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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동료가 있으므로
김성훈 2015-12-22

<히말라야>를 미리 보니

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초오유, 낭가파르바트, 안나푸르나 등.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를 높이 순서대로 나열해보니 산에 오른 것도 아닌데 괜히 머리가 아찔해진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8611m)보다 훨씬 위에 있는 히말라야 8750m에 방치된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엄홍길 대장이 휴먼 원정대를 꾸렸다는 소식을 10년 전 처음 들었을 때 꽤나 무모해 보였던 것도 그래서다. 그곳은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도 제 한몸 가누기조차 힘든 ‘죽음의 지대’(해발 7500m 이상의 높이는 데스 존이라고 불린다.-편집자)가 아닌가. 그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려 했을까. 단지 동료의 시신이 거기에 있으니까? 이석훈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히말라야>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는 산악인들의 기본명제와 다른 성격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아가는 산악영화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찾기 위해 산을 타다

앞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히말라야>는 잘 알려진 실화를 재구성했다. 엄홍길과 함께 2000년 칸첸중가(8586m)를 시작으로 그해 K2, 2001년 시샤팡마(8027m), 2002년 에베레스트(8848m)를 차례로 등정한 박무택은 2004년 엄홍길이 이끄는 얄룽캉(8505m) 원정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자신의 원정대를 꾸려 에베레스트에 재도전했다. 하지만 엄홍길과 함께 로체샤르(8400m)를 등정하기로 한 박무택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박무택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에 조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탈진한 후배 대원 장민을 챙겨 내려오다가 설맹(만년설의 반사광이 강해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게 되는 고산병.-편집자)에 걸린 것이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그는 장민을 먼저 내려보낸 뒤 그대로 냉동인간이 되었다. 캠프5에 있던 백준호는 홀로 고립된 박무택을 구조하기 위해 어두컴컴한 눈속을 향해 뛰어들어갔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후배 대원 세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좌절한 엄홍길은 휴먼 원정대를 꾸려서 히말라야로 향했고, 박무택의 시신을 발견해 돌무덤에 묻고 임무를 완수했다. 당시 MBC는 세계 등반 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사연을 2부작 다큐멘터리 <아! 에베레스트>에 담아내 방영했다.

실화에서 출발한 만큼 <히말라야>는 보통 산악영화와 여러모로 다르다. 할리우드 산악영화 <K2>(1991)처럼 주인공이 등정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나 스릴을 보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다. 최근 개봉했던 <에베레스트>(2015)처럼 산에 도전하는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해 자연의 거대함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영화도 아니다. 또 <버티칼 리미트>(2000)처럼 극한의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흥미롭게도 살아 있는 사람 엄홍길(황정민)이 후배 박무택(정우)의 시신이 있는 죽음의 지대에 올라가 시신을 수습하는 게 목표인 이야기다. 정상에 오르는 것과는 또 다른 복합적인 울림과 감동이 있는 산악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실화의 결말을 잘 알고 있음에도 어쩌면 이것이 제작사 JK필름과 이석훈 감독이 이 사연에 매료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서사는 박무택의 죽음을 기준점 삼아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엄홍길이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러 히말라야로 가는 데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는 실화와 달리, 영화의 전반부는 둘의 첫 만남부터 소개하는 까닭에 두 남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들인다.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첫인상은 좋지 않다. 대명대 산악부 시절 박무택은 히말출리(7893m) 원정대를 떠났다가 당시 네팔 카트만두에서 빌라 에베레스트를 경영하고 있던 엄홍길에게 구조된다. 홍길이 나쁜 날씨를 우려해 “죽은 동료의 시신은 잠깐 두고 내려간 뒤 다음날 다시 올라와 수습하자”고 제안하자 무택은 “같이 왔으모 같이 돌아가야 카는기지예?”라고 고집을 피운다. 화가 난 홍길은 “대장 말 안 듣고 지 잘났다고 혼자 설치는 놈들은 산에 오를 자격 없어”라고 무택에게 다시 산을 탈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무택이 홍길의 칸첸중가 원정대에 자원하면서 홍길과 무택은 다시 만난다. 무택은 박정복(김인권)과 함께 홍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5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50kg은 족히 돼 보이는 짐지게를 등에 지고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홍길의 온갖 구박을 버텨낸다. 홍길의 마음을 조금씩 연 무택은 원정대의 살림꾼 이동규(조성하), 박정복, 조명애(라미란), 김무영(김원해) 등 동료 대원들과 칸첸중가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과묵한 산사나이였다는 실제 박무택과 달리 정우가 연기한 영화 속 박무택은 말 많고 애교가 넘치는, 귀여운 경상도 남자다. 그가 하늘 높은 선배 홍길에게 때로는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고, 또 때로는 홍길의 눈치를 볼 때마다 웃음을 유발한다. 원정대를 준비하는 과정도 꽤 유머러스하다. 이것은 단순히 관객을 웃기기 위한 장치이기보다는 관객이 무택을 친숙하게 느끼게 하려는 목적에 더 가까워 보인다. 마치 홍길이 무택에게 마음을 조금씩 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영화의 중반부에서 무택이 죽었을 때 슬픔이 극대화되는 동시에 홍길이 무택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후반부를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안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악영화 하면 으레 떠올릴 만한 등반 장면들도 이야기 전반부에 긴장감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두 산사나이를 가까워지게 하는 데 일조한다. 무택이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편집자)에 빠지는 장면은 가슴을 벌렁거리게 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몬순(계절풍으로 인도양을 건너온 열풍이 히말라야 산맥에 부딪혀 많은 눈을 내리게 한다)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자일(산에 이용되는 로프. 암벽이나 빙벽을 오르내릴 때 만일의 위험을 대비해 서로의 몸을 연결해 묶는다) 하나에 서로의 목숨을 의지한 채 가파른 빙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광경은 두눈을 찡그리게 할 만큼 아찔하다. 처음에는 상극이었던 홍길과 무택이 가까워지게 된 순간은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눈을 뜰 가능성이 많은 죽음의 비바크(텐트를 사용하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하룻밤을 지새우는 일.-편집자)를 감행하는 칸첸중가 등정 시퀀스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 서로의 속을 털어놓은 까닭일까. 엄격한 선후배 사이였던 둘은 형제가 된다.

황정민과 정우, 그 묵직한 감동

장엄한 자연, 등반 장면의 쾌감을 전시하는 전반부와 달리 휴먼 원정대가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는 후반부는 산보다는 원정대원들의 감정을 담는 데 집중한다. 카메라가 답답할 정도로 인물을 가까이 찍는 것도 동료, 아니 형제 같은 무택의 시신을 찾겠다는 휴먼 원정대의 절실함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다. 어쨌거나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각 배치된 등반 장면을 두고 관객은 산악영화 두편을 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매끄럽게 연결되는지가 이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일 텐데 결과부터 얘기하면 영화는 꽤 영리하게 이 난점을 돌파한다. 경험 많은 황정민이 상황의 뼈대를 잘 잡아주고, 정우는 관객과 홍길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데 열중한다. 엄홍길이 동료 대원들을 모아 휴먼 원정대를 꾸려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는 후반부가 관객의 가슴을 제대로 울컥하게 하는 것도 황정민, 정우 두 주연배우의 활약 덕분이다.

<히말라야>의 후반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같다. 실화와 다소 다른 부분도 있지만 그건 영화를 관전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자일 하나에 서로의 목숨을 내맡긴 홍길과 무택, 두 산사나이와 둘을 둘러싼 동료, 가족을 통해 영화는 우정, 화해, 용서, 희생, 삶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강조한다. 휴먼 원정대가 기록도, 보상도, 명예도 없는 그곳에 목숨을 걸고 올라간 건 그곳에 피보다 더 뜨거운 우정을 나눈 박무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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