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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신드롬, 그 기억상실의 스토리
2002-03-21

당신이 잊어야 이야기가 됩니다

인기 드라마의 그림자는 길다. 일주일에 두번 하는 미니시리즈를 시청자들은 언제나 곁에 두려고 한다. 핸드폰에 <겨울연가> 삽입곡을 다운받고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도 배용준 목도리를 흉내내고 최지우 폴라리스 목걸이를 산다. 미장원에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전화로 수다를 떤다. <가을동화>로 비슷한 종류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윤석호 PD가 <겨울연가>를 시작할 때 KBS는 건물 한면을 채우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대문짝만하게 걸린 기대감이었다. KBS의 기대감 섞인 홍보는 계속됐다. <겨울연가> 방송 뒤 서버 다운을 보도한 뉴스, <서세원쇼>가 출연자를 불러서 한 토크쇼, <연예가 중계>의 5차례 촬영현장 방문기 등.

한회 학습으로 끝내는 복잡한 스토리

<겨울연가>의 스토리 라인은 복잡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국인 시청자들의 그간에 갈고 닦은 노하우로 한회를 학습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도록 마련하는 장치까지도 예전 드라마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궁금해하지만 결론은 인습과 관습으로 움직인다.

미용실에 들르는 것으로 혹은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스토리를 모두 익혔겠지만 반복하면 이렇다. 준상(배용준)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어머니가 다녔던 고등학교로 전학온다. 준상이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유진(최지우)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채린(박솔미)은 준상에게 한눈에 반하고, 상혁(박용하)은 유진을 좋아하지만 둘은 고배를 마시게 된다. 준상은 자신의 아버지가 유진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준상은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내려 유진과의 약속장소로 가고 중간에 교통사고가 나고 만다. 10년 뒤, 건축기사가 된 유진은 권위의 건축상을 받고 스키장을 소유한 기업의 혈족에다가 미남이기까지한 궁금증의 이민형을 만난다. 그는 준상과 똑같이 생겼다. 그는 채린의 애인이다. 채린은 둘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서 기를 쓰지만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사랑을 포기하고 민형은 미국으로 가려하고 그 순간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기억을 조금씩 찾는 중에 그는 헤어지려는 순간 잃었던 기억이 유진과 이복이라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준상과 상혁이 이복 사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두번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다시 찾는 사건은 의학계에 희귀한 케이스로 보고될 만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관대하다. 하지만 <겨울연가>는 이 관대함마저 넘어선다. 스토리라인이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벽돌을 쌓아 점점 이야기가 올라선다는 (유진과 준상의 직업이기도 한) 건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라보면 이 건축물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네덜란드 소년이 안간힘으로 버티고 서있거나 띠엄띠엄 돌을 놓아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는 징검다리 정도가 이 건축물의 최종 완성물일 것이다.

눈 속에 뒹굴던 장갑은 발이 달렸던 것일까?

목재가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젖는다면서 벽에 기대어 세우라고 작업부들에게 지시하는 장면은 유진이 직업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장면들 중의 하나다. 안전사고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축현장에서 누가 건축자재를 세울 것인가. 따로 보관장소에 두든지, 비닐을 깔고 그쪽으로 옮길 것이다. 이 디테일은 세웠던 건축자재가 넘어지고 유진이 준상을 대신하여 다치도록 그래서 유진이 준상에 대한 오해를 푸는 장치로 이용하기 위해서 깔아놓은(건축자재는 세워놓은) 것이다. 준상이 유진에게 주기로 한 장갑은 사고가 나는 순간 얼음 위에 뒹군다. 하지만 10년 뒤 그 장갑은 그때 입었던 준상의 코트 속에 들어 있다. 코트 속에서 꺼낸 장갑은 준상과 유진이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코트는 어떻게 하여 10년 뒤에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기억을 조작하기로 마음먹은 어머니가 왜 춘천의 집을 팔지 않고 (준상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준상의 물건까지 남겨두는 배려를 했을까. 피아니스트로서 너무 바빠서 그런 데 관심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만나는 순간 누구를 닮았다는 금방 튀어나올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바람에 채린이 음모와 음모를 반복하는 것은 보이는 시간만 존재하는 드라마에서 당연하다고 해두는 편이 마음이 편하겠다. 시체도 없이 장례식을 치루고는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않는 아이들. 처음 맞는 죽음이라서 장례식장에 가지 않아도 혹은 장례식이 없어도 사람이 죽어서 사라질 수 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살아돌아왔다는 제자를 만난 선생님이 놀라지 않는 것도 별로 놀랍지 않다. 너무 많은 제자를 둔 터라, 뻔질나게 학교를 찾아가는 학생들 상혁이나 유진 이외에는 기억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치명적인 약점은 강준상이 이민형이 된 사연. 외국에서 지내는 것은 세월을 채우는 방식으로 자주 이용된다. 하지만 그런 편한 방식으로 채운 10년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타로카드 점 치는 사람이나 도를 아시냐고 묻는 아줌마나 믿을 만큼 ‘운명적’이다. 잃어버린 기억은 최면을 걸어서 재생했다고 한다. 미국은 기억만 만들어내면 친구가 없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도 완벽하게 상황이 시뮬레이션되는 놀라운 첨단국가인가 보다. 연변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에 비하면 미국에서 생활한 민형과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채린이 만난 것은 유럽과 미국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포 사회가 이렇게 좁다는 것을 표현한 (간만에 보이는) 현실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시청자의 기억상실을 강요하는 것은 잇닿은 장면에 있기도 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유진, 장면이 바뀌어 강가에서의 장례식, 장례식이 끝난 뒤 상혁이 유진을 집에 데려다 준다. 여기서 상혁이 말한다. “유진아, 차라리 나는 네가 울었으면 좋겠어.” 기억상실증은 상혁이 걸린 것일까?

아름답지? 그러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잊어줘

윤석호 PD의 아름다운 화면은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화면은 줄거리의 취약함을 가릴지는 모르지만 극복하지는 못한다. 더 나아가 아름다운 화면이 무시한 디테일 역시 종종 시청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채린의 부티크에서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있는 유진, 그 순간 민형이 들어온다. 민형은 “정장을 싫어 함”에도 양복을 입고 있다. 양복을 입어야 할 공식행사가 있다는 언질도 비치지 않았다. 그가 양복을 입은 이유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예복을 입은 신랑의 만남을 화면에 담기 위해서다. 스키장에 간 준상과 유진은 또 한번 웨딩드레스와 예복을 입는다. 불안함에 휩싸인 준상이 갑자기 결혼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엉겁결에 합의하고 성당에 섰을 때 그들은 말끔하게 예식복 차림이다. 스키장에 일하러 왔음이 분명한 이 연인의 짐가방 어디에 웨딩드레스가 들어 있었을까.

12회의 마지막 장면, 길을 가다가 부딪힌 민형과 유진이 빨간색을 배경으로 서 있다. 공사중인 건물에서 길게 늘인 빨간색 천막이 이렇게 예쁘구나 하는 감탄이 나오는 장면. 이 엔딩에 곁들인 대사는 민형이 자신이 준상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3회가 뜨면서 12회의 엔딩이 이어지는데 유진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상혁은 그 순간을 목격하고 준상의 마음을 자신이 이해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절실하게 준상이 되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이 빨간색을 배경으로 한 절실한 대사는 배경의 아름다움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오해를 받는 준상을 불쌍해하며 그 상황을 기억할 수 있을까? 빨간색은 기억에 떠오를 것 같다. 그러다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겨울연가> 신드롬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3월9일에는 <겨울연가 콘서트>가 방송을 탔는데, 이 <겨울연가 콘서트>는 상혁이 자신이 기획한 음악프로그램 콘서트에서 유진을 구속하려는 조바심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3∼5분 정도로 짧게 방영된 것인데 이 장면을 위해서 ENG카메라가 아니라 중계차를 동원하여 찍었다. 방영분을 위해서는 각도를 달리하면서 몇개 컷을 따고 들어가면 되지만 그렇게하면 콘서트의 현장감이 사라진다는 이유에서 진짜 콘서트를 마련한 것이다. 원래는 방영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하기로 했던 류가 출연한 이 콘서트는 그의 얼굴이 공중파를 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겨울연가 콘서트>에는 중간중간에 음악회를 즐기는 <겨울연가>의 극중 인물이 된 배우들도 앉아 있다. 극중의 콘서트를 재현한 진짜 콘서트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환상을 강화한다.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주목해보라. 극중에서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공적인 방송을 유린한(사실 이런 일을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상혁(박용하)이 잠시 뒤 유진(최지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는 이 콘서트는 대외적으로 <겨울연가>의 히트곡을 듣고 ‘배우’도 보는 상품이 되었다. 거창한 욕심이 부른 트릭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진정성이 없어보이지만 이 콘서트는 드라마의 상품성을 포장한다.

지금의 이 신드롬은 분명히 <겨울연가>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 잊으라고 잊으라고 반복주문을 외면서 가능하다. <가을동화> 로케이션 장소로 가는 연인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싶다고 한다. 그들이 한명은 병으로 죽고 한명은 교통사고로 죽는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지에 승부를 둔 어떤 드라마는 스토리를 아무리 엉망으로 짓더라도 ‘첫사랑’의 추억에 잠기게할 수 있다는 용기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겨울연가>가 설득력이 있다면 첫사랑은 원래 먼 기억 속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실은 절단된 채 떠오르는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드라마는 이래서 참 편리하다. 구둘래 kuskus@dreamx.net▶ <겨울연가> 신드롬, 그 기억상실의 스토리

▶ 윤석호 PD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