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의 첫 수업 시간. “아침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 때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교실에 들어와 뭔가를 나누어주었다. 칫솔과 치약이었다. 학교 근처의 보건소에서 온 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보건 위생에 대해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이 나누어준 칫솔과 치약으로 이 닦는 방법을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치약을 보느라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앙증맞게 생긴 작은 치약의 하얀 바탕 표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호피와 차돌바위, 그리고 홍길동과 곱단이. 신동우가 그린 만화 <풍운아 홍길동>의 주인공들이었다. 알루미늄 껍데기 위에 그려진 신동우의 그림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멋진 것을 나눠주는 학교란 정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 치약을 애지중지 모셔두고 한동안은 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내 주위에는 신동우의 그림들이 넘쳐났다. 교실 벽에 붙어 있는 위생 포스터. 저축을 장려하는 은행 광고. 그리고 어린이 잡지에 항상 있었던 진주햄 소시지 광고. 물론 그 그림들도 좋았지만, 홍길동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그림은 귀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의 형 신동헌과 함께 만든 애니메이션 <호피와 차돌바위>(1967)를 극장에서 보면서 왜 홍길동은 안 나오는 거냐, 며 투덜거렸던 터라 홍길동 캐릭터가 그려진 치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년 후. 학교가 끝나면 함께 어울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구에서 전학 온 곱슬머리 친구는 항상 앞장서서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친구는 선생들이 하굣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모든 짓을 해내는 대단히 용감한 친구였다. 가장 깜짝 놀란 것은 어른들에게 소주를 잔술로 파는 리어카 행상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 어린이가 좀처럼 먹기 힘든 해삼과 멍게를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에게 주문하고, 구부린 옷핀으로 해삼을 콕 찍어 초고추장을 발라 맛있게 먹어 나를 질리게 했다. 온갖 병균이 다 들어 있고, 먹는 즉시 배탈이 난다는 거리의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처럼 먹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떡볶이 집 좌판 앞에 서서 주인이 한눈을 팔면 돈을 따로 더 내야 하는 비싼 어묵을 번개같이 포크로 찍어서 아구아구 먹고는 시침 뚝 떼고 떡볶이 값만 내고는 입을 싹 닦았다. 나는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돈을 내고 뭔가를 사먹는 방법을 배웠다. 선생이 하지 말라는 불량식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먹는 것도 대단했지만, 어른처럼 당당하게 돈을 내고 뭔가를 하는 그의 모습은 대단히 경이로웠다. 그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뭔가를 사주거나, 데리고 다니는 곳만 따라다니는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곧장 가는 법이 없었다. 모래내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거나, 할 일 없고 가난한 어른들이 모래내 천변에 모여 개를 잡아 가스불로 털을 태우고, 다 익은 고기를 쭉 찢어 지푸라기가 섞여 있는 굵은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을 군침 흘리며 애타는 눈으로 지켜보는 것도 그를 따라다니며 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12살짜리 어린이가 혼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 퇴계로의 극동극장을 찾는 일년 뒤 나의 행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친구를 따라 학교가 끝나고 만홧가게에 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방학 때 할머니 집에 가거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만홧가게에 갔었는데, 그 친구는 주머니에 돈이 있고 자기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었다. 그 친구와 내가 항상 다니는 골목 어귀에 남가좌동 침례교회가 있었고, 그 옆 배추밭 너머에 아주 작고 어두컴컴한 만홧가게가 있었다. 그 친구를 따라 하교 후 만홧가게를 들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치약에서 만난 홍길동을 만홧가게에서 다시 만나다
그 만홧가게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만화를 발견하였는데 신동우 글, 그림 <풍운아 홍길동>이었다. 몇해 전 받았던 치약의 표면에 그려진 홍길동을 그제야 만화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풍운아 홍길동>을 뽑아들 때 나의 마음은 이거 재미있을까? 하는 반신반의였다. 그 당시 신동우는 만화작품을 여러 편 낸 이름난 히트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정부 홍보물과 각종 광고에 그림을 그리거나, 텔레비전의 대담 프로 또는 오락 프로에 신동우 화백이라 소개되어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으로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기작가들이라면 작품 수가 100편이 넘는 만화가들이 수두룩했고, 나는 그가 그린 만화책을 처음 만나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알려진 이름의 유명세에 비해 작품 수가 턱없이 부족한 작가를 누가 믿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풍운아 홍길동>은 재미있었다. 집을 떠난 홍길동은 길을 가다가 소년 도적 차돌바위를 만나 그를 동생으로 거둬들이고, 백운도사 밑에서 무술과 둔갑술을 배우고, 도적이 되어 탐관오리들을 징벌한다. 탐관오리들은 홍길동을 잡으려 수많은 강적들을 보내고 홍길동은 그들과 대적한다. 이 간단한 스토리 속에 <수호지>적인 영웅 호걸들이 등장한다. 홍길동이 만나는 주인공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호피다. 홍길동과 호피의 만남은 홍길동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김기호란 이름으로 홍길동을 토벌하는 토벌대장을 뽑는 무술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길 위에서다. 번개검법의 달인 호피는 홍길동을 잡아 출세하려는 야심차고 냉혹한 소년이지만 김기호로 가장한 홍길동이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이며 멋진 놈이라는 것을 안다. 두 소년은 서로 숙식을 같이하며 우정을 나누고, 무술대회에 출전하여 수많은 대결에서 승리하여 결국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호피의 무술이 뛰어나지만 홍길동에게는 안 된다. 싸움에 진 호피는 친구가 되어 함께하자는 홍길동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고 표표히 떠나버린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친구가 아니다. 친구이고 싶은 자의 부하가 되는 것은 싫다. 이것이 호피의 생각이고, 홍길동도 그의 생각을 안다. <수호지>에서 노지심 또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포비 같은 인물인 투덜이 차돌바위의 캐릭터는 어떤가? 귀엽지만 포악하고, 양반과 관리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사고만 치고, 홍길동이 탐관오리들이라 할지라도 절대 살생을 하지 않는 그의 신념에 대해 번번이 반항하는 장면은 노지심이 송강에 반대하며 술상을 엎어버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탐관오리들로 득실거리는 조선 사회에 숨은 진주와 같았던 청렴하고 백성을 위하는 장군인 우충을 감화시켜 그를 홍길동 자신의 휘하로 삼는 장면도 멋지다. 홍길동의 적들은 어떤가? 해인사를 폭력으로 점거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악당 중 골반대사, 여진족 출신 장풍의 대가 지갈그미 장군, 그들을 겨우 물리쳤다 싶자 등장하는 공포의 악당 도마술.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홍길동에 빠졌다가 돈이 모자라 용돈을 받는 날 다음 권을 보리라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 만홧가게가 나와 만화책 홍길동만의 장소는 아니었고, 학교를 땡땡이 친 남자 고등학생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그들은 <선데이서울>을 책가방에서 꺼내어 비키니 차림의 여자 사진이 있는 브로마이드를 펼쳐 보며 킬킬거렸고, 아버지에게서 훔친 일본 담배라며 한 개비를 돌려 피우다가 땅콩맛이 난다며 왁자하게 떠들었다. 담배에서 땅콩맛이? <풍운아 홍길동>의 마지막 권에 이르러 중공군이 연상되는 옷을 입은 악당 도마술과 홍길동의 연기 자욱한 대결에 빠져 있던 나는 만화에서 눈을 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어른 흉내를 내며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들에게 만홧가게 주인 아줌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담배에서 땅콩맛이 난다는 것이 더 이상해서 나도 좀 그 맛을 음미해보려 숨을 크게 들이켜 연기를 좀 마셔봤지만 담배연기에서 땅콩맛이 나지는 않았다. 그 후 담배에서 땅콩맛이 나는 그런 담배는 뭐였을까가 항상 궁금했다. 그들이 교복과 책가방을 만홧가게에 맡기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왁자하게 나가버리고 나는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내가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을 생각할 때 항상 부록처럼 따라붙는 것은 땅콩 냄새가 난다던 그 일제 담배였다.
노동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펜선
<풍운아 홍길동>의 각권 첫 페이지에는 <선데이서울>의 비키니를 입은 여자 브로마이드보다 더 황홀한 전장 컬러 그림 페이지가 있었다. 각권의 내용을 요악하거나 대표적인 장면을 박진감 넘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린 것이었는데, 울트라마린 색과 크림슨 레드색의 향연이었던 아름다운 배경에 홍길동이 펄쩍 뛰어오르거나, 차돌바위가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이 서비스처럼 각권에 한장씩 들어 있었다.
70년대 중반. 나에게 만화를 가장 잘 그리는 만화가는 절대적으로 신동우였다. <소년 수호지> <소년 삼국지> 같은 어린이 잡지에 연재되는 소설에 삽화를 그렸던 이성박의 그림도 훌륭했지만, 언제나 첫째는 신동우였다. 그 시절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박기준의 <만화작법>을 사서 보았는데, 만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그림체가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그림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만화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라는 박기준의 글을 보고는 첫 번째 스승을 신동우로 정하고 그의 만화주인공 홍길동과 차돌바위를 따라 그렸었다. 그러고는 절망했다. 신동우의 그림은 아무나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었다. 차돌바위를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었지만, 신동우의 펜선이 주는 그 오묘한 맛을 흉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동우의 펜선은 제비처럼 빠르고 날렵했다. 신동우의 빠른 손이 일필휘지로 그어지면서 선에 농담이 생기고, 캐릭터에 날아갈 듯한 속도감이 부여되었다. 신동우 만화는 정적인 만화가 아니다. 그의 만화는 활력이 넘치는 그림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당시 일본 소년만화 잡지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던 <오토노구미>의 작가, 이케가미 료이치의 극화체 그림을 보고 넋을 잃기도 했었고, 지바 데쓰야의 <허리케인 죠>와 <검도 소년 텐베이>의 그림체가 훌륭하다고 생각했으며,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들을 보고 눈물, 콧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만화가는 신동우였다.
단순히 그가 한국 만화가여서는 아니었고 복간된 <풍운아 홍길동>을 나이가 들어서 본 지금도 신동우가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인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원본을 정성껏 살려내려 애를 써서 복간한 <풍운아 홍길동>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컷마다 만화가가 정성들인 노동의 흔적이다. 정확한 해부학 지식을 가지고 그린 인물들의 움직임은 만화의 액션 장면은 이렇게 그리는 거야! 할 만큼 활력과 긴장감이 넘치고, 인물들이 내지르는 소리와 음향효과의 디자인적인 표현도 단연 선구적이다. 배경에 공들인 흔적에 이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할 당시 신동우에게 어시스턴트가 있었는지 확인된 것은 없지만, 만화의 배경은 모두 신동우의 펜선으로 그려진 것이라 짐작된다. 배경의 초가집과 기와집의 표현, 소나무의 표현, 시소한 돌멩이 하나도 재능 있는 화가의 스케치가 연상되는 능수능란한 펜선으로 표현되고, 검은 먹칠을 다이내믹하게 넣어 만화의 한컷이 동양 수묵화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만화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건물 배경 역시 허투로 그린 것이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 장면에서는 광화문이 멀리 그려져 있고, 평양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동문 역시 그럴듯하다. 조선시대 한양의 동네 지명과 전국의 도시들 지명이 세심하게 배려되어 등장한다. 전 8권(복간본은 전 6권). 1700여 페이지의 <풍운아 홍길동>은 어마어마한 걸작이라기에는 장대한 스토리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내버린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의 다음 작품들을 기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60년대 말. 그가 가장 물이 올라 만화가로서 역량을 발휘할 시기에 그는 그의 형 신동헌과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를 만든다. 터무니없이 과중한 노동을 요구하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느라 그에게 만화를 그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70년에 발표된 <개천대왕>의 몇 장면을 보면 인물과 배경의 완성도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만화가로서 역량이 최고였을 그 무렵 신동우는 더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70년대 신동우는 만화를 그리기보다는 정부 홍보물과 광고의 삽화 그리기만을 한다. 만화라면 불량식품과 더불어 어린이의 정서를 해치는 사회악이라 치부되는 끔찍한 세상이었으니 넌덜머리가 나 만화를 안 그렸을지도 모르고, 70년대에 들어 고우영으로 대표되는 성인만화가 인기를 끌자 성인만화를 그리기 싫어서라는 본인의 말이 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항상 웃고 너그러운 성품을 반영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만 그 뒤에 숨은 그의 본질 중 하나가 과묵하고 속내를 밝히지 않는, 1•4 후퇴 때 월남한 함경도 아바이였으니 또 다른 그만 아는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더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쩌면 한국의 디즈니, 또는 데즈카 오사무가 될 인물이었던 그는 불행하게도 텔레비전의 <묘기대행진>에 출연하여 그의 재능을 눈요깃감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대중이 재미있어하면 그만이고, 인기를 얻으면 그만이겠으나, 그의 재능을 낭비하는 모습이어서 어린 나이에 텔레비전을 보며 분개했던 기억이 있다.
응답하라 1988, 만화가 대신 화백 칭호를 선택하다
만화가와 화백, 그 사이에서 신동우는 화백이란 칭호를 선택했고, 만화가 출신의 그는 엄숙주의에 찌든 화단에서 설 자리가 없었으며 80년대 들어서는 어용 만화가란 오명이 그의 이름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준비가 한창일 때, 신동우의 이름과 그림이 신문에 크게 실렸다. 그것은 88올림픽의 마스코트로 신동우가 그린 그림들이 사용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뭐 10년간 줄기차게 정부 홍보물을 그렸으니까”라고 생각했고, 디자인과 학생들은 만화가가 그려 격이 떨어진다며 분개했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신동우가 그린 88올림픽 마스코트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호돌이가 88올림픽 공식 마스코트로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당시 나는 어리둥절했다. 신동우가 그린 마스코트는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88올림픽이 열리고, 신동우는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드문드문 출연하여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다 너무나 젊은 나이인 59살, 자신이 만든 캐릭터 홍길동을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을 불러들여 대규모의 제작비로 제작한다고 떠들썩하던 시기에 책상에 앉아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