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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스파이크 리 감독의 <버스를 타라>
2002-03-14

버스는 토론을 싣고

Get On The Bus 1996년, 감독 스파이크 리 출연 찰스 더튼 <EBS> 3월16일(토) 밤 10시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는, 세상이 움직일 때다. 움직이는 자동차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 온갖 혼탁함과 세계의 실체는 잠시 흔적을 감춘다. 영화는 밤의 풍경을 비춰보인다. 모든 것은 어둠에 묻혀 있고, 거리의 불빛은 흘러다닌다. 버스 안의 승객은 지도를 펼쳐보면서 위치를 확인한다. 우리는 지금 어딜 지나고 있을까?

<버스를 타라>는 로드무비다. 영화는 1995년 실제로 있었던 흑인들 집회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 각지의 흑인들이 그들의 우정과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고, 도중에 온갖 회의와 의견대립을 겪는다는 것.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차에 탄 스무명의 승객은 직업이 갖가지다. 운전사, 영화과 학생, 해고 노동자 등으로 각기 처한 상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스쿨 데이즈>와 <똑바로 살아라> 등의 대표작에서 그랬듯, ‘우리는 흑인이되 필연적으로 서로 다르며 개인은 인종문제를 뛰어넘어 개인일 뿐이다’라는 신념을 전한다.

<버스를 타라>의 초반부는, 활력이 넘친다. 때깔 고운 화면과 신나는 음악은 영화에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길을 떠난 승객은 처음엔 거의 놀러가는 기분으로 여흥을 즐긴다. 한 사람씩 랩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다른 승객은 중간중간 “예! 예!”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운다.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다 싶으면 휴식을 취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여기까지 영화는 별 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상업영화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차츰 감독의 시선이 개입한다. 인종과 역사, 미국의 현재에 관한 토론과 약간의 욕설이 오가면서 <버스를 타라>의 승객은 진지한 대화를 시작한다. 흑인끼리 대립하고 미움을 간직하는 상황도 연출된다. 다큐멘터리 흉내도 끼어든다. 영화에서 UCLA 영화과에 다니는 학생은 차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다. 때로는 인터뷰를 하면서, 묵묵히 타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면서. 스파이크 리 감독은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대신, 캐릭터의 생생함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할리우드영화에서 익히 만날 수 있던 흑인 캐릭터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는 스파이크 리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점이다. 영화를 위해 가공한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 카메라를 향해 걸어온 이들 같은 것.

<버스를 타라>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스파이크 리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흑인 스타들에게 후원을 받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대니 슬로버, 웨슬리 스나입스, 윌 스미스 등이 주머니를 털어 200만달러의 제작비를 선뜻 보태주었다. 영화는 1990년대 중반 무렵 슬럼프의 기미를 보이던 스파이크 리에겐 재기작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면 곳곳에 스며 있는 에너지와 보는 이의 몸을 움직이는 영화음악, 그리고 정치적 색채 짙은 대사들은 재기가 번득인다. 스파이크 리가 미국영화에서 여전히 영향력 있는 존재이자 재능이 풍부한 흑인감독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