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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포스 넘치게 보이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5-12-22

<대호> 박훈정 감독

<대호> 현장에는 총 네 마리의 ‘호랑이’가 상주하고 있었다. CG로 구현될 가상의 호랑이 대호와 호랑이띠인 배우 최민식과 정만식, 박훈정 감독이 그들이다. “갖다붙이려면 뭔들 못 갖다붙이겠나”라며 박훈정 감독은 웃었지만, 사실 호랑이는 오래전부터 그의 무의식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던 존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호랑이꿈을 꿨다. 스윽 지나가기도 하고, 곁에 와서 잠도 자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1년에 한두번씩은 호랑이꿈을 꿨다.” 그렇게 아득한 존재였던 호랑이에 현실감과 정서를 불어넣은 영화를 만드는 건 어쩌면 박훈정 감독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호>를 통해 그는 모두의 머릿속에 조금씩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미지의 동물, 호랑이를 하나의 명징한 캐릭터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혈투>와 <신세계>를 거쳐 <대호>에 당도한 감독 박훈정의 ‘신세계’는, 그렇게 확장되어 있었다.

-몇달 전 SNS에 ‘중경외폐’(中扃外閉)라는 고사성어를 쓴 걸 봤다(마음속의 욕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외부의 사악을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 그 의도가 궁금하더라.

=말뜻 그대로다. <대호>는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했던 작품이다. 참고를 하고, 기준을 삼을 만한 전례가 없다보니 각자의 생각이 달랐고 수많은 의견이 있었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의 중심을 잡는 과정이 필요했다. 말은 말이고, 힘든 건 힘든 거고, 원래 만들려던 영화를 만들자는 의미로 썼다.

-<대호>는 <혈투>를 연출하기도 전인, 2009년에 집필한 작품이다. 이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에는 조선 호랑이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호랑이가 멸종됐는데,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관심이 생겨 자료를 찾아보다가 어떤 사진을 보게 됐다. 하나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포획돼 죽어 있는 사진, 또 하나는 조선 호랑이 가죽을 수집하던 일본 재벌과 조선인 포수 두명이 포획한 호랑이 시체와 함께 서 있는 사진이었다. 두 번째 사진을 보는데 일본 재벌은 득의양양한 반면, 두 포수는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더라. 사냥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일본인들과 더불어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사냥해야 하는 심정은 어땠을까. 사진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서부터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와 마지막 포수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했다.

-호랑이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많은 고민을 했을 법하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호랑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 아마 호랑이를 사육하는 분들이나 학자들이 아니고서는 들어본 사람이 드물 거다. 그래서 애매한 지점들이 있었다. 진짜로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를 영화에 넣었을 때 과연 사람들이 이걸 호랑이의 울음소리라고 받아들일지…. 캐릭터를 구상할 때도 그런 식의 고민이 많았다. 호랑이지만 너무 괴수처럼 보여서는 안 되고, 너무 의인화해서도 안 되니까. 어떤 부분까지 리얼리티를 살려야 하는지, 또 영화적 캐릭터로서 보는 사람들이 과하다고 느끼지 않을 지점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영화적 캐릭터로서의 대호는 어떤 존재여야 한다고 봤나.

=일단 중요한 건 느낌이었다. 지리산의 산군이자 조선 호랑이의 왕. 일본의 고위 관직에 있는, 총독과 맞먹는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하는 존재. 대호는 일본군에게는 공포와 동경의 대상이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섬김의 대상이다. 그러다보니 인간과 마주했을 때 그에 걸맞은 위압감과 신비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동시에 야생 호랑이로서 어떤 날것의 느낌도 있어야 할 테고. 그런 특징들을 중점적으로 구현하려 했다.

-대호의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을 한 이유는.

=대호를 캐릭터화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일반 대중이 보기에 호랑이는 다 똑같지 않나.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뭔가 특징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선천적으로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면 감각과 본능이 극대화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핸디캡이지만, 그걸 극복하고 지리산의 산군이 된 거니까. 그렇게 대호에게 영웅의 서사를 부여하고 싶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호랑이의 무게감과 날렵함이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CG팀에 ‘지금 호랑이는 너무 가볍다, 가볍다, 가볍다’, ‘수정해라, 수정해라, 수정해라’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400kg의 맹수가 움직이는데 그 무게감이 충분히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랑이를 위한 액션 콘티도 따로 있었다. 걸을 때, 뛸 때, 사냥할 때, 공격할 때, 감정을 표현할 때 등 고양잇과의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여섯 가지 행동을 바탕으로 액션을 설계했다. 무술팀 역시 단 한번도 사람이 아닌 동물을 위한 액션을 짜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난감해했다. 그럴 때는 “<동물의 왕국>을 봐, 얘들 사냥하는 거 보면 무시무시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웃음) 또 하나의 문제는 호랑이의 속도감에 대한 등장인물의 리액션이었다. 거대한 호랑이가 시속 80km로 사람을 들이받는다고 했을 때, 배우들을 와이어를 이용해 당겨봐도 그 속도감이 잘 구현되지 않더라. 하도 요구하는 게 많고 힘들어서 무술감독이 내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전화기를 꺼놓을 때도 있었다. (웃음) 정말 어느 하나 쉬운 파트가 없더라.

-호랑이를 CG로 표현하는 것 못지않게 겨울 설산을 구현하는 것도 힘든 작업이었을 거다. 왜 하필 겨울이 배경이었나.

=내가 찍을 줄 알았으면 절대로 겨울을 안 썼을 거다. (좌중 폭소) <대호>를 집필할 당시에는 시나리오작가였으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연의 계절이 겨울이잖나. 겨울은 어떤 지역을 막론하고 혹독하다는 느낌이 들고, 일제시대 자체도 조선의 입장에서는 겨울이었던 시기이고. 그런 중의적인 느낌으로 썼다. 그리고 시베리아 호랑이는 겨울이 되면 털이 길어진다. 그게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보이면서 호랑이가 가장 멋있고 포스가 넘치게 보이는 시기가 겨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대호>의 포수들은 그들의 직업에 대한 신념과 신조가 투철한, 일종의 장인처럼 묘사된다. 그들의 태도에서는 직업적 성스러움마저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실 포수는 거의 대물림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포수의 자식은 포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운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의 가치관이나 자연에 대한 생각, 사냥에 대한 철학이 자식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소신이 깨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일제시대다. 만덕이 아들에게 포수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하는 데에는 물론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시대의 영향도 있다.

-영화를 보며 최민식이 부성애를 지닌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더라. 돌이켜보면 그는 대개 독자적인 개성을 갖춘 인물을 연기했으나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 캐스팅에 대해서라면, <대호>는 최민식 선배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낼 만한 에너지가 있는 배우를 생각했을 때, 최민식 선배 이외의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더라. 그리고 아버지 역할에 대해서라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사실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제대로 그려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살았던 고통스러운 삶을 아들만큼은 살지 말았으면 하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모습을 한번 새롭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만덕의 아들 석이를 연기한 신인배우 성유빈도 주목할 만하다.

=석이 역할에 조금 나이를 올려서 인지도 있는 배우를 쓰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석이는 누가 봐도 내 새끼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석이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뛰쳐나갈 때에는 관객 모두가 그 아이를 걱정했으면 했다. 거기에 딱 들어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는데 최종까지 올라온 배우가 바로 유빈이었다. 마지막으로 최민식 선배와 대본 리딩을 하는데, 그 대배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감정도 잘 잡더라. 그래서 그날 유빈이를 집에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연락할게. 다른 작품 하지 말고 집에 얌전히, 조용히 있어. 그리고 키도 크지 마. (웃음)”

-러닝타임이 다소 길다는 반응도 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인지에 따라 다르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대호>라는 영화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전반부가 길다는 얘기들이 있는데, 서사 구조 안에서 전반부의 이야기는 말하자면 기초공사다. 기초가 다져져서 가야 이야기가 탄탄하게 진행될 수 있다. 전반부가 길다고 해서 몇몇 장면을 뺀다면 후반부의 울림이 덜할 수 있다는 거다. 이야기가 길어야 한다면, 영화도 길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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