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아끼고 좋아해왔던 작품을 다시 꺼내보는 일은 늘 즐겁다.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었던 처음과는 달리 집중할 수 있다. 관련된 주제나 근거들을 따로 찾아볼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대목이 많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그걸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지 고민해본다. 그 과정이 가장 즐겁다. 내가 그것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인지 판단해볼 기준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근거로 엉뚱한 일을 벌이기 마련이다.
아베 고보의 <모래의 여자>는 1962년에 출판된 소설이다. 처음 읽은 건 십년 전 즈음 강화도에 여행을 갔을 때다. 저자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일본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오른쪽에 미시마 유키오, 왼쪽에 아베 고보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읽어봤어도 아베 고보는 처음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틀어박혀 이 책을 읽었다. 새벽 즈음 다 읽고 밤새 잠을 못 이룬 채 해변을 계속 걸었던 기억이 난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실존주의에 기반한 내용이지만 우화에 가깝고 분량도 중편이라 쉽게 읽을 수 있다. 굉장한 소설이다. 영화 <모래의 여자>를 찾아본 건 당연히 원작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베 고보가 직접 각본을 썼고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이야기는 남자가 희귀한 곤충을 채집하기 위해 사막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마을 전체에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바닷바람에 실려 내륙으로 끝없이 모래가 밀려온다. 남자는 여기서 희귀한 곤충을 찾아 곤충도감에 이름을 올리길 희망하고 있다.
차편이 끊기자 촌장은 남자에게 하루 묵고갈 것을 권한다. 남자는 고맙다며 좋아한다. 촌장은 그를 함정처럼 깊게 파인 커다란 모래 구덩이로 데려간다. 모래 구덩이 안에는 쓰러져가는 집이 하나 있다. 남자는 밧줄에 매달린 채 구덩이 안으로 안내된다. 집 안에는 여자가 한명 살고 있다. 어둑한 밤이 되자 여자가 집 밖으로 나선다. 그러더니 모래를 퍼내기 시작한다. 모래가 끊임없이 밀려내려와 쌓이기 때문에 파묻히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퍼낸 모래는 밧줄에 매달린 통에 담겨 구덩이 밖으로 끌어올려진다. 마을 사람들은 모래를 모아 인근 마을의 공사장에 팔고 있다.
아침이 밝고 집을 나서려던 남자는 크게 당황한다. 밧줄이 사라진 것이다. 남자는 모래를 퍼낼 일꾼으로 납치된 것이며, 이런 식으로 구덩이 안에 갇혀 노동을 하는 게 자신이 처음이 아니고, 이것이 마을을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알게 된다. 남자는 모래 구덩이를 끝없이 기어오른다. 그러나 번번이 밀려내려오는 모래에 휩쓸려 굴러떨어지고 만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모래가 문제면 과학적으로 해결해야지 사람을 납치해서 모래를 퍼내게 하다니.
그것도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이 방법이 가장 돈이 덜 들어요.
며칠을 그러다 자포자기한 심정이 든 남자는 화가 나 집을 때려부수기 시작한다. 여자가 말리다가 둘이 부둥켜 얽힌다. 그들은 섹스를 한다. 이 시퀀스는 대단하다. 얼굴 위주로 클로즈업된 컷과 모래로 뒤덮인 살을 보여주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 모든 게 엄청나게 절박하고 동물적이다. 그리고 길다.
남자는 탈출하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하고 그물을 엮어 만든 밧줄을 구덩이 밖으로 던진다. 그리고 몇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남자는 달리고 또 달린다. 그러나 곧 쫓기게 된다. 도망가던 남자는 모래늪에 빠진다. 남자는 결국 구덩이 안에 다시 처박힌다.
3개월이 지났다. 남자는 매일 밤 여자와 함께 모래를 퍼올리는 일을 한다. 노동에 찌들어 제대로 생각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집 앞에 구멍을 파고 빈 물통 하나를 파묻는다. 까마귀 덫을 설치하는 거라고 설명한다. 까마귀 다리에 구출해달라는 편지를 달아 날려보낼 작정이다. 그런데 어느 날 덫을 열어보니 물통에 물이 가득 차있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떻게 물이 생긴 거지? 남자는 모래가 펌프 역할을 해 모세관 현상으로 물이 모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식수가 해결되었음을 기뻐하던 남자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다.
어느 날 여자가 산통을 느낀다. 남자가 소리를 질러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여자를 데리고 나간다. 집 밖을 서성이던 남자는 마을 사람들이 여자를 끌어올릴 때 사용한 밧줄을 그대로 두고 갔음을 발견한다. 남자는 구덩이 밖으로 올라간다. 올라가서 경치를 구경한다.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통 안에 물의 양이 늘었음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워한다. 남자는 당장 이 유수장치를 발명한 것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탈출은 그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남자는 생각한다.
소설의 한 구절은 이 이야기의 어떤 측면을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가는 시간을 견디게 만드는, 인간이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남자의 일상은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일상은 모래 구덩이 안에서 삽질하는 것이 되었다. 그게 그의 밥벌이다. 끝이 없는 일이다. 무의미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여기가 그의 우주다. 처음에 곤충도감에 이름을 싣고 싶어서 사막을 찾아왔던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 유수장치를 소개하고 인정받기 위해 구덩이 안에 남는다. 결국 남자는 구덩이 밖의 삶과 안의 삶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다시 꺼내볼 때마다 전율한다. 마침내 구덩이 밖으로 나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다시 들어가 당장의 목적에 만족하고 설레어하는 풍경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선택일까. 더 권할 수 있는 삶일까.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남자를 비웃었다. 지금은 쉽게 판단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