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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현의 유쾌한 판타스포르투 영화제 기행 (1)
2002-03-15

민동현 감독, 꿈에 그리던 판타스틱영화제에서 좌충우돌 26일을 보내다

“Oh! my God!”

파리공항을 거쳐서 무려 14시간가량의 육중한 시간을 버텨내며 도착한 포르투갈의 포르투공항. 설레던 마음도 잠시뿐, ‘택택’거리며 힘겹게 돌아가는 컨베이너 위의 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공항의 분주하던 사람들도 차츰 사라져갈 때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 ‘혹시? 내 짐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 순간, ‘덜커덩’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멈춰서는 컨베이너. 아앗앗! 신이시여 아니되옵니다. 그러나 가차없이 내리쳐지는 신의 매서운 손. 그 손에 비참히 나가떨어지고 마는 서글픈 나. ‘으흐흐흑….’ 함께 짐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공항사무실에서 어눌한 영어로 열심히 짐 찾는 신고를 접수한 뒤, 어쩌면 내일 찾을 수도 있고 아니면 며칠 걸릴지도 모른다는 전혀 위로가 안 되는 공항직원의 말을 듣고는 힘없이 터벅터벅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저 멀리서 하얀 종이 위에 쓰인 내 이름이 보였다. 순간, 눈물이 막 터져나올 듯한 격한 심정. 이렇게 힘들 때 내 이름 하나라도 적어들고 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영화제 스탭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내가 묵을 시내 중심의 호텔에 도착했다. 일단 짐은 내일 다시 공항에 가서 확인해보고 혹시 못 찾게 되면 영화제쪽에서 짐을 수소문해 주기로 하고는 대충 맘을 진정시키고 방으로 올라갔다. 유난히도 큼직한 방에 들어가서 지갑, 다이어리, 여행책자가 전부인 나의 단출한 짐을 풀고 나니 더욱 서글퍼졌다. 잠옷도 없어서 입고온 옷을 그래도 입은 채 침대에 눕는데, 스물일곱 성숙한 나이에도 부모님 생각이 나는 것이 꼭 군대 훈련소 침대에 누운 기분이었다. ‘아, 신이시여! 내일은 꼭 짐 좀 찾게 도와주소서!’

돈키호테가 되어 떠난 여행

다행히 다음날 공항에 가보니,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 사실 떠나기 전 무려 3주에 걸쳐서 포르투갈 및 스페인 지역의 각종 여행정보들을 치밀히 검토 분석하여 나름대로 영화 콘티처럼 여행 콘티라고 이름붙인 상세한 여행 계획이 있었는데, 짐을 찾고나니 그렇게 꽉 짜여진 여행이 무의미해져버렸다. 전날의 짐을 잃어버렸던 사건 하나만으로 너무 맘고생을 해서인지, 편히 쉴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졌고, 정처없이 떠나는 그런 감성적인 여행을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는 “I want to know portugal”이라는 정확한 영어인지도 모를 말을 내뱉고는 포르투갈 각 지방의 여행정보를 담은 책자들을 받아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어제 못한 양치질도 좀 하고, 15일 정도 돌아다닐 옷과 짐들을 배낭에 챙겨넣고는 책자를 펴보니, 코임브라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어한다는 대학도시로 전에 여행책자에서 본 듯도 하고, 무엇보다 차분하게 생긴 것이 왠지 그곳에 가면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무작정 떠난 여행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를 거쳐 팀 버튼 영화와 어울릴 듯한 묘한 성이 있는 자연공원 부사코,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소박하고 아담한 아름다운 도시 리스본, 동화책 속 공주가 지난주까지 살았을 것 같은 신트라, 이전에 모 회사의 초코바 광고에 나왔다던 대서양의 끝 로카곶, 그리고 해변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달려갔지만, 기대했던 모래해변이 아닌 무식스런 돌해변이 기괴하게 펼쳐져 있던 카스카이스 등을 지나 스페인으로 잠시 넘어가서는 아랍문화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본 뒤, 그나마 소피아 미술관과 프라도 미술관 덕에 보람찼을 뿐 그외에는 볼 것이 없었던 마드리드, 그리고 모든 거리와 골목들이 내 맘에 쏙쏙 박혀서는 필름 서너통을 금세 써버렸던 옛 스페인의 수도 톨레도를 지나 다시 영화제가 열리는 포르투로 돌아오면서 15일간의 대장정은 끝이 났다.

태어나서 이렇게 긴 기간 동안 혼자 여행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힘들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느낀 것도 많았고 배운 것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수확은 여행중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리스본에서 만난 일본인 잡지 편집장, 세비야에서 중국집 어디냐고 물어보다가 우연히 만나서는 음료수까지 얻어먹으면서 함께 <디 아더스>와 여러 스페인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던 영화과 학생,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포르투로 오는 밤기차에서 밤새 비틀스 노래도 함께 부르며 여러 이야기들도 함께 나누었던 스페인 시인 아저씨 등 내 짧은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느낌을 공유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TV드라마 <상도>를 보면 진정한 장사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버는 것이라는 만상의 철학이 나오는데, 여행도 해보니 그런 것 같다. 여행에서 적은 돈으로 많은 것을 짧게 보고 오는 것보다는 적게 보더라도 그리고 조금 돈을 덜 아끼더라도, 그곳 사람들과 뭔가 교감할 수 있는 여행, 그리고 돌 하나라도 마음속에 담아올 수 있는 여유있는 여행이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영화제도 어떤 면에서는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로 각자 다른 환경과 생각으로 만들어온 자신들의 영화를 영화제라는 낯선 공간에서 여러 환경의 사람들을 만나서 풀어놓고 공유할 수 있는 장이니 말이다. 뭔가 살아가면서 느낌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감독들은 영화제에 가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오는 것일 게다.

아! 판타스틱 월드여!

드디어 오랜 외로움을 지나서 영화제에 도착했다. <지우개 따먹기>로 다녀왔던 3번의 영화제는 모두 영화제에서만 지낸 터라 항상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는데, 이번에는 영화제 전에 포르투갈이란 나라를 며칠간이나마 돌아다닌 터라 조금은 여유롭게 영화제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시험볼 때도 미리 가서 그 시험장의 분위기와 느낌을 충분히 몸에 받아들이고 나서 시험을 친다고 하지 않은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공간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는 뭐 그런 말이다.

어떻게 보면 판타스포르투는 나에게는 꿈에 그리던 영화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우개 따먹기>를 만들었을 때도 그리고 이전의 16mm영화 `SUN.DAY`를 만들었을 때도 가장 가고 싶었던 영화제는 판타스틱영화제였다. 물론 <외계의 제19호 계획>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영화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창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현실의 빛을 투과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창조해내는 프리즘이 영화라는 신념으로 줄기차게 판타지영화들을 응원해온 판타스틱영화제야말로 ‘ET’가 좋아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고, ‘스타워즈’에 미쳐서는 연습장에 온통 갖가지 우주괴물들을 그려댔던 나에게 동경할 수밖에 없는 영화제가 아니겠는가?

영화제의 주요 상영관인 리볼리는 포르투 시내중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큰 규모의 건물에 대극장 하나와 소극장 하나가 있고, 조그마한 카페 겸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레스토랑 한곳, 뭐 이렇게 매우 소박한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22년간이나 영화제를 이끌어온 영화제 사무실이 그저 대극장의 2층 복도 구석에 자리한 조그마한 사무실 하나라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상영사고를 내지 않고 어떠한 잡음없이 영화제를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여러 영화제들도 본받아야할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