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연애중>은 2002년 현재 28살이 된 75년생, 94학번(한명은 재수해서 95학번) 여자들, 윤호정(채림), 강수지(이의정), 강차희(최윤영)의 과거를 따라간다. 이 과거란 연애사건들이다. 이 드라마에는 순간적 사랑,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꽝’이었어” 사랑, “‘꽝’이기를 바랐는데 ‘봉’인” 사랑, “내가 주인공인데 너는 왜 나를 멀리하는 거니” 사랑만 있다. 사랑을 세월이 찾아주고 운명적 사랑에는 퇴짜를 놓는다. TV의 모든 드라마의 주제는 사랑이지만 주로 나오는 것은 운명적 사랑, “한눈에 반해서 영원토록 만날 거야” 사랑,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봉’이었어” 사랑이다. 그래서 <지금은 연애중>으로 남자와의 이력서를 제출한 이 여자들은 특별하다.
윤호정: 헤픈 여자
한 인간을 죽도록 사랑한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을 가볍게 사귀었다고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건 쉽고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인간적 결함을 지닌 것은 아니다. 호르몬 왕성한 시절엔 딱 한달용 사랑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특별했는데 한달만 지나면 그 사람의 입 속의 빨간 잎∼ 고춧가루가 보이는 거다.
세 여자들 중 강수지는 초반 친구의 남동생에게 마음이 가지만 통신으로 만난 남자와의 번개가 잘되기를 기대한다. 강차희는 원래 남자 후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누구보다 수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윤호정이다(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선 대개 ‘Falling∼’ 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쉽게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시 ‘Falling∼’ 해버린다. 그렇게 해서 ‘Falling∼’ 한 남자들은 한결같이 시원찮다. 파쇼적이다가 스토커로 돌변하기도 하고 결혼한 남자이기도 하고 진실한 사랑 없이도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이기도 하다.
과거 없는 여자는 세상에 없다. 28살 남자가 5명의 여자를 사귀었다면 같은 나이의 여자 역시 5명을 사귀어야 한다. 그게 평균율이다. TV가 은연중에 강조하는 여자 일부종사, 처녀 신화는 물러가라. 사랑하지 못한 여자, 남자를 우리는 현실에서 숙맥이라 부르고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깊게 사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넓게 사랑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무조건. 그 좋은 시절은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강수지: 못생긴 여자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탤런트다. 이 사람들은 잘생긴 사람들이다. 드라마에서 남녀가 만날 때 우리는 탤런트의 모습을 그대로 적용한다. <겨울연가>에서 준상과 유진은 배용준과 최지우의 얼굴로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나서 사랑하는 것은 특별해 보이면서 한편으론 당연하다. 우리는 현실에서 예쁜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얻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겨울연가>가 보기 좋은 건 예쁘고 잘생겨서지만 드라마에서 혹시나 류승수와 이혜은(못생긴 여자의 사랑찾기 영화 <코르셋>의 주인공)이 앉아서 “유진이가 저렇게 남자가 꼬이는 건 그림이 돼서야”라고 뒷담화를 하는 일은 없다. “그렇게 착한 유진이”라고 말은 해도 “그렇게 예쁜 유진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애관계에서 외모는 절체절명의 카드다. <지금은 연애중>에서 이 카드는 현실적으로 등장한다. 뛰어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차희에게는 남자들이 서로 난리를 치고, 잘생긴 호재(권상우)는 “예쁜 여자가 돈 있는 남자 만나는 것이 당연하듯이 내가 돈 많은 여자를 만나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말한다.
수지는 남의 연애사건에 무지무지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남자가 꼬이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못생겼기 때문이다. 통신으로 만난 남자와 번개를 할 때 수지는 “못생겨라, 못생겨라” 하고 주문을 왼다. 하지만 멀리서 보니 잘생겼다. 그러자 그녀는 서로 알아보기 위해서 들고 간 빨간 풍선을 감추고 총총히 사라진다. 도서관 자리를 양보하고, 새벽 일찍 자리를 맡아주고, 영화까지 같이 본, 그래서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다닌 남자가 뜸들여서 고백하는 말이 “재시험 볼 수 있게 아버지께 잘 좀 말씀드려 달라”는 말이다. 어머니와 선보러 간 자리에서 상대방 어머니는 “딸은 어머니와 다르네요” 한다. 거기다 친구 동생(호재)이란 작자가 그녀를 상대로 농락을 하기 시작한다. 못생긴 여자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연기를 해야 할 때 그 대용으로. 수지는 드라마 끝까지 안경을 벗지 않는다. 역을 맡은 이의정이 안경만 벗고 멋있게 꾸미고 나오면 여러 남자 홀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는데, 그런 ‘본때를 보여주는’ 클라이맥스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안경 너머 그녀를 보도록 독려받는다. 그리고 그녀가 예쁘게 보이는 건 꾸며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나중에 수지와 혼담이 오가는 직장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한눈에 반했다기보다는 점점 반했다고 할까요.”
못생긴 여자의 꿈을 실현시키는 거라고 더욱더 현실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양쪽 다 꿈에 가깝기는 마찬가지라면). 당연하게 비치는 선남선녀 사랑보다 못생긴 여자의 사랑은 더욱더 견고해 보인다. ‘얼굴 거죽’을 문제삼을 때야 비로소 ‘얼굴 거죽’을 벗긴 연애가 말이 되는 것이다.
강차희: 우정을 먼저 안 여자
예쁜 차희와 호정의 우정은 차희의 ‘프로포즈’에서 시작된다. 호정이 좋아하는 남자(성시경)를 차희가 빼앗고, 호정이 “이 개날라리야”라고 말할 때 차희는 호정에게 “너 나 친구할래?” 하면서 다가온다. 친구하면 다시는 네가 좋아하는 남자를 빼앗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리고 호정을 버리고 자기한테 붙은 남자를 보기좋게 차버린다. 드라마의 끄트머리에서 건우(이재황)는 호정, 규인과 심각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건우는 호정을 사랑하기 이전에 규인을 먼저 알아보고 자기 회사로 특채한다. 마지막 회에서 수지와 호정은 서로 얼싸안고 있다. 수지가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호재에 실망하고, 호정이 자기를 버린 남자 규인을 규탄하면서 둘은 “우리 꼭 부부 같다. 사랑해” 한다. 사랑은 우정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산동네 계단: 하늘과 가까운 동네
산동네로 가는 길목의 긴 계단은 드라마의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중간쯤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키면 항상 만날 수밖에 없도록 모티브를 제공한다. 아슬아슬한 위계로 동틀 녘과 저녁의 어스름을 그대로 발 밑 아래 깔아주는 하늘과 가까운 동네는 아름답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지만 궁상스런 생활을 욕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것은 솔직한 대사와 캐릭터다. 누구의 딸인가, 아들인가의 단서가 될까봐 한마디한마디가 허투루 나가지 못하는 긴장된 대사와는 다르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는 장면도 갖가지. “누나! 계속 좋아해주면 안 되냐? 누나가 나 싫어한다고 생각하니까 신경질 나 죽겠어!”라는 호재의 말에 내심 기쁘면서도 “넌 지금 열받아서 이러는 거야. 나 정도 여자는 당연히 널 좋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내가 너 싫다고 하니까 열받아서…”라고 맞받아치는 수지.
한 문장에 영어 단어 하나를 꼭 끼워쓰는 호정의 할머니와 비실비실한 남편 때문에 억척스럽고 돈 돈 돈 하게 된 호정의 어머니, 고상한 척하지만 갑자기 “거기 못 서 이 새끼야!”라고 외치는 수지의 어머니 등의 조연급 배우들도 극을 쥐락펴락하는 데 공을 보탰다. 구둘래 kuskus@dreamx.net▶ SBS 드라마스페셜 <지금은 연애중>
▶ 윤성희 작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