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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바나나나무, 집, 고향… 그들의 고유의 리듬을 보여주고 싶다

<찬란함의 무덤> <증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2015년은 훗날 타이의 영화 마스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일대기를 돌아보는 영화사가들에게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동안 타이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왔던 그는 <찬란함의 무덤>(2015)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자신의 고국에서 장편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 시기를 마무리하며 느끼는 애상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 위라세타쿤은 현재 이 복합적인 감정의 중간 즈음에 서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을 압박하는 거대한 힘과 그로 인해 개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찬란함의 무덤>과 아시아 마스터들이 함께 작업한 단편영화 프로젝트 ‘컬러 오브 아시아-마스터스’에서 위라세타쿤이 연출한 <증발>은 배경과 형식은 다르지만 작품의 테마에 있어 흥미로운 대구를 이룬다.

왕조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병원, 그리고 그 자리에 흐르는 강력한 고대의 기운으로 인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찬란함의 무덤>은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21세기 타이 사회에 대한 의미심장한 알레고리라고 할 만하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꿈을 관찰했다는 위라세타쿤은 “당장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만 원하는 대로 꿀 수는 없는” 꿈의 특성이 군부 정권 아래 예술가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감과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관객이라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한국 뮤지션 DJ 소울스케이프의 <러브 이즈 어 송>이라는 노래가 반가우면서도 놀라울 텐데, 친구로부터 한 묶음의 한국 음반을 받았다는 위라세타쿤은 “<찬란함의 무덤>의 태국 제목인 <러브 인 콘 카엔>(콘 카엔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과 DJ 소울스케이프의 노래가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걸 경계해 그동안 영화에 음악을 삽입하는 걸 꺼려왔지만, 이번만큼은 고향에 대한 작별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념의 의미로 엔딩크레딧에 음악을 넣었다”고 말한다.

위라세타쿤의 단편 <증발>에서도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성영화의 형식으로 제작된 <증발>은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태국의 기타리스트 타낫 라사논이 극장에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작품이다. 위라세타쿤이 8년간 머물렀던 태국 북부지역 매 림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작업한 이 영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증기가 마을 곳곳을 뒤덮는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15년 전부터 이 지역의 소유권을 두고 정부와 군부가 지속적으로 다퉜다. 그런 상황에서 정작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한다는 걸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타낫 라사논의 라이브 기타 연주는 “지금 현재,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긴박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편 <증발>과 <찬란함의 무덤>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변화하는 현재를 짐작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영화의 형식이나 구조를 완벽하게 구성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면, 요즘은 나와 가까운 무언가에 더 눈길이 간다. 개, 바나나나무, 집, 고향 말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 리듬으로부터 내가 느끼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리듬에 주목하기 시작한 아시아 거장의 다음 작품은 어떤 운율을 품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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