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좋아한다. 언제나 좋아해왔다. 참 잘 만든 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84>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더불어 디스토피아 문학의 정수라고 소개한다. 나는 <1984>를 침소봉대 문학이라 불러왔다. 오웰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수긍할 만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오세아니아의 풍경은 너무나 우화적이다. 실수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통제와 절대다수 시민의 완전무결한 무지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성립 가능한 그런 시스템이 굴러갈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가 지나치게 순진해 보였다. 비유와 풍자란 대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있는 힘껏 최대한 부풀려서 반대 진영을 겸연쩍게 하고 입을 묶어버릴 요량으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가만 있자 지금 이 말을 조금 더 근사하게 비유할 문장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이를테면,
떠오르지 않는다.
<1984>는 두번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역시 1984년에 만들어진 마이클 래드퍼드의 <1984>가 빼어나다. 존 허트가 주연을 맡았다. 리처드 버튼의 유작이기도 하다(그는 촬영 한달 후 세상을 떠났다).
이야기의 무대는 오세아니아라는 가상의 국가다. 오세아니아는 빅브러더라는 인물이 통치하는 당의 지휘 아래 있다. 모든 집에는 스크린과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당의 선전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라는 국가와 전쟁 중이다. 방송에서는 끊임없이 전선에서의 승전보와 이번달 경제계획이 초과 달성되었으며 시민 생활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통계 수치가 흘러나온다.
오세아니아에는 골드스타인이라는 이름의 공공의 적이 있다. 그는 테러리스트다. 체제 전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매일 골드스타인의 첩자들이 발각되어 스크린에 비치며 자기고백을 한다. 사실 거기 전쟁은 없다. 골드스타인도 없다. 이곳에서 전쟁은 승리가 아니라 지속된다는 게 중요하다. 이 전쟁은 지배세력이 자기 국민과 벌이는 싸움이다. 그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증오를 투영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쟁과 골드스타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그는 겉으로 당에 순종하지만 속으로는 이 모든 것이 비인간적이라 여기며 저항하고자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오세아니아의 적이 유라시아가 아닌 동아시아로 발표된다. “오세아니아는 동아시아와 싸우고 있다. 언제나 동아시아와 싸우고 있었다. 유라시아는 우방이다. 유라시아는 언제나 우리 우방이었다.” 그 즉시 관련된 모든 기록이 파쇄되고 오세아니아는 줄곧 동아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것으로 변모된다. 주인공은 구토를 느낀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은 사상경찰의 함정수사에 빠져 체포된다. 그리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상범 수용소 101호의 문 앞에 당도한다.
<1984>가 표면적으로 겨냥했던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은 사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4>는 출간 이래 거의 모든 시간대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호명되고 환기되어왔다. <1984>가 담고 있는 통제의 욕구, 감시와 순종에의 욕망은 어떤 종류의 사회시스템을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손뻗기 쉬운 꿀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 많은 이들이 수시로 <1984>를 끌어들여 현실을 지적하려 애써왔다. 나는 그런 측면에 있어 다소 냉소적이었다. <1984>가 그리는 풍경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풍자다.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면 그에 대한 대응도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러면 지지자를 모을 수 없다. 지지세력을 얻지 못하는 운동은 결기만 남고 이기지 못한다. 이기는 경험을 쌓지 못하면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길 수 없다. 아니 뭐 <1984>씩이나 언급해가며, 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정 교과서 논란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대통령과 당대표 최고위원이 국정 역사교과서에 목을 매는 건 두루뭉실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필요 때문이다. 1. 역사를 아는 게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게 만들고 2. 그나마 남은 기록마저 편의대로 재구성하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과거의 나치 정권을 참고해 이미 실행 중인 장기 집권 프로세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히틀러가 뜬금없이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 나부랭이를 떠들었던 사실을 상기해보자. 근현대사의 사실을 지워내고 ‘자랑스러움’이라는 신화적 감정의 수사로 채워넣는 것. 거기에 시민의 시니컬한 무관심과 열광적인 광신도들이 합세할 때 파쇼는 완성된다. 그리고 파쇼는 반드시 바로 다음 세대에 끔찍한 경험을 안긴다. 오세아니아의 전쟁처럼 말이다.
부끄럽지만 정직한, 그래도 우리는 정직하게 이런 흑역사라도 남기려고 열심히 싸웠고 그래서 너희들은 우리보다 제발 조금 더 나아달라고 있는 힘껏 외치는 근현대사 서술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를 아주 조금이라도 응원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때 자기 과거를 거짓으로 낭만화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현실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노쇠한 자들은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자랑스러운 역사”란 왜곡된 자화자찬이 아니라 그 모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거듭해가며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유와 반성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과거는 대개 창피한 것이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돌아볼 수 있는 정직함만이 늘 위대하다.
어용언론과 정부는 지금의 역사 교육이 학생들의 자긍심을 고취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정말 염려하는 공동체는 “민족의 자긍심”이라는 수사를 핑계삼아 과거를 미화하거나 편의대로 조작하는 대신, 우리는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한심했으나 적어도 그 내용을 정확히 남기니 부디 너희는 조금 더 잘해달라고 가르친다.
개가 자기 밑을 핥는 이유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그저 누군가 알아서 하리라 여기고 말면,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자들이 모든 걸 망쳐놓을 것이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막지 못하면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한심한 기성세대가 될 것이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직업은 기록국 직원이다. 당의 입장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를 바꾸어 기록하는 일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1984>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역사를 지배한다. 지금 당장 이 나라가 오세아니아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오세아니아처럼 전락할 수 있는, 그리고 지금의 정권이 빅브러더로 군림할 수 있는 조건들은 하나둘씩 차근차근 충족되어가는 중이다. 조건들이 완성되면 결과는 지체 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