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송곳>은 <미생>이 되지 못했나. 드라마 <송곳>이 종영되자마자 가장 먼저 들려온 질문이었다. 그럴 만하다. 시작부터 <송곳>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이 드라마가 <미생>의 인기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냐에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종영한 이 시점에서 돌아보건대 시청자들의 호감과 상찬에도 불구하고 <송곳>은 <미생>만큼의 인기를 끌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들려오는 이 질문. 왜 <송곳>은 <미생>이 되지 못했나.
그러나 이 질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왜 <송곳>이 <미생>이 되지 못했는지에 관한 질문이 성립하려면, 먼저 ‘<송곳>은 <미생>이 되려고 했는가’에 대한 해석상의 합의가 먼저 이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송곳>이 <미생>을, 아니 <미생>이 <송곳>을, 아니다 <송곳>이 <미생>을, 아 헷갈려.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판타지
<송곳>은 <미생>이 되려 한 적이 없다. 둘은 애초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 이 두 이야기에 관한 대중의 상반된 반응은 바로 그 ‘다른’ 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미생>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생>은 기성의 조직에 소속되길 열망하는 청년의 이야기였다. 부조리해 보이는 어른들의 세계에도 합리적인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합리성을 지켜내려 노력하는 어른들이 있으며, 그들에게 인정받고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장그래가 있었다. <미생>은 그런 장그래가 결국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인정받고, 소속되어, 자기 밥벌이를 하는 상사맨으로 거듭나기까지의 풍경을 다루었다.
<미생>은 충실하고 사려 깊은 취재에 기반한 훌륭한 이야기였다. <미생>의 가장 큰 장점은 균형감각이었다. 청년과 기성의 질서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절대적인 선이나 악으로 몰지 않고 균형을 찾으려 애썼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미생>의 가장 큰 단점 또한 여기에서 기인했다. 현실에서 전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애써 균형감 있게 다루려다보니 결국 기계적인 무게추가 기성의 질서쪽에 더 실려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되레 균형감각을 잃고 거꾸로 어느 한쪽을 신화화해버렸다.
이제 와 <미생>은 기존의 룰이나 관습, 시스템을 옹호하는 데 우리 시대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콘텐츠가 되었다. 원작자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미생>이 정략적인 이유로 이쪽 저쪽 진영의 정책에서 엉뚱하게 인용되고 이용되었던 사례를 우리는 한동안 지켜봐왔다. 오 과장으로 대변되는 정직한 정규직 어른들의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 장그래처럼 더 열심히, 치열하게 노력하라는 자기계발 콘텐츠로 호출되었다. <미생>이라는 이야기에서 판타지는 장그래가 아니다. <미생>이 창조해낸 가장 강력한 판타지는 오 과장이다. 오 과장이 대변하는 정직하고 합리적이며 안정적이고 다음 세대를 위해 양보할 줄 아는 어른의 세계. 그러나 그런 건 현실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오 과장이라는 판타지가 현실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기존의 질서에 면죄부를 제공한다. <미생>이 폭넓은 팬덤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판타지가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며 제공하는 안정감과 저런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소속에의 열망 덕분이었다.
‘좋지만 불편하다’로 귀결되는 이유
반면 <송곳>은 앞서 말한 종류의 안정감이나 소속감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송곳>은 성공하기 위한 미션을 수행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송곳>은 단 한번의 성공의 경험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실패할 걸 알면서도 기댈 곳이 없어 소속되고 싶지 않은 곳에 소속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보다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공포를 먼저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다. 사실 이 공포는 자기부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시청자의 대부분이 이미 <송곳>이 다루고 있는 현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공포를 느끼는 건, 저렇게까지 절박해지지 않길 바라는 자기보호본능 탓일 것이다. 알코올중독 아버지를 치료받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저 오늘은 밥상을 엎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송곳> 또한 <미생>만큼 충실한 취재에 기반한 훌륭한 이야기다. 서사의 강약도 잘 조율되어 있고 근사한 순간들과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게 만드는 지점들이 영리하게 배치되어 있다. 슈퍼히어로 소장님이 등장하고 그런 소장님의 좋은 점을 닮아가며 조금씩 자기방식대로 성장해가는 주인공이 있다.
그러나 차갑다. 그리고 냉소적이다. “한국인들은 노조를 가질 자격이 없어”라는 프랑스인 지점장의 대사가 보여주듯이, <송곳>의 서사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동조를 하게 되고, 통쾌함을 느껴야 할 지점에서 이상하게 누워서 침 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한다.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시민운동의 방식이 잘못된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바로 그 죄의식 때문에 불편한 마음으로 외면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러한 원작자의 서사 전략이 과연 영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강박적으로 안간힘을 다해 현실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송곳>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이 대개 ‘좋지만 불편하다’로 귀결되는 이유는 실제 이 이야기의 내용이나 서사 전략 자체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바로 TV 밖의 세계, 현실 그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문제는 TV 앞의 시청자가 현실을 실감하거나 그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는 걸 과도하게 불편해한다는 데 있다. 드라마부터 예능에 이르기까지 TV 콘텐츠의 목적이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면 요즘처럼 그 목적이 정확히 달성되고 있는 시절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송곳>은 <미생>만큼의 반향을 이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 당연한 일이었다. <송곳>은 <미생>이 되려 한 적이 없고 애초 전혀 다른 방식과 시점으로 현실을 이야기했다. 이만한 드라마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다시 도래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다시 들어야 할까. 지금 한국 사회의 제일 큰 키워드는 ‘불편함’이 아닐까 싶다. 모든 종류의 불편함으로부터의 도피. 이 도피의 끝이 모두를 결국 어디로 이끌지 생각하면, 아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