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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
장영엽 2015-06-23

2015년 촉발된 페미니즘 논란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논쟁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년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가장 자주, 널리 쓰인 한해로 기록될 것이다. 일례로 올봄 SNS를 강타했던 주요 해시태그 중 하나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지난 1월 이슬람국가(IS•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에 가입하겠다며 터키로 떠난 것으로 알려진 김모군이 실종되기 전 트위터에 남긴 글,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라는 말은 인터넷상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의 불씨를 지폈고, 한 패션지에 기고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해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라고 일갈한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글은 SNS상에서 페미니스트 선언 운동을 촉발했다. 초여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하다. 6월10일 현재 352만 관객을 동원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페미니즘영화인가에 대한 토론이 인터넷상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지난 6월3일 폐막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목도 높은 이슈를 조명하는 쟁점부문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부제의 오픈 토크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손희정 연구원과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의 활동가 난새, 한윤형 자유기고가 등이 패널로 참석한 이 자리에서는 페미니즘 선언 운동의 의미와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개그맨 장동민.

대중이 이끌어가는 담론

여성 비하•혐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뜨겁게 만든,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몇몇 사건 외에도, 올해 상반기에는 “한국의 여성 혐오가 결국 극단에까지 다다랐다는 어떤 위험 경보”(이송희일)를 알리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IS와 페미니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트위터를 훑고간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아 개그맨 장동민, 유세윤, 유상무가 과거에 진행한 팟캐스트 <옹달샘의 꿈꾸는 라디오>에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여성 비하•혐오 발언을 쏟아냈다는 점이 널리 알려졌다. 지난 5월 말에는 웹툰 작가 조석이 연재하는 <마음의 소리> 중 한 에피소드가 논란이 됐다. 소개팅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를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명품 중독! 끈덕짐! 남 탓! 우울증! 감정기복! 페미니즘! 우라늄 같은 위험한 여인.”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여/성이론>은 아예 올해 여름호 기획특집의 제목에 ‘혐오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이 지난 1년 안에 벌어진 일들이고, 사회가 급격히 우경화되면서 혐오를 그 지배적 정동으로 취하고 있는 반동적이며 폭력적인 정치 행위들은 점점 확대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예들은 혐오가 어떤 특정한 문제적 집단에 국한된 독특한 정동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기실 표현의 정도와 드러나는 양태만 다를 뿐 혐오는 점차로 지배적인 정동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런 혐오의 수사, 혐오를 기반으로 한 행위들은 그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손희정 연구원, <혐오의 시대-2015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중에서) 손희정 연구원의 말처럼 ‘혐오’가 2015년 한국 사회의 기저에 위치한 어떤 심리상태를 뜻한다면, 페미니즘은 특히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여성 혐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보다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할 만하다.

<나쁜 남자>

흥미로운 점은 이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이 일반 대중이라는 점이다. SNS상에서 이뤄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건 여성학과 페미니즘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여성주의자들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할 길이 없었던 여성들이었다. <옹달샘의 꿈꾸는 라디오> 팟캐스트 논란 이후 개그맨 장동민의 방송 하차를 주장하며 1인 시위를 이어가고, 트위터(twitter.com/fefefe2015)와 블로그(fefefe2015.blogspot.kr) 등을 통해 일상적인 페미니즘의 실천을 지향하는 반여성혐오연대 페페페 역시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즉흥적으로 결성한 연대체다. 여성영화제 오픈 토크 행사에 패널로 참여한 웹매거진 의 최지은 기자는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페미니즘이 가시화됐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선언’의 의미를 찾는다.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영역으로 여겨졌던 과거의 페미니즘 담론은 이처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익숙해진 한국 사회의 수많은 화자들에 힘입어 한층 대중적인 영역의 논의로 확장된 듯하다. 지난 5월 말 불거졌던 메르스 갤러리 사태(5월29일 인터넷 사이트 DC인사이드에 런칭한 갤러리로, 이곳의 유저들은 여성 혐오와 관련된 단어들을 비틀어 남성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다)에서 볼 수 있듯 혐오에는 혐오로 대응하자는 입장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담론의 가장 핵심적인 기조는 이제까지 사회적으로 간과되고 묻혔던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데에 있으며, 그 주체는 전문가가 아닌 의식 있는 대중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둘러싼 한국의 영화 관객 사이에서의 페미니즘 논쟁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과거 한국영화계에서 페미니즘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영화는 김기덕과 홍상수 같은 작가감독들의 영화였다. 소구하는 관객층이 지금보다 제한되어 있었을뿐더러 논쟁의 주체도 주로 평론가들이었다. <나쁜 남자>(200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등의 영화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페미니즘 논쟁은 대개 이 영화들이 어떻게 여성 캐릭터를 도구화하고 대상화하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반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또 다른 주인공, 퓨리오사를 중심에 둔 현재의 페미니즘 이슈는 보다 복합적이다. 그녀를 유사 남성으로 보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영화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이 작품이 페미니즘영화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새삼 주목받고 있는 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그동안 대중적인 블록버스터영화들이 너무도 쉽게 지나쳐버렸던 여성에 대한 폭력과 주체성의 문제를 얼마나 사려 깊게 조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다. 이 작품을 ‘페미니스트영화’로 규정함으로써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을 전세계적으로 불러일으킨 페미니스트 이브 엔슬러(그녀는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위한 컨설턴트로 참여했고,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이기도 하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은 여성이 당신의 곁에 있다는 것이고, 당신은 여성과 함께이기에 살아남는 데 있어서 더 나은 기회를 얻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여성들은 지배하길 원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그저 동등한 조건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동시에 여성들은 필드에서 주목받을 동등할 기회를 가지길 원한다.” 이브 엔슬러의 말을 정리해보면, 페미니즘영화로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지향점은 남성의 반대급부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입지와 기회를 가지고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재현하는 데 있다. 어쩌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에 대한 한국 관객의 열띤 반응은 지금의 한국영화계가, 혹은 한국 대중문화가 넘어서고 있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의 재현에 대한 어떤 갈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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