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후회를 한다. 한 사람이 일생에서 겪는 후회의 총량을 무게로 느낄 수 있다면 인류는 중력 없이도 땅에 붙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쪼그라드는 이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후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어깨도 쑤시고 등도 구부러지고 점점 더 작아지다가 마침내 대지로 스며드는.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필연적인 질문. 거기서 수없이 많은 시간여행 이야기들이 태어났다. 시간여행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팔할은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꿨을 때 그 결과가 시간여행자의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과연 그럴까. 마티가 과거의 아버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비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게 했을 때, 현재시점의 아버지 또한 변모해 더이상 루저가 아닌 성공적인 작가로 거듭나는 게 가능한 걸까(<백 투 더 퓨처>). 날짜가 바뀌지 않고 하루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을 때 그 하루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똑같이 반복되는 걸까(<사랑의 블랙홀>).
비만으로 고생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그간 먹었던 저 수많은 야식을 먹지 못하게 만들고 돌아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야식을 먹지 않은 행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새로운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걸까, 아니면 과거로 갔다가 돌아왔을 뿐 여전히 비만인 타임라인에 존재하게 되는 걸까. 그는 비만이 아닌 상태로 살아온 기억과 비만이었던 본래의 기억을 둘 다 가지고 있게 되는 걸까, 하나만 가지고 있게 되는 걸까. 해답은 없다. 아무도 모른다. 빛보다 빨리 여행했을 경우 미래여행은 가능하지만 과거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대체된 타임라인 이론의 평행우주에 이르기까지. 시간여행의 구체성은 규정되는 게 불가능하다. 누구도 시간여행을 실제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시간여행 이야기의 포인트가 여기 있다. 아무도 ‘정말’ 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 안에서 설정만 잘 만들어내면 얼마든지 이걸 가지고 이야기가 잘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향이 다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관객이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 누구도 입증한 적이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규칙을 이야기 안에서 논리적인 장치로 활용해 서스펜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멋지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간여행 이야기야말로 유물론자들의 지옥인 동시에 길티 플레저다.
드라마 <시그널>은 잘 만들어진 시간여행 이야기의 가장 최근 사례다. 주인공은 특정 시간에만 작동해 과거와 통신할 수 있는 무전기를 손에 넣게 되고, 이를 통해 미제 사건들을 해결한다. 아이디어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가깝게는 <더 폰>이 있었고 대표적으로는 <프리퀀시>가 있으며 레퍼런스라면 역시 그레고리 벤포드의 소설 <타임스케이프>가 있었다. <프리퀀시>는 <타임스케이프>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후 수많은 영화들이 <프리퀀시>를 따라했다. 그러나 아무도 <프리퀀시>가 <타임스케이프>를 도용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디에도 완전 무결하게 새로운 것 따위는 없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과거와의 통신을 통해 현실을 바꾼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잘 꾸려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시그널>이 한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성연쇄살인사건과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미제 사건들을 다수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주인공들이 갖는 안타까움과 절박함이 관객에게도 충분히 공유된다. 이는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가 대부분 과거로의 회귀나 복기에 매달리고 있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채널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주인공의 남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들거나 과거의 노래를 새로 부르며 경쟁한다. 개인적으로는 대중문화 전 분야에 걸친 이와 같은 유행이 경쟁이라는 형식과 만나면서 과거에의 집착을 넘어 퇴행에 이르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는다( ‘이기기 위한’ 노래를 듣는 데 정말 지쳤다). 여기에 <시그널>이 더해졌다. 지금의 한국 소비자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바꾸고 싶어 한다. 흥미로운 일이다.
<시그널>에도 미흡한 점은 존재한다. 과거와의 통신을 이야기의 주요한 동력으로 사용하면서도 정작 이 통신 자체를 극적 장치로써 제대로 활용해내지는 못했다. 가까운 예로 드라마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시간여행은 향을 태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거기 명확한 제약을 설정해둔다. 시간여행은 향이 타는 시간 동안만 가능하다. 시간여행은 정확히 현 시점에서 20년 전으로만 가능하다. 향은 아홉개가 있다. 그러므로 시간여행도 아홉번만 가능하다. 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주인공과 악역을 막론하고 바뀐 타임라인과 본래의 타임라인을 둘 다 인식할 수 있다. 과거를 바꿔 현재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심어지는 동안 뇌에 부하가 걸린다. 반복되면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 이와 같은 제약들은 그대로 이야기에 갈등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그러나 <시그널>의 무전기는 이야기의 진행에 그리 큰 갈등이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특정 시간대에만 작동한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제약이 없다. 이 통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은 그냥 시간여행의 패러독스에 느슨하게 떠넘겨버렸다. 누가 들고가서 써먹지도 않는다. 시간여행이라는 구심축을 빼버려도 별 문제없는 회차마저 존재했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시간여행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은 그걸 아무도 해본 적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뭘 어떻게 설정하든 이야기 안에서 일관성만 있으면 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서스펜스는 무전기로 뭘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뭘 할 수 없느냐로부터 조성된다. <시그널>은 시간여행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고루 성취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다행스러운 건 <시그널>이 다음 이야기로의 길을 활짝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열린 결말이 아니라 작가가 명확하게 다음 이야기를 의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김은희 작가는 그간 꾸준히 장르물을 시도하며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었지만 늘 후반부가 아쉽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언제나 좋았던 초반부 이후에도 중반부에서 여간해선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결말 또한 완결성과 지속 가능성 사이에 근사한 무게중심을 찾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시그널> 시즌2가 무척 재미있으니 꼭 보라는 미래로부터의 무전을 받지 않더라도 기대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