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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 안에 있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산다> 박정범 감독

“정철은 부조리한 내 모습이었다.” 강원도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정철(박정범)을 중심으로, <산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조카 하나(신햇빛)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갑갑했던 유년기의 자신을,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정신장애를 앓는 누나는 친구를 잃고 공황장애를 겪었던 청년 시절 자신의 방황을 모티브로 삼았다. 박정범 감독은 어느 하나 관계를 끊으면 설명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캐릭터를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정철에게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누나 수연(이승연)이 ‘짐’이자, 또 보호해야 할 ‘집’이다. 그 존재감이 절대적이다. 트리트먼트에서는 형이었던 캐릭터가 여성으로 바뀌었다.

=죽음에 대한 내 공포가 누나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실제 모델은 자살자들 모임에서 대상을 찾아서 수차례 인터뷰를 했다. 수원에 살고 있는 여성이었는데, 우울증 때문에 자살 시도를 일삼고(영화에서는 자신을 채찍으로 벌하는 모습으로 구현된다), 아무 남자와 닥치는 대로 섹스를 했다. 배역을 맡은 (이)승연 선배가 그 감정을 유지해야 해서 연기하는 내내 정말 힘들어했다. 나는 그런데도 더 독하게 촬영기간 동안 스탭과 배우들에게 말 걸지 말라고까지 했다.

-이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노동하는 인간이다. 첫 장면에서 정철이 돌을 나르는 장면은 돈을 벌기 위한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자 고통과 형벌처럼 그려진다. 마치 신화 속 시시포스의 형벌이 연상되는 이미지다.

=이 친구에게 산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노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 노동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계급사회다. 자본의 계급이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타포다. 얼어붙은 돌을 밀려고 하는 안간힘, 그 이미지가 이 영화의 전체라고 봤다. 얼어붙은 땅에서 돌 하나 빼기도 힘든 게 지금의 우리 사회다. 온기가 없어서 아무리 온 힘을 다해 움직여봐도 안 되는 것이다. 가시덤불 안에 갇혀 노동을 하는 정철은 그래서, 끊임없이 얼어붙은 땅을 움직이고 싶어 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이 신은 원래 중간에 들어간 거였는데, 그 상징성을 보여주고자 프롤로그처럼 영화의 맨 앞에 배치했다.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와 마찬가지로 직접 주연 정철을 연기했다. 쉽지 않은 이야기인데 대중에게 익숙한 배우를 캐스팅하면 전달이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감독들이 시나리오 쓸 때 배우를 설정하고 쓰지 않나. 이번엔 그게 나였다. 정철이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자멸하는 과정을 쓰면서 내 이미지를 떠올렸다. 직접 노동자로 생활을 해봐서 표현할 자신이 있었다. 처음 투자사인 산수벤처스에서 3억원을 투자받았는데 그 규모라면 내가 나와도 관객이 별 거부감 없이 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웃음)

-정철의 노동의 장소로 강원도 진부에 있는 된장공장을 설정했다. 엄동설한에서 노동과 해고가 주는 절박함이 더 강렬해진다.

=된장공장은 부모님이 하시는 사업이다. 내가 십대 때부터 부모님이 하셨고, 나도 방학 때마다 지내며 일손을 거들었다. 메주는 겨울에 말려서 띄우는데, 이때 물기가 제대로 안 빠지면 곰팡이가 핀다. 이걸 먹으면 독이 된다. 그게 참 영화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내면이 썩어 문드러지는 불안한 징후를 메주가 썩는 걸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부패의 과정 속에서도, 미친 누나와 저능아 취급을 받는 명훈(박명훈)은 달걀을 부화시키려고 한다. 모자라서 논리정연하지 않으나, 가장 핵심적인 삶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둘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게 세상이 아닐까. 결국 순수함을 잃어버려야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의 추위, 삭막한 풍경이 환기하는 효과는 어떤 것이었나. 명훈은 정철에게 “필리핀에 가서 살자”며 그곳이 따뜻해서 사람들이 착하고, 바나나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동경한다.

=강원도 하면 내게는 곧 겨울을 의미했다. 농한기에는 춥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할 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인지 간암으로 죽는 사람도 많이 봤다. 따뜻한 곳이 있다면 굳이 이곳을 택할 이유가 없는 척박한 곳, 모든 것이 얼어붙은 땅이다. 살아남으려면 자연과 싸워야 한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싸우는 것이 얼어붙은 겨울의 강원도에서 돌 하나 움직이는 것 같은 어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철이 가진 유일한 재산인 트럭 안에서 늘 정훈희의 <꽃길>이 흐른다. 카오디오가 고장나서 즐거운 음악만 나온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고단한 이들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차 안이다. 오디오로 찾아 듣는 게 아니라 들리는 음악을 들을 뿐이다. 음악이 이들의 상황과 아이러니하게 충돌하기를 바랐다. 차창이 고장나서 들어올릴 때도, 누나가 정신이 나가서 ‘나 죽는 거야’라고 절규할 때도 즐거운 음악이 나오게 했다.

-영화에 노동자와 대립되는 정확한 자본가가 명시된다. 사업의 주체인 강 사장보다 2세인 그의 딸 현경(박희본)이 더 지금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노동 없이 아버지의 돈으로 유학을 했고 지위를 부여받은 그녀는 그 파워로 더 무섭게 노동자들을 몰아붙인다.

=된장공장에 정철과 젊은 일꾼들이 간 건, 효율이 좋은 기계가 추가된 것이다. 한번에 메주 3~4개를 만들 수 있는 노화된 기계(원래 진부의 나이 든 노동자들) 대신 10개 이상을 만들 수 있는 새 기계가 들어온 거다. 우리 사회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더 착취해야만 사회가 온전하게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다. 기업에서 몇 천억원의 이익이 나면 자본가들이 배당을 나눠 갖고, 손해가 나면 노동자들이 집단해고당한다. 노동자는 한마디로 그냥 기계처럼 취급된다. 쌍용차 해고와 이 문제가 뭐가 다를까 싶다. 손해가 나면 같이 고민해야 하는데, 가진 자들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노동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들끼리 진흙탕 속에서 서로 겨누고 싸우게 된다.

=정철은 남을 밟고 올라가서(다른 노동자의 해고를 주도한다) 자신도 밟힌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큰 쟁점은 된장공장 2층에 있는 사람들, 자본가들이다. 된장공장에서 메주가 썩었다. 그런데 사장의 딸은 그 원인을 노동자에게 돌린다. 강 사장과 딸이 나누는 못된 대화를 노동자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모른다. 선량한 노동자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서 잘못의 원인을 찾는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다들 그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게 이 사회다. 가장 공포스러운 게 바로 그 지점이다. 분노하지 않은 모든 이성들은 결국 동의하는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앉아서 내 영화를 찍고 있을 뿐이다. 나가서 싸우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왔다.

-<무산일기>의 탈북자 전승철과 달리, <산다>의 정철에게는 혈연관계가 존재한다. 건사해야 하는 짐이기도 하지만, 그가 최악의 상황까지 나가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견뎌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결국 희망적인 시선을 보이는 것도 가족이 주는 온기다.

=조카가 있기 때문에 정철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나가 없었다면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50가지 시나리오 중 정철을 혈혈단신으로 설정한 것도 있었는데, 그땐 그가 살인마가 되는 이야기였다. 정철이 좌절하지만 길을 잃지 않고 결국 돌아오는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그가 존재하는 이유, 살아야 할 목표가 되는 거다. 함께 살 집이 있어야 해서 일을 하고, 그 일이 있어서 힘들어도 살아간다. 그게 결국 이 남자에겐 희망이고 절박함이다.

-현경의 시어머니가 혼수로 요구한 85인치 UHD TV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하루 일당 8만원, 된장공장 노동자들의 겨우내 노동의 대가와 맞먹는 3800만원이라는 거금의 소재가 가지는 의미. 또 TV의 선명함에 대해 강 사장이 “사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는 대사에서, 디지털화되는 영상미학에 대한 비판으로도 들린다.

=결국 딸의 혼수 때문에 노동자들이 해고당하는 가혹한 구조라는 점에서 TV가 가지는 의미가 있었다. 더불어 필름을 찾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판도 분명 있다. 편리성, 효율성에서 이제 필름은 도태됐다. 디지털 소스가 있는데 현상하고 스캔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는 거다. 필름 룩까지 디지털로 구현하는 세상 아닌가. 현상소도 이제는 다 사라졌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아날로그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가 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2014’ 중 한편으로 제작 지원을 받았는데, 당시 상영 버전이 3시간15분으로 화제가 됐었다. 지금의 개봉 버전은 165분인데, 여전히 시장에서는 소화하기 ‘버거운’ 길이다.

=4년 동안 시나리오를 50번 고쳤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영화가 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원래 5시간 정도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그러니 165분은 나에겐 타협일 수도 있다. 원래 버전은 정철과 강 사장의 격돌이 본격화되고, 정철이 강 사장의 딸 현경을 납치하는 등 후반부 이야기가 더 전개된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다. 지긋지긋하고 우울한 삶이 반복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제 때 상영하고 보니 나도 좀 아차 싶더라. 상영이 세 시간이 지나가니 스탭들까지 몸을 앞으로 하고 한숨을 쉬더라. (웃음) 관객에게 이 지루한 이야기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래도 한 십년 후쯤 디렉터스컷을 상영하고 싶다.

-<무산일기>는 해외 영화제의 호평과 재능 있는 신인감독의 발견이라는 이슈가 있어서 반응도 뜨겁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과를 얻었다. 두 번째 작품을 내놓은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이 영화의 운명은 잘 알고 있다. 영화를 만들며 생긴 빚은 고스란히 다음 영화를 해서 갚아야 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무산일기>만 해도 상당히 상업적인 내러티브였다. 전승철 한 사람의 시점으로 몰아가니 감정의 흐름이 확실하고 관객이 가지는 몰입도도 컸다. 하지만 <산다>는 1시간30분까지 진행되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모든 걸 믹스해 넣으니, 결과물이 과유불급이 되었단 반성도 있다. 그래서 사실 140분 버전까지 편집을 해봤다. 이 영화는 정철이 다양한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갖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원자이길 바랐다. 정철에게는 친구 명훈이 있고, 명훈에게는 좋아하는 누나 수연이 있다. 계속 인물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관계가 맺어지는 게 세상의 구성원리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일 수도 있고 생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편집을 하다 보니 인물을 빼야 하고 그 관계가 다 무너지더라. 아예 처음부터 일인칭 시점으로 다시 찍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정철의 절박함이 ‘배우’ 박정범의 외형으로도 구현된다. 부쩍 살이 빠져서 그간의 고생이 눈에 보인다.

=미술팀이 따로 있지도 않았다. 연출부, 제작부가 영화에 나오는 장작을 다 패고, 된장공장 벽돌도 쌓아올리고 했다. 한겨울 두달 반 동안 찍었는데, 너무 추워 카메라 배터리가 얼어서 촬영을 못한 적도 많았다. (웃음) 정철의 절박함을 담기 위해 살을 빼긴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져서 12kg이 빠졌다. 촬영감독이 10kg, 조감독도 7kg이 빠졌다. 촬영 끝날 때쯤 너무 힘들어 경련이 일어서 뻗은 적이 있다. 54회차 마지막 날 ‘수고하셨다’며 길을 걷는데 촬영감독이 그러더라. “감독님, 우리 정말 끝난 거 맞아요? 내일 또 나가야 할 거 같은데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또 이렇게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이번 작품은 정말 고통의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찍었다. 찍는 과정 자체가 ‘산다’라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친구의 죽음이라는 동기가 있었다. 함께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몇년 전 무명배우로 생활하다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 배우일 땐 그 친구를 아무도 찾지 않더니, 그 일이 있고 인터넷 포털 검색어에서 1등을 하더라. 미디어의 속성이 이런 건가 싶어 분노가 끓어오르더라. <무산일기>의 모델이 된 전승철과 그 친구와 셋이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그러면서 공황장애가 왔다. 쉽게 죽음을 보게 됐다. 코앞에 벽이 있는 것 같고 숨쉬기가 힘들더라. 다른 건 몰라도 <무산일기>와 <산다>는 내가 꼭 해야 할 영화였다. 기획해서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어서 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4년간 매달렸는데, 이제야 좀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전주프로젝트마켓(JPM) 극영화부문 지원작으로 <땡중>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다음 프로젝트는 이 작품이 되는 건가.

=<땡중>은 정말 잔인하고 하드보일드한 호러영화다. 그 작품이 먼저 들어갈 수도 있고, 폴란드 크라코프영화제에서 시드머니를 받은 프로젝트가 들어갈 수도 있다. <무산일기>나 <산다>같이 독립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다음 작품은 시스템 안에서 제작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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