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일본 배우 오스기 렌에게는 이러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성실한 가장, 무기력한 형사, 평범한 회사원, 귀여운 야쿠자…. 1980년 데뷔한 이래 35년간 수백편의 영화(그 자신조차 더이상 출연작 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에 출연한 그는 그야말로 일본영화의 다종다양한 얼굴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런 오스기 렌에게 2015년은 이웃나라 한국과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한해로 기억될 듯하다. 드라마 <쩐의 전쟁>을 리메이크한 동명의 드라마에 출연했을뿐더러 블록버스터영화 <대호>의 출연으로 한국 관객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순넷의 나이에도 “가방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베테랑 배우의 도전정신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생겼다. <대호>의 무대 인사를 위해 한국을 찾은 오스기 렌을 만났다.
-한국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한 건 <순애보>(2000) 이후 15년 만이다.
=<순애보>에는 짧게 출연했고 촬영도 일본에서 했다. 마침 촬영장소가 우리집 근처이기도 해서, 외국영화에 출연한다는 느낌이 크지는 않았다. (웃음) 다만 이재용 감독의 섬세한 연출만큼은 무척 인상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대호>의 시나리오를 읽고 바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들었다.
=43년간 배우생활을 해왔고 이제 64살이 됐다. 배우로서 내가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을 찾던 도중 <대호>를 만나게 된 거다. 마침 한국영화를 즐겨 보고 있었는데 <대호>의 박훈정 감독이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 <신세계>(2012)를 연출하고, <악마를 보았다>(2010)의 각본을 쓴 감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를 만나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 또는 해외에서 출연 제의가 오면 도전해보려고 하던 차였다. <대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지만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참여하게 됐다.
-<대호>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물론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조선인이 핍박받던 시대에서 일본군을 연기하는 기분이 묘했을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라면 누구나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된다. 때로는 좌파를 연기하고 때로는 우파를 연기하고 때로는 정신나간 사람을 연기하는 것처럼, <대호>의 마에조노 역할 역시 내가 연기해야 할 수많은 캐릭터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임했을 뿐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마에조노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두 종류의 군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원해서 군인이 된 자와 어쩔 수 없이 징집 대상이 되어 군인이 된 자. 마에조노는 스스로 군인이길 선택한 사람이라고 봤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군인 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박훈정 감독은 이러한 기본적인 설정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캐릭터를 내게 주문했다.
-그러한 ‘인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배우이기 때문에 <대호>의 제작진이 당신을 원한 게 아닐까.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1993)와 최양일 감독의 <개 달리다>(1998) 등의 작품에서 당신이 보여준 캐릭터들은 흠결이 많지만 끝내 미워할 수는 없는, 인간적인 깊이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너무 좋은 말을 해줘서 고맙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대호>의 마에조노를 연기하면서… 이건 마에조노의 모습인지, 인간 오스기 렌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욕망을 이뤄내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욕망이란 게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것 같더라. 예를 들어 마에조노가 그토록 원하던 ‘대호’를 고국에 가져가게 됐더라도 그는 욕망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렸을 거다. 이처럼 어떤 캐릭터를 맡든지 간에 완벽하게 구축한 뒤 연기하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편이다. 그게 내가 사는 모습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 인간의 알 수 없는 깊이를 탐구해나가는 게 배우로서의 재미인 것 같고.
-호랑이와 관련된 자료도 많이 보았나.
=특별히 자료를 찾아보지는 않았고, 일본 동물원에서 호랑이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정도다. (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7년째 기르고 있는 고양이 이름이 ‘도라’(일본어로 ‘호랑이’라는 뜻)라는 거다. 도라는 7년 전 영화 <네코나데>에 함께 출연한 고양이인데, 촬영을 마치고 도저히 도라와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아 집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다. 호랑이와 고양이는 닮은 점이 많아 연기하는 데에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대호>에 출연하며 한국 배우 최민식과 연기하는 데 대한 기대감을 표한 적이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지켜본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최민식씨는 촬영을 안 할 때에는 굉장히 친근하고 귀여운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웃음) 그런데 촬영을 하기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더라.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연기자로서 완전히 열려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놀라웠다. 마침 내가 현장에서 촬영할 무렵 최민식씨가 석이 역의 성유빈군과 함께 대화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성유빈군의 연기에 따라 같은 장면을 촬영할 때에도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런 유연함으로부터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 배우들과는 어떻게 소통했는지 궁금하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많은 분들이 신경을 써주더라. 최민식씨는 본인의 출연 분량이 없는데도 내가 촬영하는 곳으로 찾아와 너무도 따스한 포옹을 해줬다. 그리고 한국의 촬영현장에서는 아침부터 모두가 함께 밥을 먹고 촬영을 시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아침에 다 같이 모여 인사하고 식사하고, 밥을 먹는 도중에 얘기들을 나누면서 영화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것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게 <대호> 현장에서 내가 새롭게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이다. 한국 현장의 이런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고국에 돌아가서도 일본 배우들에게 거듭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조심할 점은 있더라. 다 같이 식사를 하다 보니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일본에 돌아와서 체중관리를 하는 데 꽤 힘들었다. (웃음)
-일본영화를 사랑하는 한국 팬들에게 당신은 최양일 감독과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조력자로 잘 알려져 있다.
=두분은 내가 배우로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영화인생의 은인 같은 존재다. 최양일 감독은 현재 일본영화감독협회 회장이고, 일본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거인 같은 분이다. 한국에는 굉장히 무서운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철두철미한 그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개 달리다>에서 신주쿠의 건달 히데요시를 연기했는데 최양일 감독이 촬영 시작 2주 전부터 그곳에 살라며 날 신주쿠 뒷골목에 처박아놨던 기억이 난다. (웃음) 아마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과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했음에도) 평상시에 전혀 교류가 없다. 단지 감독과 배우로만 만난다는 점이 나로서도 재미있다. <소나티네>(1993)의 대본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내가 받은 건 A4 용지 세 장 분량의 글이었는데 ‘어느 건달이 있다. 그 건달이 죽었다. 그 건달이 물에 빠진다’는 식의 단편적인 내용만 적혀 있었다. 어떤 대사를 하고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는 촬영 당일 배우들에게 알려줬다. 처음에는 배우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식의 연출 방식이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 당황스러움이 신기함과 재미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현장에 가면 늘 기타노 다케시라는 어느 우주의 성에서 함께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그렇게 시시때때로 생동감이 반영되는 그의 영화가 좋아 지금까지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