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한은 팝재즈 그룹 윈터플레이의 멤버이자 작곡가,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해온 뮤지션이다. ‘누보송 프로젝트’로 한국 가요를 재즈풍으로 리메이크하여 프로듀싱하고, 유희열, 김조한, 다이나믹듀오 등 10명의 아티스트들과 공연 <텐플러스원>을 선보이는 등 재즈를 기반으로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런 그가 최근엔 드라마 음악감독으로 나섰다. 훅이 있는 신파조의 발라드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보편적 한국 드라마와 달리 그는 재즈를 다양하게 변주한 50여곡을 상황에 따라 사용했고 빅밴드를 기용하여 연주했다. 안방에서 예상치 못한 귀호강을 시켜준 이주한 음악감독을 작업실이자 제작사인 라우드피그에서 만났다. 음악에 대한 질문에 O.S.T를 일일이 들려주며 설명하다 즉석에서 트럼펫을 한 소절 연주해 보이기까지 한 그는, 재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뮤지션이었다.
-드라마 O.S.T 발매 최초로, 지난 5월12일 명동성당 마리아홀에서 <앵그리맘> O.S.T 음악감상회를 열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소속된 기획사이자 음반 제작사 라우드피그에서 하는 게 ‘최초’밖에 없다. (웃음) 드라마 최초의 재즈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고, 많은 곡이 담겨 있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대부분 드라마 O.S.T가 미디 음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이번 앨범은 재즈 빅밴드가 동원됐다. O.S.T에 참여한 뮤지션도 소개할 겸 마련한 자리다.
-<앵그리맘>의 최병길 PD가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O.S.T로 재즈 음악을 선택했고 그 적임자로 이주한 감독을 섭외했다고 알고 있다.
=최병길 PD는 <앵그리맘>이 관성적인 매너리즘에 빠진 드라마가 되지 않길 바랐고, 특이한 스토리텔링인 만큼 특색 있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선보이고 싶어 했다. 최병길 PD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가스펠송을 불렀고, 2010년 미니 앨범 《애쉬번》을 낸 뮤지션이기도 하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앵그리맘>의 무거운 메시지를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음악으로 재즈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내 팬이기도 해서(웃음) 나를 후보로 점찍었다고 들었다. 윈터플레이 활동을 하며 팝재즈의 면모도 보여준 바 있었기에, 재즈라는 한 장르 안에서도 다양성과 대중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감독 경험이 없었던 탓에 주변에서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최병길 PD는 계약하기 전 내 공연을 보러 왔고, 빅밴드 스탭들을 꾸리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 프로듀서적 능력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음악감독을 맡기게 되었다.
-재즈와 드라마의 조합, 어찌보면 생경하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처음 시도한 이 작업은 어떤 의미였나.
=대부분 드라마 O.S.T는 컴퓨터로 만드는 미디 음악으로 채워진다. 빅밴드를 동원하여 실제 연주를 한 까닭은 재즈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어떤 책임감 혹은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요즘엔 재즈가 트렌디하고 대중적인 음악은 아니지 않나. 수목 시간대, 골든타임대 드라마를 맡게 된 건 좋은 기회였다. 이 기회로 재즈가 드라마, 영화음악으로도 잘 어울리는 장르라는 인식의 재조명을 할 수 있길 바랐다. <위플래쉬>(2014)와 <버드맨>(2014)을 봐도 재즈 드럼만 가지고도 충분히 드라마를 끌어가지 않나. 재즈라는 훌륭한 음악이 빛을 볼 수 있도록 200%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즈 선배로서 후배들에게도 많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최병길 PD가 우디 앨런 영화의 재즈 음악 같은 톤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드라마의 장면과 어울리는 음악을 어떤 식으로 구현하려 했나.
=재즈는 그 안에서 배리에이션이 다양하기에 드라마나 영화의 상황에 맞는 여러 표현들이 가능하다. 1960~70년대 영화를 보면 재즈 음악들로 사운드트랙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앵그리맘>의 메인 테마인 <Happy Magic>의 제목은 원래 <Happy Woody>였다. 우디 앨런 영화 속 재즈 음악의 톤을 레퍼런스로 한 트랙으로, 밝고 느긋한 음악이다. 우디 앨런이 자신의 영화에 O.S.T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 붙인 이름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줄 때 사용한 <Happy Magic>은 뉴올리언스 스타일 재즈이고, 블랙코미디를 살릴 때는 <Chop Chop Chop>이라는 트로트 느낌을 살린 집시 재즈, 싸우거나 뛰는 장면은 <Super Bibim Googsu>의 템포가 빠른 비밥 재즈를 활용했다. 또한 <Sunny Side Up>은 1920년대 스윙 재즈, 은 1950년대 프리 재즈, 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더해진 1970년대 퓨전 재즈이며, <Die Hard Again>은 록이 섞인 재즈다. 이현우가 부른 버전의 <Happy Magic>은 마이클 부블레 스타일 보컬이 들어간 동시대적 팝재즈다. 의도치 않았는데 한 작품의 트랙을 만들다보니 재즈의 한 세기를 관통하고 있더라. (웃음) 슬픈 정서를 강조하는 신에서는 피아노 발라드곡인 , 알리가 부른 <사랑한다 미안해> 같은 곡을 사용했다. 특히 서스펜스를 구현할 때 사용한 <Slow Die> <Low Angry> <Marshmallow Attack>이 기억에 남는다. 피아노가 천천히 가는 와중, 현악기들이 서서히 쌓이는 구성이다. 여기에 하이톤의 트럼펫 연주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전형적인 공포감을 주는 스릴러의 음악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더 무섭다는 평도 있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4개월여 동안 70여곡을 썼다고 알고 있다. 편집본이 와서 맞춰봤을 때 어울리는 음악이 없으면 방영 5시간 전에 작곡하는 긴박한 상황도 있었다고.
=실제로 쓴 곡은 100곡에 달한다. (웃음) 밤 10시 방영이니 7시에는 음악을 입힌 완성본을 보내줘야 하지 않나. 그런데 편집본을 보통 오전 11시에 받았다. 더 촉박하게 받을 때도 있었고. 영상을 받으면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해야 한다. 이때 라이브러리에서 음악을 그대로 가져와서 쓰지는 않는다. 있는 음악에 배리에이션을 하거나 어울리지 않으면 아예 새로 작곡을 했다. 곡을 빨리 쓰는 편이다. 그에 맞춰 즉석에서 트럼펫, 피아노 연주를 하고 미디도 이용하여 녹음을 하고 영상에 바로 입힌다. 영화음악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한스 짐머는 큰 모니터로 영화를 보면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한다더라.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신에 맞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긴박하게 작업하는 것이 오히려 체질에 맞았고, 그 스릴을 즐겼다. (웃음)
-보통 O.S.T의 전례를 깨고 초호화 빅밴드를 동원했고, 2장의 CD로 구성된 더블 앨범이 발매된다. 이런 사양의 O.S.T 구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혹 완성도 높은 재즈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경제적 손해도 감수한 것인가.
=손해 볼 것을 전제하고 사명감만으로 추진했던 것은 아니다. 예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므로 최대한 그에 맞춰 작업하려 했다. 전곡을 혼자 작곡했고 트럼펫, 피아노 연주도 스스로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음원 순위가 높진 않았고, 제작사 라우드피그를 통해 투자도 했으나 손해를 보긴 했다. 그러나 기왕 좋은 작품을 만들었으니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 돈과는 별개의 사명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곧 발매하는 음반은 음원으로 공개된 것보다 많은 39곡이 2CD로 구성되어 있다. 드라마가 해외에서도 방영되면, 한국에서도 이런 재즈 O.S.T를 시도한다는 걸 알게 될 거란 기대감도 있다.
-앞으로도 드라마, 영화음악감독으로서 활동할 생각이 있나.
=물론이다.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음악감독은 아니지만 트럼펫 연주자로 참여한 적은 많다. <플란다스의 개>(2000), <라이터를 켜라>(2002) 등의 O.S.T에 참여했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을 비롯해 이병우 음악감독이 했던 작품들에 다수 참여했다. 주위에서는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잘할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액션도 하고 싶고, 가리는 장르는 없다. 사극에도 도전하고 싶다. 이병우 음악감독은 <관상>(2013)에서 사극을 클래식으로 풀지 않았나. 내가 하면 또 다른 색깔의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 것이다. 모든 옵션을 열어두고 싶다.
-향후 활동 계획은.
=1995년에 1집 《직관》을 발매했으니, 올해가 데뷔 20주년이다. 특별한 기념 공연을 기획 중이다. 소속 그룹 윈터플레이는 마카오에서 12월에 공연이 있다. <앵그리맘>의 음악으로 재즈콘서트를 할 계획도 있다. 처음엔 소규모로 라이브클럽에서 하다가 프로그램이 짜여지면 좀더 큰 공연장에서 할 생각도 한다. 누구나 <앵그리맘>의 주제 혹은 재즈에 관심이 있으면 와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공연을 하고 싶다.
<앵그리맘> O.S.T 디럭스 에디션 발매
지난 5월7일 종영된 MBC 드라마 <앵그리맘>은 한때 ‘날라리’였던 엄마가 다시 고등학생이 돼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파헤쳐나가는 이야기로, 학교 폭력과 사학재단 비리를 파헤치며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를 드러낸 작품이다. 한국 드라마 최초로 재즈 장르로 작업된 <앵그리맘> O.S.T는 이 평범치 않은 드라마의 결을 다양한 재즈 음악으로 살려낸다. 2CD 구성으로 첫 번째 CD는 정통 재즈 음악 위주의 20곡, 두 번째 CD는 피아노 연주곡 위주의 19곡을 담아냈다. 초반부 트랙엔 밝은 분위기의 음악을, 뒤로 갈수록 서스펜스가 있는 음악들을 배치했다. 드라마의 스토리텔링과 궤를 같이하는 섬세한 구성이다. 5월28일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