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개봉 2월25일)는 이윤기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이자 그의 첫 번째 정통 멜로극이다. 각자 가정이 있는 상민(전도연)과 기홍(공유)이 낯선 땅 핀란드 헬싱키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시간이 흘러 서울에서 재회한 이들은 조심스레 서로를 향한 마음을 키워간다. 그 뒤 관객은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시차(時差)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첫 장편 <여자, 정혜>(2005)부터 의도적으로 감정의 격정과는 거리 두기를 해온 이윤기 감독이기에 그가 지펴갈 멜로극의 온도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감독은 건조한 무드 안에서 인물들의 감정의 세부를 그려오지 않았던가. 또한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떠나는 여정 혹은 그런 경험 이후에 인물들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런 전작들과 비교한다면 분명 <남과 여>도 동본(同本)의 작품이다. 하지만 <남과 여>는 이윤기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이질적으로도 보인다. 드라마적인 전형들, 혹은 멜로극을 위한 장치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전에 없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다소 많은 음악의 사용도 그렇다. 이윤기만의 감성과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새로이 시도된 지점들이다. 그것들에 대해서부터 물었다.

-방금 끝난 언론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내 영화가 지하철 광고판에 걸리기는 처음이다. ‘상업영화구나, 많은 분들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작들과는 좀 다른 지점에서의 고민이 있었을 거라 짐작된다.

=영화에서 그게 느껴지던가?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웃음) 돈을 들여 영화를 만들고 관객에게 돈을 받고 극장 상영을 한다는 면에서 영화는 다 상업영화다. 다만 (제작)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 앞선 그 말은 농 반 진 반이다. 좀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에 대해서는 당연히 고민했다. 내 영화 중 규모도 가장 크다.

-<남과 여>를 “정통 멜로, 나의 첫 멜로”(<씨네21> 1037호 새해 기대작 인터뷰 특집)라 했다. 정서를 확 터뜨리지 않아서이지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꾸준히 말해왔다.

=정통 멜로라는 의미는 영화적 흐름이나 요소에 있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코드들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면들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전보다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누군가는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1966)와 같냐고 하는데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물론 영화는 다르지만. <종착역>(감독 뤼시앙 핀틸리, 1998)의 애절한 사랑의 느낌도 영화의 올드 팬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왜 지금은 이런 영화들이 없는가’라고 말해질 만큼 실제로 이런 감성의 영화가 없다. 이런 (정통 멜로) 영화도 나오면 보고 싶어 할 관객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생각한다.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 <멋진 하루> <애드리브 나이트>, 이노우에 아레노의 단편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 등을 비롯해 본인이 읽은 소설에 끌려 영화화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신은영 작가의 각본을 토대로 각색을 했다.

=원시나리오의 설정이나 이야기 흐름이 대중적인 전형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인물의 감정을 내보이는 게 전작들보다 많기도 했다. 결과를 미리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걸 내 스타일로 풀어보면 나름 새로운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상민을 연기한 전도연은 <협녀, 칼의 기억>(2014)을 촬영할 당시에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다고 했다. 꽤 오래전부터 준비한 영화였나 보다.

=햇수로 5년 전부터 시작했다. 이야기를 바꿔가며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았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때 ‘그래, 우리에게는 전도연이 있지’ 했다. (웃음) (<멋진 하루>(2008)를 함께 작업한) 전도연은 내가 평소에도 편하게 작업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걸 해보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슬쩍 물었더니 도연씨가 바로바로 피드백을 줬다.

-멜로극의 밀도감 있는 감정과 무드를 책임지면서 인지도까지 있는 배우라 할 만한 전도연의 합류는 상당히 큰 힘이 됐을 것 같다.

=각색할 때부터 ‘결국 전도연씨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건넸을 땐 지금보다 격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도연씨가 자기가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본인이 영화의 기획자처럼 나와 함께 캐스팅 등을 고민해줬다. 그러다가 내가 그냥 ‘당신이 해~’라고 했다. (웃음) 그렇게 결정된 거다.

-기홍은 “사는 게 왜 이렇게 애매한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남자다. 그런 기홍이 상민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때는 꽤 솔직하다. 기질적으로 낙천적이고 천진해 보이던 <멋진 하루>의 병운(하정우)을 제외한다면 전에 없던 ‘적극성’을 띤 남자 캐릭터다.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기홍은 천진한 거다.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를 둘러싼 벽 때문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다. 상민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순응해 살면서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를 고민한다. 순응과 고민 사이를 오가길 아주 잘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착하게 살아야지’와는 다르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사랑이라는) 폭탄 같은 일이 일어난 거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정 앞에서 당황하고 그 상황에 끌려가고 고민한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야 해’라고 생각하는데, 누가 먼저 그 결정을 내릴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전도연, 공유의 합류로 상민, 기홍 캐릭터에 변화가 생긴 게 있었나.

=처음 그대로다. 내면에서 뭔가 막 일어나나 밖으로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다. 뭐가 있다고 덥석 물지 않는, 표현이 서툰 사람들. 기홍과 상민은 결단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영화는 그 결단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영화다. 그러면서 그사이에도 자신의 감정은 속일 수가 없는 거다. 현실에서도 감정의 결단을 그렇게 빨리 내리는 사람들이 많을까.

-첫 장면을 헬싱키의 길 위에 혼자 서 있는 상민의 옆얼굴로 시작한다. 이후에도 상민과 기홍의 얼굴, 특히 근접의 프로필을 화면의 중앙 또는 한쪽에 자주 배치했다. 투숏에서도 감정의 리액션을 하는 인물에게 카메라가 줌인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인물의 보다 다양한 표정을 잡으려 공을 들였다. 카메라가 계속 움직인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정적인 영화다 보니 관객에게는 너무 얌전하게 보일 것 같아서. 그래도 인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찍거나 뒷모습을 찍는, 예전부터 해온 수법들은 계속된다.

-그 수법을 고수하는 이유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데 그냥 그게 좋다. 더 많은 걸 상상하게 한다. 착각일 수 있는데 뒷모습에서 그 사람이 가장 잘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막연한 판타지인 거지.

-바로 전작인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2011)에서 비가 인물들을 한곳에 정박시켰다면 이번에는 폭설이다. 날씨 변화로 시공간을 인위적으로 폐쇄하고 감정에만 집중한다.

=날씨에 민감하다. 맑은 날을 싫어하기도 하고. (한참 고민하다) 날씨로 뭔가에 발이 묶인 사람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러브토크>(2005)의 LA는 날씨 변화가 없다. 항상 똑같은 날씨. 그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 도시가 좋았다.

-<러브토크>의 배경을 LA로 삼으면서, “서울은 어쨌든 너절한 인간관계라도 있는 도시지만 LA는 노력하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도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과 여>의 두 사람은 왜 핀란드 헬싱키에서 만날까.

=잘사는 북유럽 하면 떠올릴 이미지 그대로다. 기홍, 상민은 왜 그곳에 갔을까. 그들의 결점과 연결된다. 기홍에게 그곳은 업무상의 이유와 (우울증을 앓는 아이의 교육이라는) 집안 사정이 얽혀 있다. 상민은 (자폐의) 아들 교육을 위해, 그곳에서 혜택을 받고 싶다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북유럽을 떠올렸고 프로덕션 여건상 핀란드가 적합했다. 막상 그곳에 가보니 우연을 가장하기 좋았다. 헬싱키는 서울, 도쿄같이 큰 도시가 아니다. 촬영하면서 그랬다. ‘여기서는 하루에 다섯번도 더 만날 수 있겠다.’ (웃음)

-그 결점에 대해 좀더 말해보자. 상민과 기홍 모두 아픈 자식을 뒀다(기홍의 아내도 마음의 병이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감정을 키워가려 할 때마다 아이(로 대변되는심리적으로 불안한 가정)가 등장해 둘의 감정과 윤리성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런 설정이 도구적으로 쓰인 듯하다는 의문이 든다.

=그에 대한 고민은 당연히 많았다. 그걸 장치로 본다면, 장치로써 과연 적합한 것일까. 만약 그런 장치가 없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렀을 거다.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난관이 있는 사람들로 가자고 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과 연민, 동병상련을 느낀다. 나의 아픔을 이 사람도 비슷하게 가지고 있겠구나 하는 동질감. <남과 여>를 준비하면서 불륜을 미화하는 게 아닌가와 장애가 있는 자식이 있다는 설정에 대해 고민이 깊었다. 누군가가 이에 대해 비난해도 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정말 애썼다고 말하겠다. 도구화했다, 미화했다고 한다면 그건 보는 이의 취향 차라고 본다.

-흔히 멜로극의 필수라는 고난으로써의 장치였다는 말인데.

=그렇다. 그리고, 영화잖나. 좀더 드라마틱하게 갔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고, 호소력 있게 전해질 수 있다. 관심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취향의 문제다. 다만 내 취향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글쎄. 과연 그게 내 취향일까. 상상에 맡기겠다. 노코멘트다.

-감정의 여정 뒤에 상민과 달리 기홍은 자신의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잠정적 선택을 한다.

=그렇게 보일 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거다. 마음이 돌아가지 못했다. 그게 중요하다. 마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패배한 사람은 기홍이다. 상민은 자기 의도대로 해본 거다. 기홍은 그렇게도 못해본 거고. 그래서 어쩌면 기홍은 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굉장히 슬픈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당신의 영화에 줄곧 따라붙는 평에는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존재를 묻게 되는 과정을 섬세히 보여준다는 게 있다. 여성을 통해서 좀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여성 캐릭터 못지않게 남성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냥 다 열심히 할 뿐이다.

-그런 평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여성 중심인 영화가 없어서가 아닐까. 내 영화의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거나 여성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늘 얘기하지만 난 남자영화, 남자들만의 세계를 말해보고 싶다. ‘내가 남자들을 표현하게 되면 다 죽었어.’ (웃음) 근육질의 남자, 폼으로서만 존재하는 남자가 아니라 진짜 남성다움이 뭔지를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태가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멋진 하루> <러브토크>의 병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러브토크>의 지석처럼 같은 이름을 다른 작품에 계속 등장시킨다. 게다가 전도연, 하정우, 한효주, 배종옥, 김혜옥 등 한번 작업한 배우들이 역할의 크기와 무관하게 다른 작품에도 나온다. 당신 영화의 정서적 유사성을 만드는 데 이런 반복이 영향을 주는 점도 있을까.

=극중 이름은 대부분 내 주변 지인들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있긴 하다. 상민은 중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렸고. 같은 배우들과 다시 작업하는 것은 그것대로 재미가 있다. 그 핑계로 인연도 더 생긴다.

-혹시 다음 작품의 방향은 잡혔나.

=제목을 확정짓지는 않았지만 판타지 멜로물을 준비 중이다. 봄쯤 찍을 예정이다. 이전에 해온 영화, <남과 여>와는 또 다른 시도가 될 것이다. 남자영화를 기다렸는데 나한테는 영 안 오더라. (웃음)

-보다 ‘대중적인’ 작품인 <남과 여>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다면.

=보고 싶다는 호감이 가는 영화이길. 보고 나서 좋든 싫든 영화에 대한 얘기가 나오길. 거론조차 안 되면 억울하잖나. 이전에는 영화 홍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예술영화로 평가받은 뒤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영화제, 기자, 평론가의 평뿐 아니라 관객의 평가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그래야 나도 새로운 영화를 계속 추구할 수 있다. (영화산업 자체가) 그런 것에 많이 매달리게 되기도 했고 나도 그걸 무시할 수 없다. 서글픈 얘기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현실에 순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