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봄.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의 별책부록 만화에 새로운 만화가 연재되었다. 이두호 글•그림. 도전자 허리케인. 그 당시 내가 어머니에게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매를 맞는 일은 단 하나. 만화 때문이었다. 만홧가게에서 만화를 보는 것보다는 만화를 빌려와 이불을 깔고 엎드려서 보는 맛이 최고인데 어머니는 만화를 집으로 빌려오는 것을 싫어하셨다. 기회를 노려 만화를 빌려와 다락방에 숨겨놓고 몰래 만화를 보았는데 대개 나의 의심스런 행동 때문에 항상 들키고 말았고 매를 맞았다. 그런데 아들이 만화 보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어머니는 소년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만화를 보는 것은 너그러이 넘어갔다. 게다가 달마다 소년 잡지가 나오면 돈까지 쥐어주었다. 만홧가게의 만화와 소년 잡지 부록만화 모두 만화인데 말이다.
60년대 말에 창간하기 시작한 소년 잡지들은 저마다 별책부록 만화로 소년들을 유혹했다. <소년중앙>에서는 <타이거 마스크>를 비롯해 <원시소년 아론> <쾌걸 바바>, 그리고 <도전자 허리케인>, <어깨동무>에서는 <울트라 세븐> <철인 28호> <팔도 검객>, <새소년>에서는 <수호지> <바벨 2세> <가면라이더 X>가 연재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한달에 소년 잡지를 서너권 사서 보는 호사를 누리곤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할머니 댁인 용두동으로 향하는 7번 버스 안에서 나는 뭔가를 보았다. 버스가 정차한 청계천 5가의 정류장 앞에 있던 헌책방의 한 묶음 잡지. 책 표지는 안 보였지만 책등의 울긋불긋한 일본 글씨들. 일본 소년만화 잡지였다. 흥분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차근차근 돈을 모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 만화책이 만만한 가격이 절대 아닐 것이라 생각한 나는 세뱃돈과 온갖 거짓말로 어머니를 속여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되는 거금을 손에 쥐고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혼자서 버스를 타고 청계천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비싸서 전부 사지는 못했지만 대략 대여섯권 살 수 있었고, 집에 와서 책을 펼쳐본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보았던 <도전자 허리케인>이, <바벨 2세>가, <태풍을 쳐라>가, 아니 소년 잡지에 별책부록으로 보았던 만화들 대부분이 일본 만화였다.
그날 이후 나는 일본 책을 파는 서점이 늘어서 있던 명동의 달러골목으로 진출하여 일본 소년만화 잡지 <소년 매거진>과 <소년 선데이> <소년 점프> <소년 챔피언>을 사보면서 이것도 저것도 일본 만화를 베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정부와 어머니가 눈에 불을 켜고 불량하다 낙인찍은 만홧가게의 만화들 중 일본 만화를 대놓고 베낀 만화들은 없었다. 반면 부모님이 안심하고 보게 하는 소년 잡지의 별책부록 만화들은 대부분 트레이싱페이퍼를 일본 만화 원본 위에 대고 베껴 그린 만화들이었다. 여하튼 소년 잡지의 별책부록 만화 중 나와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기 있었던 것은 <도전자 허리케인>과 <태풍을 쳐라>였는데, 두편의 만화 원본이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이고 원작자는 가지와라 잇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불태워 완전연소를 해야 할 곳
불룩한 배를 뻔뻔하게 내밀고 사나운 불도그 같은 얼굴에 눈동자를 가린 짙은 안경, 깃 넓은 와이셔츠, 회색 양복을 입은 야쿠자 중간 보스 그 자체인 사내. 흉물스런 사내 가지와라 잇키의 얼굴 사진은 소년 잡지의 말미 죄담이나, 인기 작가 인터뷰 같은 코너에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여 그가 만든 만화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불쾌해지기까지 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일본 소년 잡지에는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 <공수 바보일대> 등 항상 그의 만화가 연재되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역시 <애와 성>이라는 학원 폭력 만화가 있었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슈퍼스타 레슬러 열전> <신 거인의 성>이 연재되고 있었다. 그는 70년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1999년. 촬영장에서 미술부 막내가 만화를 보고 있다가 나에게 걸렸다. 그가 보고 있던 만화는 <허리케인 죠>. 내가 20여년 전 보았던 <도전자 허리케인>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정식발매된 것이었다. 미술부 막내를 붙잡아놓고 내가 이 만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30여분 동안 늘어놓았고, 나의 장광설을 듣다 지친 미술부 막내는 오덕 아저씨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일 핑계로 도망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줄행랑을 놓다가 문득 돌아보니 나의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그날 밤 내 방으로 <허리케인 죠> 1권부터 5권까지 다섯권을 선물이라며 주고 갔다.
<도전자 허리케인>을 보았던 70년대의 독자들과 원작 <내일의 죠>를 알고 있는 90년대의 독자 모두를 겨냥하여 제목을 만든 <허리케인 죠>를 다시 보았다. 마지막 권. 마지막 라운드를 위해 링 중앙에 선 죠의 클로즈업 장면. 만화를 그린 지바 데쓰야가 굵은 대나무 펜으로 거칠게 그린 초점 없는 죠의 두눈. 그 눈을 본 나는 쿵 하고 가슴이 저 심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30대 말의 아저씨인 나는 주인공이 하얗게 불타서 링 위에서 죽는 이 허풍스런 이야기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다. 10살 소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0년대 말 <타이거 마스크>로 전성기를 시작하여 70년대 초 <소년 매거진>에서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 두편을 동시 연재하며 정점에 올랐던 만화 원작자 가지와라 잇키. 1987년에 죽은 그는 80년대 들어서면서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밥상을 뒤엎으며 소년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은 개그만화에서 하도 우려먹어 신선하지도 않고, 그래도 금단의 대상이었던 <내일의 죠>도 90년대 들어 <이나중 탁구부>의 주인공 이자와에 의해 놀림을 당하고 만다. 이제 그의 원작은 잊혀지고, 패러디 결과만 유령처럼 짤방으로 인터넷의 유머 게시판을 떠돈다.
그뿐이라면 다행이다. 그는 1975년 <애와 성>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타는 영광을 기점으로 스캔들 메이커가 된다. 유명 여배우와의 스캔들, 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 감금 폭행 사건, 격투기 승부 조작 사건, 압둘라 더 부처 스카우트 배후. 고단샤 편집장을 폭행하여 형사입건되어 실형을 산 것 등. 가정에서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이혼한 전처와 그의 딸에 의해 폭로되었다. 오죽했으면 딸이 아버지 가지와라 잇키를 변태라 비난했을까. 그의 작품들도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뻔뻔하게 우려먹는 축소 재생산이라 평가된다. 폭군, 협잡꾼으로 그의 명성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황소 같은 정력가의 몸은 교도소 출소 후,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 병색이 완연한 시꺼먼 얼굴이 되어버린다. 그 후 자신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듯 나이 어린 여자와 재혼을 한 결혼사진을 보면 안간힘을 쓰고 자신을 치장했지만 이미 끝났다는 것을 하얀 양복으로 감싼 몸이 웅변하듯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비상식적 인간으로 낙인찍혀 사라졌다.
추운 겨울날. 한 소년이 더블백을 둘러메고 여인숙이 즐비한 도쿄의 빈민가로 걸어 들어온다. 천성적으로 트러블 메이커인 소년은 여인숙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일으킨다. 이 악동 소년은 경찰에 취조를 당하며 부모들이란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놓고는 달아나버린 자들이라 한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소년이다. 그의 싸움 실력에 반해 권투를 권유하는 자는 술에 취해 공원 벤치에 늘어져 있던 외눈박이 알코올중독자다.
아무것도 없고 세상에 대한 원념만이 가득한 소년은 자신을 비웃는 강하고 멋있는 적을 만들어놓고 그와 싸우기 위해 권투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기술을 익히고 훈련을 해야 하는데 주인공 야부키 죠는 그럴 생각이 없다. 내일을 향해서라는 감동적인 쪽지 권투 수업은 단 세 차례로 끝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호사가인 재벌 딸의 눈에 들어 날개를 단 실력자 리키이시에게 무모한 도전을 한 끝에 죽도록 얻어맞다가 필살기인 크로스 카운터로 무승부를 이뤄낸다. 주먹의 위력과 투지를 제외하고 야부키 죠에겐 아무것도 없으니 자살적인 필살기 하나만으로 싸움을 하는 것이다. 리키이시 역시 멋대로인 야부키 죠를 끊임없이 도발하고 급기야 무리한 감량을 하고 죠와 싸워 죽음에 이른다. 무리하게 제 몸을 학대하여 싸움을 벌이려는 사내들. 죠는 그렇게 자신과 싸운 상대들을 진정한 친구라고 부른다.
<내일의 죠>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한국인 선수와의 대결이다. 한국인 선수는 야부키 죠 따위는 근성에서 자신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은 한국전쟁 때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서 음식을 빼앗기 위해 그를 돌로 쳐죽였는데 죽은 자는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고 탈영했다가 기진맥진하여 진흙탕에 빠져 기절한 아버지였다. 그는 야부키 죠에게 너는 권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나의 지옥에 비하면 권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야부키 죠는 패닉에 빠진다. 한국인 선수에 비해 자신의 원념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시합을 하며 야부키 죠는 자신에게 권투는 친구 리키이시와 목숨을 걸고 대결한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 즉 하얗게 자신을 불태워 완전연소를 해야 할 곳이라 깨닫게 된다. 권투를 통해 친구를 만들고 권투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완전연소해버리려는 주인공.
일본 파시스트들의 나르시시즘과 역도산을 존경하는 마음 사이
<내일의 죠>와 동시에 연재된 <거인의 별>에서도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투수를 하기에 모자란 작은 키를 가진 주인공 휴마는 실패한 전직 야구선수인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특훈과 강철 스프링이 달린 완력기를 차고 연습하지만 신체의 한계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무리하게 뭔가를 만들어낸 것이 죠의 크로스 카운터와 같은 마구다. <타이거 마스크>의 주인공 나오토는 악역 레슬러 양성소인 호랑이굴에서 반칙만을 배웠다. 호랑이굴을 배신하고 정통파 레슬러가 되고 싶은 그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기본을 반칙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정통파 레슬러의 기술이 없는 그가 찾아낸 것은 겨울 산에서의 특훈 중 곰과의 대결을 통해 터득한 필살기 울트라 타이거 드롭이다.
크로스 카운터를 성공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주먹을 맞아야만 했던 야부키 죠는 펀치 드렁크에 걸리게 되고 권투선수의 신체로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휴마 역시 마구를 던지기 위해 무리하게 근육을 사용한 결과 어깨근육 파열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타이거 마스크는 어떤가? 정통파가 되려고 반칙 기술을 저 밑바닥으로 봉인시켜버렸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을 길러준 호랑이굴의 두목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그레이트 더 타이거와의 대결에서 그레이트의 최고 난이도의 반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급기야 마스크가 벗겨져 그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민낯을 드러내고, 찢어져 너덜거리는 자신의 타이거 마스크를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봉인해두었던 악랄한 반칙, 그것을 가르쳐준 아버지마저 대항하지 못하는 악마의 반칙으로 링 위에서 아버지를 교수형시켜버리고 링에서 도망치고 만다.
가지와라 잇키 만화의 주인공들이 매혹적인 것은 남에게 설명될 수 없는 지독한 원념을 가진 주인공들이 그 원념을 하얗게 완전연소시키는 해방을 꿈꾸다 육체와 정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거꾸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말년 작품으로 인상 깊게 본 만화가 <인간 흉기>이다. 전성기 때에 비해 형편없이 거칠고 빈약한 이야기 전개로 실망스러웠던 작품이다. 야부키 죠의 성인판 같은 가라테 만화의 주인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극한의 무뢰한이다. 그는 자신의 가라테 스승 대산배달을 야비하게 조롱하고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꾸민다. 그 역시 재능은 있지만 성공하기에는 심성이 메마르고, 황량하다. 더구나 최고가 되기에 그는 뭔가가 모자라고 실력을 연마하려는 의지도 노력도 별로 없다. 오직 그는 남을 원념하는 비비 꼬인 마음을 연료로 삼아 야비한 술수와 배신을 일삼으며 자신을 완전연소시키려다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가지와라 잇키의 만화를 보다보면 일본 제국주의의 가미카제 특공대가 떠오른다. 하얗게 불타버리는 것. 그것은 기득권들이 청년들을 죽음에 몰아넣으며 외치는 명분이 아니던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가진 것도 없고 실력도 없으니 미국과 같은 강자와 맞서기 위해서는 근성과 필살기, 즉 돌격 정신과 특공대 정신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은 패배를 하고 말았다. 가지와라 잇키 만화의 어두운 바닥에는 패전에 의한 결핍이 있다. 패망한 조국을 가진 황소 같은 정력의 사나이가 그 결핍을 밑천으로 소년만화에 뛰어들어 일본 제국의 몰락에 대해 거창하게 원념이니 근성이니 하며 떠벌린 허풍이 아닐까?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70년대 초 황혼녘의 일본 전공투들이 감정이입한 것은 맞고 또 맞아서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일어나는 야부키 죠였다. 그들은 결국 적군파가 되어버린다. 60년대 말 동경대 점거 사건 당시 전공투가 윤리적으로 정점이었을 때, 그들이 좋아한 만화는 가지와라 잇키류의 결핍과는 무관한 천방지축 주인공의 ‘학생판 <수호지>’인 <사나이 카키 대장>이었다.
가지와라 잇키 만화에는 일본 파시스트들의 나르시시즘이 짙게 배어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만화는 파시스트들의 회한이 녹아 있는 쓰레기인가?
가지와가 잇키가 가장 흠모하고 자신의 만화 주인공의 근간으로 생각한 모델은 역도산이다. 역도산을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한 만화가 <타이거 마스크>와 <내일의 죠>이다. 근본을 알 수 없는 떠돌이 주인공. 그런 자가 정상에 서기 위해 하는 무리한 짓들. 그리고 파멸. 역도산의 생애와 비슷하다. 강한 남자들에게 매료되어 그들에 대한 이야기만을 줄기차게 한 가지와라 잇키에게 단 하나의 구원은 그가 재일조선인 역도산의 삶에 매혹되어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가 역도산을 존경하는 마음은 죠의 라이벌이며 단 한명의 친구를 역도산(=리키도잔)과 비슷한 이름의 리키이시로 만들어 죠에게 죄의식을 부여하고 결코 권투계의 기득권에 있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게 한다. 주인공의 과거와 결핍은 차별과 무시, 조롱의 대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면서까지 뭔가를 하려는 주인공들을 그렸던 만화가. 딱 여기까지가 가지와라 잇키 만화가 위대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