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대형마트가 생긴 즈음 잡다한 물건들 사이 생리대가 비치는 큰 비닐봉투를 들고 무심한 척 귀가하던 때의 작은 해방감을 기억한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초경을 하던 무렵엔 생리대를 약국에서 팔았고 맞춤사이즈의 검은 비닐에 따로 담아주곤 했다. 되짚어보면, 검은색으로 생리대를 감추게 하고 흰색으로 생리 중인 여성이 체험하는 불편을 가리는 등 숨김과 은유로 가득한 여성용품 광고보다 의외로 진통제 TV 광고의 역사에서 생리 중인 여성과 일상의 통증을 가시화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격무에 지친 샐러리맨의 두통을 타깃으로 삼은 70년대 말의 사리돈 광고 이후, 80년대 중반부터는 홈드라마 형식과 연예인의 유명세를 빌린 진통제 광고들이 줄을 이었다. 대부분의 진통제 광고들이 두통, 치통, 생리통을 적용증으로 고지하고 있으나 펜잘이 빠르게 녹아 흡수되는 약효를 강조했다면 게보린은 통증의 부위를 세분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현재까지 이어오는 유명한 삼분할 화면, ‘두통, 치통, 생리통에 맞다! 게보린’의 시작도 이즈음이다. 처음엔 ‘허리를 굽히고 복부를 감싸쥔 여성’만 검은 실루엣 처리했던 게보린 광고는 곧 여성 연기자가 직접 시연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해외여행 전면자유화 무렵인 90년에 이르러선 이탈리아에 간 탤런트 강남길이 세 가지 통증 동작을 흉내내며 게보린을 찾는 광고가 나올 정도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각인했다. 그러니까 게보린 광고만큼 여성의 생리통을 많이, 오랫동안 반복한 매체는 없다는 뜻이다.
성경험을 숨기지 않는 여성을 “맞다! 개보년”이라 비하한 욕설이 그저 두통약의 패러디였다는 개그팀 옹달샘의 해명은, 당연하게도 피 흘리는 여성기에 대한 혐오의 맥락을 분리하지 못한다. ‘처녀 예찬론이 아니라 거짓말 예찬론’이었다는 사과방송 또한 인지하고 싶지 않은 여자의 ‘과거’를 검은 봉지로 숨기고, 흰 바지를 입듯 거짓을 연기해 달라는 강요에 다름 아니다. 내가 불편하니까 당신이 숨겨라. 눈에 띄지 말라는 압력. 이는 위계와 권력 중심의 한국 사회가 장애나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들은 계량할 수 없는 진심과 죄송한 마음을 들이밀기 이전에, 소수자 차별과 약자 혐오 발언들에 대한 정확한 사과를 했어야 한다. 한데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이 출연하는 tvN <코미디 빅리그>의 김석현 CP는 그들을 사적으로 옹호하는 선을 넘어,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는 여성을 프로그램 안에서 조롱하는 것을 용인한다. 유세윤의 음주운전 사건 이후 개그로 그에게 비난과 조롱을 감당하게 하던 전례와 비교해보면, 조롱의 방향은 더 확실해진다. 묻고 싶다. 과오를 ‘웃음으로 보답’한다는 의미가 고작 이건가?
+ α
폭력과 혐오의 각성이 필요해
<코미디 빅리그> ‘코빅열차’ 코너에서 녹색괴물로 분장한 장동민이 ‘나쁜 남자’를 보여주겠다며 다짜고짜 여성 개그맨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고 윽박질렀던 시점이 지난해 7월. 얄궂게도 나흘 후 개그맨 서세원이 아내 서정희의 목을 조르고 끌고 가는 폭행 CCTV가 공개되며 사회적 문제가 된 이후에도 각 코너에서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성추행 소재 코미디를 방조했던 연출가의 균형감각에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