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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남자들의 드라마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유머, <스쿨 오브 락> <버니> <배드 뉴스 베어스>

<버니>의 잭 블랙.

우리의 머릿속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이름과 가장 가까이 붙어다니는 몇개의 단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랑, 시간, 성장 그리고 변화(혹은 이 단어들을 조합한 변주들). 축을 달리해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스러운 대사들, 엔딩 크레딧을 빼곡하게 채운 음악들, 그리고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배우들도 떠오른다. 그의 최근작 <보이후드>를 보고 있으면 실제로 링클레이터와 함께 머릿속을 떠다니는 저 ‘아이템’들이 그를 읽어내는 ‘만능열쇠’란 생각을 굳히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잠깐만, 1991년 <슬래커>로 시작한 링클레이터의 필모그래피 속엔 이 만능열쇠가 잘 맞지 않는, 그래서 슬쩍 뒤로 밀쳐놓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이 ‘당혹스러움’의 가장 끝에 놓인 것이 바로 몇편의 코미디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링클레이터’란 이름으로 이야기하긴 머쓱하지만, ‘조심스러운 추천작’ 정도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들이랄까?

시간 순서 말고 당혹스러움의 순서대로 보자면 <배드 뉴스 베어스>(2005)가 가장 눈에 띈다. 1976년 마이클 리치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은퇴한 뒤 술과 게으른 삶에 정착해버린 전직 메이저리그 선수가 동네 어린이 야구단의 코치를 맡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다. 개봉 당시 “이럴 거면 왜 리메이크를 했냐”는 치욕에 가까운 비난세례를 받았던 영화에서 링클레이터의 ‘미덕’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흥행과는 무관하게 그저 ‘잭 블랙의 코미디영화’로 받아들였던 <스쿨 오브 락>(2003)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버니>(2011)까지 아우른다면 링클레이터의 코미디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꽤 꾸준해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이 세편의 영화가 관객을 ‘웃기는’ 방식에 어떤 일관성이 관찰된다.

<스쿨 오브 락>

존재만으로 웃음을 준비시키는 잭 블랙이지만, 사실 <버니>에 웃게 되는 건 잭 블랙의 재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연기하기엔 너무 진지한 주인공 ‘버니’ 때문이다. ‘장례사’라는 직업에 맞지 않게 경쾌하고 멋진 성격을 가진 버니는 괴팍한 성격의 미망인과 함께 살기엔 너무 젊고 친절하며, ‘살인자’답지 않게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의 의심처럼) 이성애자답지 않게 동성애자 특유의 독특하고 섬세한 감각을 가진 인물이다. 여기에 하나 더, 그의 이야기는 실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척이나 극적(dramatic)이다. 다시 말해 <버니>의 웃음은 ‘답지 않음’에서 나온다. 그러고 보면 <스쿨 오브 락>에서 ‘록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다 초등학교 속으로 휘말려들어간 듀이(잭 블랙)도, <배드 뉴스 베어스>에서 술과 여자 외에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가 우연히 사연도 가지각색인 아이들로 구성된 야구팀의 코치가 된 모리스(빌리 밥 손튼)의 상황은 유사하다. 이들은 지금 자신과 맞지 않는, 혹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자신답지 않음’과 싸우며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링클레이터는 어느 순간 설 자리를 잃어버린 이들이, 놓이지 말아야 할 곳에 놓이며 벌어지는 사건들로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그의 웃음 속에 우울이 묻어나는 건 이 인정투쟁이 거의 항상 일정 부분의 실패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의도나 평판이 어떠했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는 버니도, 훌륭한 무대를 선보였지만 우승도 놓치고 아이들도 언젠간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코미디치고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 나머지 두편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인정투쟁의 역할은 이제 <보이후드>의 아버지에게로 이어진다. ‘한번의 실수’로 졸지에 아빠가 된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처음 남자친구가 생겨 설레어하는 딸에게 덜컥 피임부터 이야기하고, 자신의 차를 선물로 주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리는 인물이다. 아버지‘답지 않게’ 철없는 그의 모습에 웃게 되지만, 12년 동안 성장하는 건 아들 메이슨 주니어만이 아니다. 아들의 졸업파티에 참석한 그는 이혼한 전처에게 자신이 결국 이 자리를 지킨 ‘유일한’ 아빠가 아니냐며 으쓱해한다. 하지만 파티 비용을 보태겠다며 호기롭게 지갑을 열었다 텅 빈 지갑에 당황하는 것도 여전히 마흔 중반을 훌쩍 넘긴 그의 몫이다. 이 간극이 관객을 슬며시 웃게 하지만, 웃음 끝에 애잔함이 맺히는 건 링클레이터의 ‘유머’가 가진 묘한 힘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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