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모여 SF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능력이 부족하고 시간도 촉박해서 고민 끝에 <스타워즈>의 우주선 이미지를 그대로 복사해 영화 배경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지 루카스에게 한마디 귀띔도 없었던 건 물론이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스타워즈> 열성팬 하나가 영화 시사회를 보고 회사 홈페이지에 항의문을 올렸다. 처음에는 오리발을 내밀던 회사지만 결국은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 영화는 배우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다. 소품이나 풍경 등 다른 부분은 다른 영화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영화 제작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금 오픈 베타 서비스중인 <세피로스>라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이 있다. 뛰어난 3D그래픽에 발전된 서버시스템으로 꽤 좋은 평가를 받았고, 유저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떤 플레이어의 제보를 통해 이 게임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세피로스>는 다른 게임의 ‘텍스처’를 마음대로 가져다 썼다. 텍스처란 와이어프레임으로 3D 모양을 만든 뒤, 사실감을 주기 위해 옷을 입히고, 피부를 그리고 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것도 안 그려진 하얀 마네킹에 피부색을 칠하고 눈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심는 작업과 비슷하다. 텍스처는 보는 이의 감성에 직접 호소한다. 텍스처의 퀄리티에 따라서 게이머가 게임 속에서 느끼는 사실감과 몰입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텍스처를 갖기 위해서 회사들마다 피나는 노력을 하고, 그래픽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텍스처를 상품화해서 판매를 한다. 외국 게임 개발자 사이트에서는 텍스처만을 연구하고 상품화하는 사례를 무수히 볼 수 있다.
공개된 텍스처라도 저작자의 요구가 있으면 저작권을 명시해야 한다. 그런데 <세피로스>는 다른 상용게임의 텍스처를 아무 허락도 없이 가져다 썼다. 모방을 추상적 의미에서의 도둑질이라고 한다면, 보고 베껴 그린 게 아니라 소스째 들고 온 <세피로스>는 말 그대로 도둑질을 한 셈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발각난 뒤의 대응이다. 제작사인 ‘이매직’쪽은 ‘추측만으로 타 유저들을 현혹할 수 있는 사항을 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주)이매직에 악의를 가지고 위해를 가하는 행위’라며 항의문을 계속 삭제했다. 그러다가 웹진에 기사가 오르며 문제가 커지자 해당 웹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텍스처를 가져다 쓴 건 2D 분야인 텍스처보다는 게임 내에 삽입되는 오브젝트에 더욱 신경쓰다보니 그런 것”이라고 밝혔다. 오브젝트를 내세우고 싶었다면 남의 텍스처를 슬그머니 입히지 말고 아예 텍스처 없이 밋밋한 상태로 게임을 공개했어야 되는 것 아니었을까?
콘텐츠 생산자의 인식마저 이런 수준인데 국내 콘텐츠 산업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타인의 콘텐츠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생산하는 콘텐츠의 권리를 인정받을 것을 기대하다니 놀랍다. 이매직이 애써 만든 게임 엔진을 누군가 가져다 마음대로 사용하고는 “우리는 2D 텍스처에 신경쓰다보니까, 엔진 만드는 데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매직은 결국 홈페이지에 공식 사과문을 올렸다. “…하오나 문제가 된 일부 배경 매핑소스와 일부 아이템 매핑소스는 게임구성상의 극히 일부분의 요소였고…”라며 별로 길지도 않은 글에서 ‘일부’란 말을 일곱번이나 사용한 사과문이 어느 정도의 성의를 가진 것인지는 읽는 이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