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를 두고 누군가는 “K리그 최고의 킥력을 갖춘 선수”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또 누군가는 “축구보다는 여러 이슈메이커로서 인상이 강한 선수”라고 아쉬워했다. ‘K리그 사기 유닛’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전자 때문이고, ‘풍운아’나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건 후자 때문이다. 둘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그가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멤버였으며,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 그림 같은 프리킥으로 골을 넣기도 했다. 리그에서도 좋은 기록을 남겼다. 2002년 울산현대에 입단해 그해 신인상을 수상했고, 2003년 무려 400만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 최고의 리그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다. 2005년 K리그 후반기에 울산현대에 복귀해 17경기 10골 7도움을 올리며 팀을 9년 만에 K리그 정상에 올렸다. 이후 전남드래곤즈로부터 임의 탈퇴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을 떠돌다가 고향팀인 인천유나이티드로 돌아와 후배들을 이끌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지난 11월28일 K리그 클래식 2015 38라운드 전남드래곤즈와의 인천 홈경기에서 이천수는 은퇴식을 가지고 녹색 그라운드를 떠났다. 은퇴식이 끝난 뒤에 만난 이천수는 스스로 “1등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은퇴 소감을 무덤덤하게 말했다.
-은퇴식을 치르고 나니 어떤가.
=은퇴를 결심하기까지 6개월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동료 선수들과 감독님께 말도 못하고 혼자서 힘들었다. 은퇴식을 하고 나니 은퇴가 익숙해진 것 같다. 가장으로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걱정이 많다.
-인천유나이티드 김도훈 감독이 한번 더 생각해보라고 말리진 않았나.
=은퇴 의사를 밝히기 전에 충분히 고민을 하고 꺼내는 얘기라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다. 선수들이 ‘1년만 더, 1년만 더’ 하다가 ‘그만하라’는 얘길 듣고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해왔던 일을 내려놓는 건 힘들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권유로 은퇴하고 싶진 않았다.
-발목 부상 때문에 마지막 시합을 뛰지 못해 아쉬웠을 것 같다. 억지로라도 뛸 수 있지 않았을까.
=올 시즌 가장 아쉬웠던 게 두 가지 있다. FC서울과의 FA컵 결승전과 은퇴 경기를 뛰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스코어를 바꿀 수 있는 선수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고참인 내가 있으면 후배들이 힘을 얻을 수 있다. 후배들에게 FA컵 우승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주지 못하고 떠난 건 미안하고, 은퇴 시합에 출장하지 못해 아쉽다. 구단은 좀 걸어다니다가 교체돼 나올 것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퇴 시합도 리그 경기다. 올스타전이나 아마추어 시합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한 시합이기 때문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뛴다는 건 프로로서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천수다운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스스로 어떤 선수였다고 생각하나.
=항상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심을 가졌던 선수. 이겨야 팬들이 좋아해주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시합이 궁금하다.
=국가대표팀으로는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전에 출장해 프리킥으로 골 넣었을 때고, K리그 경기로는 울산현대 소속 선수였던 2005년, 인천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해 팀을 5 대 1 승리로 이끌었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이다. 아마추어 경기는 2001년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때 70m를 드리블해 연세대 골키퍼였던 김용대(현재 FC서울 소속) 선수를 제치고 골을 넣은 뒤 응원단상에 올라가 세리머니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하기도 했다. 당시 이적했던 레알 소시에다드는 챔피언스리그를 나갈 만큼 강팀이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는데 당시 스페인 생활은 어땠나.
=레알 소시에다드의 연고지는 바스크 지역이다. 스페인은 지방마다 사용하는 언어도, 문화도 각기 다르더라. 언어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운동장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알기 쉽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다. 나머지 시간에 생활을 해야 하는데, 23살이었던 내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연령별 국가대표팀을 모두 거쳤고, 월드컵도 경험한 데다 K리그에서 최고로 인정받았던 까닭에 스페인 진출 실패는 큰 충격이었겠다.
=그전에는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처음 스페인에 진출했을 땐 잘했다. 데뷔전 때 어시스트를 기록했고(이천수의 슛이 상대팀 골라인을 넘기 직전 동료 선수 코바세비치가 건드리는 바람에 골로 기록되지 못했다.-편집자).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선수들에게 따라잡히고 있다는 기분이 들더라. 나중에 누만시아로 임대됐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 심리적으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후 K리그 울산현대로 복귀한 뒤 다시 네덜란드 페이에노르트로 이적했을 때 스페인의 실패가 도움이 되던가.
=네덜란드로 갔을 때도 처음에는 잘했다. 공격수인데 골이 안 들어가니 심리적인 압박감이 점점 커지더라. 스스로 약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게임이 안 풀리니 한국에 자꾸 전화를 해 투정을 부리는 거다. 한국에 있을 때 실패를 해봤더라면 ‘버티고, 이겨내자’는 생각을 했을 텐데…. 당시 그런 조언이나 충고를 해준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외국에 나가서 경기를 못 뛰면 국가대표로 소집되기 어려워지니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천수 하면 솔직하고 당돌했던 말들도 빼놓을 수 없다. 해외에서는 축구 스타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문화가 일상적이지만, 보수적인 한국 스포츠 사회에선 흔하지 않아 신선했다.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인격을 모독하기 위해 했던 말들은 절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축구에 너무나 충실했던 것 같다. 자신이 없으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항상 이기려고 노력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자신 있게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언론과 축구팬들로부터 오해도 많이 받았다. 말의 진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은 언론이나 팬들이 섭섭하진 않았나.
=사람이기 때문에 섭섭했다. 말이 잘못 전달되고, 그걸 대중이 믿고, 그러면서 이미지가 이상해지니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런 뜻이 아니라고 얘기할 순 없잖나.
-2009년 ‘코칭 스탭과 언쟁을 벌였고, 감독의 지시를 불이행했으며, 오후 훈련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당시 소속 구단인 전남드래곤즈로부터 임의탈퇴를 당한 뒤 2013년 임의탈퇴가 해지되기까지 힘든 시기도 보냈다.
=정말 아팠다. 당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유보다는 (내가 잘못했다는) 결과만 가지고 얘기했다.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가족과 주변 사람들. 오랜 시간 사귄 친구들이 많다. 매니저도 10년 넘게 함께하고 있고. 사람을 오래 사귈 수 있다는 건 인성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이 됐다.
-지금까지 함께 뛴 선수들로 베스트11을 구성한다면.
=포메이션을 4-4-2로 한다면 골키퍼는 수원에서 함께 뛴 이운재 선배. 왼쪽 수비수부터 현영민, 박동혁(이상 울산현대), 김영철(전남드래곤즈), 박진섭(울산현대). 왼쪽 미드필드부터 최성국, 김정우(이상 울산현대), 김남일, 한교원(이상 인천유나이티드). 투톱은 나와 설기현 선배(인천유나이티드). 코칭 스탭은 울산현대 시절 지도해주셨던 김정남 감독님과 임종헌 코치님.
-앞으로 축구해설자와 방송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다. 2002년 월드컵 멤버 중 이영표, 안정환 선수가 현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선수 시절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겸손한 얘기 아니냐고?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 1등이었던 선수에게 항상 긴장감을 주며 함께 성장했던 라이벌 선수에 가까웠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안)정환이 형, (이)영표 형을 긴장시켜서 함께 수준 높은 해설을 할 수 있는 해설자가 되고 싶다. 축구팬들의 눈높이가 수준 높은 유럽 축구에 맞춰져 있는데 그들에게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해설을 선보이고 싶다. 야구 중계방송을 보면서 여성팬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아야 시합이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성팬들이 편하게 축구를 즐기기 위해 운동장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06 A3 챔피언스컵 울산현대와 감바 오사카의 시합
지금은 중단됐지만 한국, 일본, 중국 프로축구 정규리그 우승팀이 모여 최고를 가리는 축구대회 A3 챔피언스컵에서 이천수가 이끈 울산현대는 J리그 우승팀인 감바 오사카와 중국 슈퍼리그 우승팀인 다롄 스더를 각각 6 대 0, 4 대 0으로 꺾고 우승했다. 특히 감바 오사카와의 시합에서 피로 골절과 감기 몸살 때문에 후반전에 교체로 나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대회 시작 전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우승팀이 모인 대회에서 가장 강한 팀이 트로피를 가져가야 대회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울산현대가 가장 센 팀이다. 우리가 저 트로피를 가져가야겠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첫 경기였던 일본의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와의 시합에서 3 대 2로 진 거다. 미디어데이에서 우승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웃음), 몸이 아픈데도 나가서 3골 넣었다”는 게 이천수의 회상. 이 대회를 계기로 울산현대는 ‘아시아의 깡패’라는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