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적 지식인이기를 자처하는 강준만 교수는 그의 독창적인 무크지 <인물과 사상>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힌 이른바 ‘패거리 문화’에 대해 끊임없는 공격을 가해왔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조리들이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결속된 비이성적 패거리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 즉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 패거리의 존재에 눌려 그 패거리에 끼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주장에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패거리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군림하고 있는 상황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은 과연 그런 패거리 문화라는 것이 우리 사회만의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최소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패거리 문화에서 미국도 더하면 더했지 우리보다 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분상의 계층이 사실상 존재하고, 상류 계층일수록 패거리를 만들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끌어가는 것이 미국의 일반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 교육을 이수하거나 사업에 성공하거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스타가 되거나 해서 그 계층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이들의 수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두터운 계층의 벽을 일순간에 뛰어넘은 이들의 경우 더욱더 자신들만의 패거리를 만드는 데 열중하게 마련인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60년대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풍미했던 이른바 ‘랫팩’이라고 할 수 있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변의 친한 배우들과 자주 모이는 데서 유래한 ‘랫팩’은, 험프리 보가트의 부인이었던 로렌 바콜이 지어준 이름이다. 밤새워 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이들을 보고 “당신들 마치 쥐떼(rat pack) 같군요!”라고 했던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 뒤로 그들 패거리를 부르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 하지만 험프리 보가트가 죽고나서 프랭크 시내트라가 총대를 메고, 딘 마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조이 비숍, 피터 로포드를 이끈 이후부터 ‘랫팩’의 진짜 전성기는 시작되었다. 랫팩은 60년대 초중반의 전성기를 라스베이거스에 있던 샌즈호텔의 나이트클럽에 자주 모여 춤과 노래와 코미디와 퍼포먼스가 뒤섞인 자신들만의 공연을 가지며 유명세를 이끌어나갔다.
또한 이번에 스티븐 소더버그에 의해 리메이크된 60년작 <오션스 일레븐>과 64년작 <Robin and the Seven Hoods> 등에 함께 출연하면서 패거리의 위용을 과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5명 모두가 케네디의 각종 홍보물에 아낌없이 출연했을 뿐 아니라, 프랭크 시내트라의 경우에는 아예 선거 캠페인송인 <High Hopes>를 불렀을 정도. 또한 랫팩은 당시 LA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의 전당대회에 절친한 친구였던 셜리 매클레인까지 데리고 나와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당시 샌즈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오션스 일레븐>의 촬영과 공연을 병행하고 있던 랫팩을 보기 위해 선거전이라는 바쁜 와중에도 케네디가 나타났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물론 이런 랫팩의 정치 참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 정치와 엔터테인먼트와 스타의 연결 고리의 시초가 됐다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영원할 듯이 위용을 떨치던 랫팩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집권 이후 케네디와 시내트라의 관계가 우선 틀어졌고, 이어 시내트라와 피터 로포드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60년대 후반부터는 서로 소원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랫팩의 그런 패거리문화는 훗날 지속적으로 모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이른바 브랫팩(Brat Pack)이다. 랫팩과는 달리 구성원이 불명확하고 그만큼 그들 사이의 결속력이 느슨한 것은 사실이지만, <블랙퍼스트 클럽> <세인트 엘모의 열정> 등에 출연했던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앤서니 마이클 홀, 앤드루 메카시, 데미 무어, 저드 넬슨, 로브 로 등을 언론과 팬들은 브랫팩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들 중 훗날 특급 스타로 명맥을 유지한 이는 데미 무어밖에 없었지만, 당시 그들의 인기는 과거 ‘랫팩’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 90년대 들어와서는 영국영화의 부흥을 이끌고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이완 맥그리거, 주드 로, 조셉 파인즈, 앨런 커밍 등을 일컬어 브릿팩(Brit-Pack)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렇게 시대를 풍미하는 젊은 스타 패거리들을 가리키는 접미사로 의미가 확장된 ‘팩’이 마지막으로 부활한 것은 99년작 <윙 커맨더>에 프레디 프린즈 주니어, 매튜 릴라드, 새프런 버로스 등이 출연한 것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 뉴 브랫팩이라고 불렀을 때였다. 중요한 것은 랫팩이 브랫팩과 브릿팩을 지나 뉴 브랫팩으로 오는 동안, 패거리로서의 결속이 많이 흐려졌다는 사실. 스스로 좋아서 뭉친 패거리가 아니라 언론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패거리가 되면서, 강력한 패거리에서 보이는 어떤 위력이 점점 약해지게 된 것이다. 이번에 개봉된 <오션스 일레븐>에서 ‘유사’ 랫팩의 구성원들이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저한 할리우드 상업영화로서의 재미와 완성도에 비해 거대한 스타 5명이 함께 보여주는 연기에서 별다른 매력이 느껴지지 않은 점을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철민/인터넷 칼럼리스트chulmin@hipop.com
Biography.com의 랫팩 페이지 http://www.biography.com/features/ratpack/
E! online의 브랫팩 페이지 http://www.eonline.com/Features/Features/Bratpack/
<오션스 일레븐> 공식 홈페이지 http://oceans11.warnerbros.com/
그림1: <오션스 일레븐> 공식 홈페이지
그림2: 랫팩의 멤버들. 왼쪽부터 프랭크 시내트라, 딘 마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피터 로포드, 조이 비숍.
그림3: 브랫팩 멤버들이 대거 출연했던 <세인트 엘모의 열정>.
그림4: 랫팩 멤버들이 모두 출연했던 60년작 <오션스 일레븐>의 DVD 재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