많은 것도, 시대극 <랑야방>에서조차 이러한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위장자: 감춰진 신분>

배우 따라 흘러흘러 장르 따라 흘러흘러

그 뒤 몇번을 더 돌려보고 누구를 앓았는지는 비밀이지만, 아무튼 <랑야방> 대신 다른 것을 팔 때가 됐다. <랑야방>을 보았으니 응당 <위장자: 감춰진 신분>(이하 <위장자>)을 이어서 봐야 한다. <랑야방>을 만든 후홍량 사단의 작품으로(연출은 이설), 호가, 왕개, 근동이 그대로 역할만 바꿔 출연한다. <랑야방>을 하도 열심히 보았더니 <위장자>가 <랑야방> 인물들의 근현대 환생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위장자>에서 형들에게 시달린 명대(호가)가 불패의 책사 매장소로 화해 복수극을 펼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당연히 아니다). 주역들의 변신 못지않게 <랑야방>에 출연한 배우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자연히 다음 수순은 <랑야방>의 공동감독 공생이 장개주와 함께 연출한 <전장사>였다. ‘2014년 중국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명성대로 항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힘 있는 스토리, 세련된 화면 구성, 입체적인 캐릭터가 돋보였다. 이만하면 가히 믿고 보는 후홍량 사단이라 칭해도 되겠다. 중국 드라마는 지역마다 발음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고 성량이 좋아야만 배우가 성우를 쓰지 않고 직접 더빙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전장사>에서 곽건화는 대만 출신임에도 더빙 연기를 직접 해냈고, 덕분에 그의 꿀 같은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주인공치고 고청명(곽건화)의 분량이 너무 적다는 것이 신경쓰였을 뿐…. 그러니 다음은 <타래료, 청폐안>으로 곽건화를 좀더 감상하기로 했다. 장개주의 신작 수사물인 <타래료, 청폐안>엔 후홍량 사단의 총아(!) 왕개도 나온다. 그렇지만 수사물치고 지나치게 허술한 전개, 허세가 가미된 과잉 연출은 이미 ‘미드’와 ‘영드’에 익숙한 시청자들 눈에 차기 힘들 것 같다. 스릴러라는 건 무드에 그칠 뿐이었다. 곽건화와 왕개가 나란히 출연한다는 정도로 만족하고 기대는 접기로 한다.

<마이 선샤인>

억년수행남, 열풍

현대극 로맨스를 주로 제작하는 상하이극돈무화전매유한공사의 <마이 선샤인>은 대륙에 ‘억년수행남’ 열풍을 일으켰다. 남자주인공 허이천(종한량)이 ‘억년을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남자라는 뜻이다. 여자주인공 자오모셩(당언)의 괴이한 머리 모양만 참을 수 있다면 <마이 선샤인>은 완벽한 연애물이다. 그렇게 뜨겁게 연애를 했는데 말없이 7년간 자신을 떠나 있던 자오모셩을 허이천은 포용한다. 차가운 도시 남자를 가장하지만 허이천은 실상 그냥 ‘자오모셩바보’ 호구에 불과하다. 자오모셩의 오래전 사진 뒤에 ‘My Sunshine’이라 적어두는 로맨틱함, 데이트를 할 것처럼 만나자더니 혼인신고를 위해 곧장 동사무소로 직행하는 추진력(?),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해외에서 몰래 결혼한 사실을 숨긴 자오모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해심, 자오모셩이 벌이는 온갖 일들을 뒤에서 조용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박력, 먹고 싶다는 음식은 다 사주는데 심지어 새우 요리를 먹으러 가선 자오모셩에게 새우 껍질을 까주는 다정함까지 전부 갖췄다(먹을 것 주는 사람 좋은 사람…). 과연 억년은 수행해야 이런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거겠지. 같은 제작사의 <삼삼래료>도 ‘먹을 것 주는 사람 좋은 사람’이란 진리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먹방 드라마… 는 아니고 함께 밥을 먹으며 사랑을 키워가는 두 남녀의 로맨스를 그렸다. 주인공 슈샨샨을 연기한 조려영이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조려영에게 덕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익숙하지 않은 중국어의 장벽과 광전총국의 심한 검열 때문에 ‘입덕’이 어렵지만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그 낯설고 호방한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만다. 패턴화된 플롯, 과장된 설정이 간혹 무리수를 내놓기도 하지만 중국의 현재와 마찬가지로 중국 드라마도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대륙은 역시 (덕후에게도) 기회의 땅이었다. 평범한 토요일을 보낼 줄 알았던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중드’의 세계로 입문하고 말았다. …이게 다 종주님 때문이다.

중드, 어디서 볼 수 있나요?

CJ E&M에서 운영하는 중화TV(zhtv.kr)는 현재 중국 드라마를 가장 활발히 방영하고 있는 채널이다. <랑야방>을 지난해부터 서비스했고, 지금은 <위장자> <무미랑전기>를 방영 중이다. 채널칭(chingtv.co.kr)은 시대극, 무협 드라마를 주로 방송한다. <옹정황제의 여인>과 2014년 버전의 <신조협려> VOD를 서비스하고 있다. 아시아앤(asiantv.co.kr)에선 1993년에 방영했던 오리지널 <판관 포청천>과 2013년 버전의 <천룡팔부> <금옥량연> 등을 시청할 수 있다. iMBC(tv.imbc.com)의 스페셜-해외 섹션은 <마이 선샤인>의 다시 보기와 다운로드, 대본 보기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역사극 전문채널 CNTV(cntv.co.kr)는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역사극까지 아우른다. 고화질 VOD 서비스도 지원하고 있다. olleh tv(tv.olleh.com)와 넷플릭스(netflix.com/kr)에서도 중국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보고 싶다면 티빙(tving.com) 어플을 깔아보자.

중국의 최대 국영 TV방송사인 CCTV(중국중앙TV)는 중국어 무료 학습 플랫폼으로 CNTV 한국어방송(kr.cntv.cn) 웹사이트를 론칭해 한글 자막이 포함된 다수의 중국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시사다큐멘터리 방송 등을 서비스하고 있다. 애플 앱스토어와 구글 마켓에서 ‘CNTV한국’ 또는 ‘CNTV KOREA’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스마트폰용 어플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중국 드라마 자료는 국내 최대의 중국 드라마 카페 무협중국드라마 MJBox(cafe.naver.com/mjbox)를 참고하면 좋다. 드라마뿐 아니라 TV프로그램, 배우, 음악 등 중국 현지 여러 콘텐츠에 관한 정보가 두루 풍부하다. 중국어 학습에도 유용하니 중드 입문자라면 꼭 알아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