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면서 나의 활동 범위가 종로와 중구, 광화문과 명동 일대로 넓어졌다. 몇달에 한번씩 짝이 바뀌고 친해지는 친구가 새로 생기면 으레 그래야 하는 것이 친구 집 방문하기였다. 반 친구들 중에는 충무로와 장충동, 남대문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집에 놀러가면서 낯선 곳의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이, 얼굴이 탁구공처럼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구김살 없고 재미있는 친구의 집에 간 일이었다. 그를 따라 서울역 건너편 대우빌딩의 으스스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건물 벽에 빨랫줄이 못으로 박혀 있었고 그 줄에 여자 팬티와 브래지어들이 널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벽에 팬티와 브래지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목에는 커튼이 쳐진 유리문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이따금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뿐이었는데, 친구는 그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하면서 통통 튀듯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직감적으로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느꼈는데, 너무나 밝은 친구의 모습에 불안한 마음을 숨기면서 거미줄같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며 묘하게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한번은 부반장의 집에 갔는데 그 친구는 영동이란 곳에 살았다. 현대 빌딩 앞에서 30분에 한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려 산 넘고 강 건너서 간 친구의 집은 논현동의 허허벌판에 성처럼 우뚝 솟아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그런 친구의 집에 가서 주눅들기보다는 충무로 스카라극장 뒷골목에서 여인숙을 하는 친구의 집이나 퇴계로의 오성 실내수영장 골목의 의상실 다락방, 또는 극동빌딩 근처에서 목공소를 하는 친구의 집이 더욱 정겨웠고 재미있었다.
극장, 만홧가게에서 느낀 두려움
그들을 따라서 예쁜 여학생들이 많은 교회도 가보고, 실내수영장도 가보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들과 함께 극장에 가거나 만홧가게에 간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들과 함께 옛날에는 시체를 갖다버렸다는 광희문 근처 고가도로 옆 만홧가게에 가게 되었다. 만홧가게의 이름은 ‘최고봉 만화’. 70년대 중반에는 주인공의 이름 뒤에 제목이 붙는 시리즈 만화가 유행이었고, 1976∼77년 당시 최고의 인기 만화는 김영하의 <최고봉> 시리즈였다. 그 만홧가게는 당시 최고 인기 만화 최고봉을 가게 이름으로 한, 퇴계로와 광희문 근처에서 최고로 큰 만홧가게라는 게 나를 데려간 친구의 말이었고, 그 동네 아이들은 모두 이 만홧가게로 온다고 그 친구는 자랑했다. 가게 안에 가득 찬 꼬질꼬질한 빡빡머리 중학생들 중 몇몇은 학교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고, 그중 몇몇은 우리 반에서 불량하다고 소문난 아이들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주제에 교복을 입고 버젓이 담배를 꼬나물어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동네 만홧가게에는 없는 <황제의 쾌걸 흑나비> 시리즈를 그 만홧가게에서 처음 만나 반해버렸지만, 같은 반 중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신기해 힐끔거리다 그 녀석과 눈이 마주쳤고, 그가 두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며 위협했기에 잔뜩 겁을 먹고는 집이 멀어 불안하다는 핑계를 대고 재미있는 <황제의 쾌걸 흑나비> 시리즈를 몇권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만홧가게에서 후다닥 나와버렸다.
중학생이 된 3년간은 그런 식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만홧가게에서 만화를 보다가 후다닥 도망치듯 나와야 하는 불안의 나날들이었다. 학교에 등교하면 선도부 선생과 선도부들의 눈초리에 불안을 느끼며 교문을 통과해야 했고, 수업시간마다 선생들의 매타작에 불안해해야 했고, 방과 후에는 골목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지도부 선생들과 노는 아이들에게 얕잡아보여 삥을 뜯길까 불안해해야 했다. 초등학생 때에는 어디를 가도 나같은 조무래기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고등학생들과 불량배들이 극장과 만홧가게, 심지어 골목에서 호시탐탐 매처럼 노리다 병아리 낚아채듯 어리바리한 중학생들을 붙잡아 시계를 빼앗고, 만년필을 빼앗고, 심지어 돈까지 빼앗았다. 누군가가 돈을 빼앗기거나 매를 맞으면 그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중 악명 높은 곳이 남산 팔각정 근처와 남대문극장, 동대문운동장 주변이었다. 남산 팔각정에는 전국 불량배들이 모두 모였는지, 몇학년 몇반 누가 피가 한 양동이를 쏟도록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남대문극장 화장실에서 팬티만 남기고 시계와 교복 모두를 빼앗겼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도부 선생들은 해가 진 뒤에도 거리를 싸돌아다니다 자신들을 만나면 그 자체가 정학감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그들은 극장, 또는 만홧가게에서 자신들을 만날 때 각오하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으니,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극장과 만홧가게를 가는 것이 정학 또는 퇴학을 당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범죄가 된다는 것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대 출신이라기보다는 유도선수 같은 체형의 미술 선생 겸 지도부 선생이 자신이 자주 나가는 곳이 서울역의 뉴서울극장과 봉래극장, 남영동의 금성극장과 성남극장이라고 말한 이후 성남극장에 왕우 주연의 <흑호문>이 재상영되었을 때 나는 일주일을 고민하다 ‘에라, 그깐 놈의 학교 그만두지’ 하는 심정으로 교모와 교복 상의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고 까까머리를 털모자로 감추는, 보잘것없는 변장을 하고 극장 구석에 숨어서 만약 선생에게 걸려 퇴학을 당했을 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생각하고는 가슴 조이며 제발 선생들에게 안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영화를 보았다.
<비둘기 합창> <아홉개의 빨간 모자> 등 처절하고 어두운 작품들
그렇게 자유가 없고 불안한 시기에 왜 그렇게 재미있는 만화는 많이 나오는지. 허영만의 <각시탈> 시리즈와 <황제의 쾌걸 흑나비> 시리즈, <봉선화> 시리즈(작가 이름이 기억 안 난다), <쇠퉁소> 시리즈(허영만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가의 작품, 작가 이름이 기억 안 난다) 등등 복면을 한 무술의 달인이 일제와 싸우는 액션만화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만홧가게의 진열대에서 처음 보는 만화가의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만화책의 제목은 <독고탁과 0000>이라는 시리즈물이었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외톨이 소년 독고탁이 등장하는 매우 슬픈 이야기였다. 그때까지 좋아했던 박기정 만화보다 더 슬픈 만화는 아니었지만 좀더 어둡고, 가난을 표현하는 방식이 좀더 비참했다. 박기정 만화의 무뚝뚝한 반항아 훈이보다 독고탁은 좀더 꼬여 있었고, 박기정 만화의 여주인공 미미보다 이상무 만화의 여주인공 숙이는 짝사랑하던 이웃집 누나와 닮았었다. 교실의 창가 자리에 앉아 오전 9시 전후로 법원 뒷문에 정차한 버스에서 줄에 묶여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내리는 푸른 옷을 입은 죄수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에게 박기정의 만화 세계는 이제 멀어지고, 이상무의 만화 세계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 후 만홧가게에 갈 때마다 독고탁이 제목에 붙은 만화를 보았다. 그리고 독고탁이 주인공인 만화들은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사촌동생들이 보는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 별책부록으로 연재되고 있었고,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에 삼촌네 집에 가면 사촌동생들의 방에 틀어박혀 이상무가 그린 독고탁의 만화를 보고 울고 웃고 하는 한심한 사촌형이 되어버렸다.
까까머리의 어린이 독고탁이 대문 앞을 기웃거린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몸짓인데, 탁은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숨을 몰아쉬고는 살금살금 집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개집 앞에 선 탁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개집을 발로 찬 순간 장독대 사이로 들어갔던 개가 튀어나오고 탁이는 혼비백산 맨발로 마당을 달려 마루 위로 뛰어간다. 어린 탁이가 제일 질색인 것이 바로 누렁이. 탁이가 누렁이를 질색하면 할수록 누렁이는 탁이가 좋아서 더 달려든다. 1978년 <소년중앙>에 연재되었던 <비둘기 합창>의 오프닝이다.
가난한 가족의 슬픈 이야기인 이 만화에서 어린 탁이가 질색인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덩치만 큰 잡종개 누렁이이고, 다른 하나는 덩치가 산만 하고 항상 웃기만 하는 가난한 청소부 청년 우돈이다. 둘 다 탁이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핥으려 하거나 껴안으려 한다. 만화의 클라이맥스는 탁이의 소원대로, 누렁이는 개장수에게 팔려 집에서 사라지고, 우돈이 짝사랑하는 큰누나 숙이가 미스터 박이라는 대기업 회사원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우돈이가 이제 탁이와는 볼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소원을 이룬 탁이는 그들의 부재에 마음놓고 즐거워한다. 이제는 마당을 마음대로 거닐어도 되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 눈치를 보고 집 마당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싫어 죽겠는데 자신만 보면 껴안으려는 냄새나는 남자도 이제는 없다. 모든 것이 탁이가 바라는 대로 되었는데 탁이는 허전하고 슬프다. 왜 슬픈지 이유는 모른다. 그냥 슬프다. 그들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그들이 사라지자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이다. 거의 허클베리 핀이 도망 노예 짐을 고발하려는 마음과 도망 노예를 데리고 도망친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상되는 시퀀스였다. 울면서 누렁이를 찾아 보신탕집 앞을 헤매는 장면은 지금 봐도 뭉클해진다. 누렁이가 돌아오고, 큰누나 숙이가 미스터 박에게 버림받아 우돈이와 결혼하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으려는데 둘째 봉구의 죽음으로 이 가난한 가족은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야 하는 결말을 맞는다. 밝고 명랑하기는 하지만 어두운 세계. 그것이 이상무의 만화이다.
이상무의 만화 가운데 가장 어두운 만화 중 하나인 <아홉개의 빨간 모자>의 라스트는 더욱 처절하다. 형제원이라는 고아원에 부임하여 원생들에게 야구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고, 탈주왕인 독고탁의 마음을 돌려 야구를 하게 만드는 옥기호 선생은 마지막 시합에 이기지 못해 고아원에서 쫓겨나고, 온몸으로 공을 막아내던 땡보는 시합 중 사고로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자가 된다. 고아원 원장의 딸 숙이를 짝사랑하던 탁이는 그녀가 사랑하는 한때 절친이었던 봉구의 타선만을 봉쇄하여 실연에 대한 분노와 질투로 시합을 망치고서, 숙이의 방 유리창을 깨고 그녀의 눈앞에 봉구를 잡은 공을 피에 젖은 손으로 밀어넣고는 증오의 눈을 하고 “봉구를 잡은 공이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주려고 가져왔다”고 말하고는 또다시 고아원을 탈출해버린다.
1981년에 발표된 <아홉개의 빨간 모자>보다 2년 뒤인 1983년에 발표된 당대 최고의 인기작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너무나 극적으로 힘을 준 주인공의 모습 때문에 과장된 비극처럼 보이고, 외인구단의 거듭된 승리 끝의 패배와 마지막에 오혜성이 쥔 공을 통해 감상적인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켰다면, <아홉개의 빨간 모자>에서는 가난하고 실력도 없는 고아들이 초인적인 노력과 집념으로 일궈낸 이야기를 인간승리의 미담으로 만들려는 만화가의 노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고아들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결승전에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관중은 그들에게 감동하기보다는 불쾌해하고 두려워한다. 너무나 80년대적이었던 이상무의 만화는 그로테스크한 유머와 주인공들의 감정의 결이 세심하게 녹아든 어두운 걸작이었다.
그 이듬해인 1982년 이상무는 <소년중앙>으로부터 연재 제의를 받고 소년잡지에 어울리는 좀더 밝고 명랑한 만화를 그려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달려라 꼴찌>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3년간 <소년중앙>에 연재된 이 만화는 최고의 인기작이었고, 잡지사의 강권으로 2부를 연재하여 총 4천 페이지에 이르는 장대한 장편만화가 되어버린다.
소년만화의 여자주인공
대학생이었던 내가 사촌동생의 방에서 “다음 권 없어?”를 외치며 홀딱 빠져서 보았던 만화가 바로 이 만화였다. 첫 페이지 오프닝부터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쾌활함이 넘친다. 너무나 담백하고 개운해서 보는 사람이 신이 나는 그런 종류의 만화였다. 너무 신파로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개그로 빠지지도 않는다. 독고탁이라는 주인공의 장점만이 산뜻하게 표현된다. <달려라 꼴찌> 1부가 복간되어 이 만화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이 만화가 산뜻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상무는 70년대 작품인 독고탁의 <한국인> 시리즈에서 재일 조선인 차별에 대한 문제를 좀더 심도 있게 다루고 그 칼날을 우리에게 겨누어 한국인들에게 차별받고 고통스러워했던 흑인 혼혈아 소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클라이맥스를 만들어 작품의 무게를 더했다.
독고탁은 집념을 지닌 소년이지만 그의 유머러스한 행동 덕분에 부담스럽지 않고 응원하게 만든다.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성취한 부담스럽지 않는 집념의 주인공의 모습을 독고탁에게서 더욱 탁월한 형태로 발견할 수 있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상대방이 녹아내릴 정도로 노려보는 주인공들이 줄을 세우면 지구 한 바퀴를 돌 정도로 많았던 1980년대 초반 한국만화계에 <달려라 꼴찌>의 독고탁 캐릭터는 보물 같은 존재이다.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허영만의 <오! 한강> 이전에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여자주인공은 이상무 만화의 숙이였다. 풍문여고의 교복처럼 허리띠를 동여맨 교복 차림으로 항상 등장하여 독고탁의 가슴을 뒤흔들어놓는 사랑스런 주인공이었다. <월간 여학생>에 연재되었던 초기작 <노미호와 주리혜>에서부터 이상무는 여자주인공을 잘 표현하는 만화가였다. 당시 소년만화에 등장하는 여자주인공들은 항상 남자주인공의 들러리 정도이거나, 대상화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한국영화와 마찬가지로 성인만화에서도 단지 옷을 벗겨 눈요깃감이 되게 하기 위해 여자를 만화에 등장시켰다. 그러나 이상무 만화의 여주인공들은 그녀들만의 현명함, 질투, 사랑, 기쁨 그리고 슬픔이 당시의 만화들에 비해 존재감 있게 표현된다. 게다가 이상무는 독특하게도 소년들이 보는 만화에 여자주인공을 내세웠다. 70년대 중반 작품인 <내 이름은 독고탁> 시리즈의 <죄와 벌>을 보면 숙이가 죄의식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나오고 독고탁은 조연이었다.
80년대 후반을 지나 90년대에 이르러 이상무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정점을 찍었으니, 다른 산을 넘어볼 만도 하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는 만화가란 말을 한다. 겸손의 말이다. 그가 처음 만화계에 데뷔한 초창기에는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달려라 꼴찌>를 그릴 때 그의 그림 실력은 최고였다. 이야기와 어울리게 딱 그만큼만 가볍고, 그만큼만 무거운 펜선. 이것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좋은 그림 아닌가? <아홉개의 빨간 모자>의 배경과 인물들의 펜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인물과 배경을 그리는 탁월한 만화가인지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무는 당시 만홧가게를 휩쓸던 극화체의 만화로 자신의 그림을 바꾸려 한다. 그래서 그의 가장 장점이었던 독고탁 캐릭터는 사라지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준 그런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시드는 것. 이상무와 독고탁 콤비의 걸작 시대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