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미국, 일본, 중국, 북한, 러시아가 익숙한 우리로서는 너무나 생경한 나라다.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가? 심지어 철자도 생소하다. C-Z-E-C-H. 중국 요리, 태국 요리, 프랑스 요리는 들어봤어도 체코 요리는 못 들어봤다. 폼 잡으려고 카프카 소설을 읽어봤고, 빨갱이 코스프레를 하려고 카렐 코시크(<구체성의 변증법>)를 읽어봤을 뿐이다. 체코영화는 어릴 때 예고편으로만 본 <프라하의 봄>이 전부다. 영화보다는 오히려 체코 데스메탈(멜랑콜리 페시미즘)과 개막장 고어 그라인드 밴드들(지그-아이, 스패즘)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말 다했다. 그러나 체코는 의외로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지닌 나라다. 서유럽과 동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시달리기만 했던 것도 비슷하고,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나치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것도 비슷하다.
체코 인형극은 바로 그 식민지배 시절의 문화적 자구책이었다고 한다. 식민통치가 시작되고 독일어 사용이 강요되자, 체코인들은 체코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형극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당시 인형극에서만큼은 체코어가 허용되었다고 하니). 마리오네트 놀이가 그들에겐 자신들의 언어와 정신을 지켜내기 위한 필사의 교육이자, 목숨을 건 발버둥이었던 셈. 식민통치 시절에는 그 나라 정부도 괴뢰 정부였을 테니(‘괴뢰’(傀儡)-즉 꼭두각시 혹은 마리오네트), 괴뢰국(傀儡國)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괴뢰극(傀儡劇), 비장한 자구책이 아닐 수 없다. 괴뢰는 괴뢰로 다스린다, 이열치열, 아니 이뢰치뢰.
악몽을 종합한 거장, 얀 스반크마예르
인형극의 전통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그리고 이것이 내가 체코영화에 대해서 아는 거의 전부다). 그것은 마리오네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괴뢰영화들이다. 실제로 이 영화들에선 영화배우들이 나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그려서 만든 만화도 아니다. 이 영화들은, 말 그대로 괴뢰들을 한땀 한땀 동화시켜서(animated) 만든 마리오네트영화들이다. ‘스톱모션’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기법은 실로 엄청난 고생, 고통, 고뇌를 요하는 인고의 작업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인형을 작게 제작된 디오라마 세트에 고정시켜놓고, 관절들을 한땀 움직이고 카메라로 한장 찍고, 또 미세하게 한땀 움직인 다음에 또 한컷 찍고 해서 연속된 동작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모르긴 몰라도 하루 종일 작업해 한 1~2분 나오려나? 그나마 중간에 조금이라도 실수할 경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헐). 요즘같이 컴퓨터그래픽(CG)으로 싹 닦아버리는 시대에 골방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이 엄청난 인내와 고통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왜 저 고생일까. 분명한 한 가지는, 스톱모션이 그들에게 있어서 단지- 이야기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스톱모션은, 죽은 괴뢰를 살려내는 제의와도 같은 작업이었고, 그래서 영화를 하는 목적, 그 자체였다. 마치 죽은 (최소한 죽은 듯 침묵해야 하는) 체코의 영혼을 되살려내는 교령의식처럼 그들은 괴뢰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웠고 또 끊임없이 춤추게 했다.
먼저 창시자 격인 트른카(Trnka)와 틸로바(Tylova)가 있다. 트른카(그리고 그의 공동작업자인 브르데카, 포야르 등)는 바람, 물결, 불과 같은 자연의 진동들을 스톱모션으로 표현하는 데에 매우 능수능란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옷이나 머리카락, 흔들거리는 불꽃이나 그림자, 물결치는 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 등을 표현한 그의 스톱모션을 보고 있노라면, 웬만한 CG에도 안 놀라는 지금에 봐도 경이로울 지경이다(<베이스 첼로 이야기> <대초원의 노래> 등). 물론 틸로바도 자연을 다루었으나 그녀의 관심사는 좀더 유연한(여성적인) 파동이었다. 틸로바는 주로 천, 실과 같은 섬유선형체를 다루었다. 그녀는 그 매듭을 관절로 삼고서 흐느적거리는 손수건을 마리오네팅했으며(<손수건 매듭>), 털실 뭉치나 실이 감기거나 풀리고 심지어 엉키는 복잡한 움직임을 스톱모션으로 구현했다. 물론 틸로바의 영화들 역시 아동 관객을 겨냥한 교훈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 엉키거나 풀리는 스톱모션은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로 놀라운 이미지였다. 즉 아동들을 위한 교육영화라기엔 지나치게 경외스러운 게 트른카와 틸로바의 작품들이다. 카렐 제만(Karel Zeman)은 더 나아간다. 그는 아예 대놓고 꿈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이게 또 경외다. 제만의 세계는 얼음결정체와 같은 크리스털 혹은 유리와 같은 투명체다. 때로는 흐릿하여 건너편이 왜곡되고 굴절되어 보이지만, 결국은 맑디맑아 속이 훤히 내비치는 그런 투명한 꿈처럼(실제로 제만이 실사합성영화로 전향했을 때도, 그가 계속해서 참조했던 것은 그래서 조르주 멜리에스와 쥘 베른이었다). 트른카와 틸로바가 여전히 대지에 서있고 중력에 사로잡혀 있다면(바람도 땅과 하늘이 있어야 부는 거 아닌가), 제만은 이젠 아예 한없이 가벼워져 공중부양하는 무중력 상태에게로 빠져든다. 아름답기만 하냐고? 난 아직도 몸서리쳐지는 한 장면을 기억한다: 빙상 위를 미끄러지는 유리공주에게 구애하던 홀씨왕자를 가로막던 그 얼음벽을, 그리고 빙벽을 통해서 아련하게 멀어지던 유리공주를. 투명한 것은 가끔은 꿈을 가로막는 빙벽이기도 하다(<영감>).
이러한 경외를 말 그대로 정치적 메시지로까지 마구 밀고 나가는 막가파 작가들도 물론 있었다. 이리 바르타(Jiri Barta)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명작 <버림받은 자들의 밀실>. 폐기처분된 마네킹들이 폐허가 된 건물에 모여들어 되지도 않는 소통을 해본답시고 서로 알 수 없는 손짓발짓 신호를 주고받다가(물론 전혀 죽이 맞지 않는다), 술과 약에 절어서 끝내 다 함께 파괴되고 공멸하는 괴이한 우화(딱 한국 상황 아닌가- 김선 감독이 이후에 <철의 여인>과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를 만들 때 이 영화를 참조했다나 뭐라나). 이건 자멸의 악몽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악몽을 종합한 거장이 있으니, 그게 바로 바로 바로 얀 스반크마예르(Jan Svankmajer)다. 체코 초현실주의 그룹의 선봉대장이었던 그는,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적 이미지 속에서도 언제나 현실비판을 놓지 않았던 반골 작가이기도 했다. <펀치와 주디> <자버워키> 같은 전통 괴뢰극 영화로 시작했지만, 전성기 시절에 그를 사로잡은 주제는 바로 부패다(헐…). 썩어 문드러져가는 음식이나 신체를 비장할 정도로 공을 들여서 구현해낸 그의 작품들은, 저게 모형이고 찰흙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고 봐도, 그리고 관람 내내 그 사실을 되뇌어봐도, 정말 역겨울 정도로 생생하다. 거기다 그는 더 괴상한 생각을 보태게 되는데, 그것은 ‘부패는 전염된다’는 실로 괴뢰스러운 생각이다. 부패가 전염된다고? 먹어치운다는 것, 그리고 소화시키고 배설한다는 것이 이미 그렇다. 이로부터 그의 완숙한 두개의 명작(?)이 나오게 된다. 팔이 눈을 먹더니, 머리는 다시 팔을 먹고, 머리는 뇌를 먹고서 인간을 싸질렀더니 좁은 방에 갇히게 되었다는 괴상망측한 우화(<어둠 빛 어둠>)와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두 머리가 대화를 하다가 서로를 먹어치우고, 심지어 다른 머리를 토해내는 더 괴상망측한 우화(<대화의 차원>). 스반크마예르에게 어떠한 생성도, 사실은 부패와 소화와 같은 소멸의 과정 속에 있는 셈이다. 이즈음에서 궁금해진다. 이 괴이하기 짝이 없는 교훈, 즉 태어난다는 것은 존재를 싸는 것이고, 말한다는 것은 언어를 구토하는 것이라는 이 교훈을, 스반크마예르는 정말 체코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체코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에 먹혔고 괴뢰 정부는 그 배설물이라는 것을 아동들의 무의식에 심어주기 위해서?
<암살>과 <그리고 싶은 것>의 차이
분명한 것은, 이 작가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작품들을 교육용이라고 자부한다는 사실이다. 단 그것은 단지 산 자가 지식을 가르쳐주는 식의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스반크마예르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사물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즉 죽어서 침묵하는 괴뢰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식의, 그리고 산 자들은 그 고요하고도 불가해한 증언을 경청하는 식의 교육이다. 체코 괴뢰 작가들은 디즈니의 더빙을 맹비난했다. 더빙은 괴뢰들의 목소리와 방언을 살아남은 특권자들이 빼앗아 가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차라리, 산 자들의 기억을 따라 읊는 것보다는 죽은 자들의 몸짓과 춤을 경청하는 게 역사를 잊지 않는 더 좋은 (교육적) 방법인 거다. 광복 70주년. 한편에선 <암살>이 천만 흥행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고 싶은 것>(감독 권효, 2012)이 늦은 시간 <KBS 독립영화관>에서 방영되고 있을 때, 난 왜 머나먼 체코 애니메이터들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위안부 여성을 그려보려는 한 동화작가(권윤덕 작가)의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즉 정보와 사실을 바탕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와 연민을 극화시키는 것이 좋은 교육일까, 아니면 침묵과 상실을 바탕으로 그 가슴이 이미 썩어 문드러진 망자들의 몸짓과 꿈을 경청하는 것이 좋은 교육일까. 어느 것이 그냥 흘러가버릴 수 있는 지금을 잠깐이라도 정지시킬 수 있는, 더 좋은 스톱-모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