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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on] 함께 배우고 만드는 과정의 소중함을 지키고 싶다
윤혜지 사진 최성열 2015-05-14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영화공동체 윤중목 대표

윤중목, 낭희섭(왼쪽부터)

30여년간 한결같이 영화계 변방을 지켜온 이가 있다. 1985년 만들어진 작은영화워크숍 시절부터 쭉 독립영화 공동체의 자생에 힘써온 현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다. 초창기, 오점균 감독(1기), 류승완 감독(3기),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5기), 임필성 감독(6기), 이송희일 감독(10기) 등이 독립영화워크숍의 기반을 다졌고 마침내 지난 4월6일 독립영화워크숍은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다. 30주년을 기념하고자 낭희섭 대표는 영화공동체 윤중목 대표와 함께 그간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독립영화워크숍, 그 30년을 말하다>를 출간했다. 윤중목 대표는 현재 영화공동체와 문화그룹 목선재 대표를 겸임하며 영화공동체 정기상영 프로그램인 독립영화발표회를 매주 열고 있다. 뒤늦게나마 문화그룹 목선재 사무실을 찾아가 변방에서 분투 중인 두 영화인을 만났다.

-독립영화협의회의 독립영화워크숍을 30년간 홀로 운영해왔다. 이야깃거리는 많았을 텐데 출간이 의외로 늦었다.

=낭희섭_요즘 책을 나눠주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데 책을 주면 꼭 밥을 사주더라. 이건 뭐 앵벌이도 아니고. 그냥 책만 주러 간 건데. (웃음)

-참여회원들은 하나같이 신당동 사무실에 대한 독특한 기억을 갖고 있더라.

=낭희섭_처음엔 대한극장 별관에 있다가 1998년부터 자리잡은 데다. 잘될 땐 40명씩 왔는데 문예아카데미 강당에서 수업을 하고, 실습할 때만 팀별로 별관에 있었다. 사무실이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인데 올라오다 도로 내려간 친구도 많다.

윤중목_음침한 소굴 같다. 지금은 온갖 집기들로 꽉 차서 손님 맞을 공간도 없다.

낭희섭_장산곶매 해체 장부까지 갖고 있다. (웃음) 창고가 돼가는 중이다.

윤중목_어디 기증해도 충분한 사료가 될 텐데 줄 데가 없다.

-책을 출간한 문화그룹 목선재와는 어떻게 연이 닿았나.

=윤중목_내가 2007년에 독립영화워크숍을 들었다. 그무렵 <인문씨 영화양을 만나다>를 출간했는데 영화에 대해 뭣도 모르면서 그럴싸하게 쓴 책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까지 선정된 게 부끄럽더라. 현장에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쓴 일을 반성했다. 영화를 배울 만한 곳을 이곳저곳 찾아보던 중 독립영화워크숍에서 낭 선생님을 만났다.

낭희섭_나이도 적지 않은 분이 잘 적응하더라.

윤중목_낭 선생님이 사실상 독립영화 터줏대감이다. 고명욱 촬영감독은 우리나라에서 독립영화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낭 선생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와 같다는 얘기도 했다. 나름 고르고 골라서 온 거다. 헝그리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할까. (웃음)

낭희섭_종일반이라 기간은 짧아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비용이 저렴하기도 하고.

윤중목_진입장벽이 낮은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동기라고 해도 다 20대라 스스로 벽을 허물어보려고도 노력했다. 나이먹었다고 힘주고 있으면 뭘 배울 수가 없다.

낭희섭_우리가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려고 애쓰는 면은 있다. 보통 회식 때도 나이드신 분이 돈을 많이 내게 되잖나. 우린 그걸 말린다. 모두를 위해서다. 회식비를 많이 내게 되면 은근하게 그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거든.

-낭희섭 대표가 30년간 그 자리를 지킨 덕에 그 수평적 문화가 유지된 것 같다.

윤중목_맞다. 그건 낭 선생님이 고수해온 하나의 물이다. 주인이 갈리지 않았으니 그 집의 물이 그대로 내려온 거지.

낭희섭_밖에서 보니까 그렇지 안에선 그리 자연스럽지만은 않았다. (웃음) 수강료도 수강료라고 안 하고 참여회비라고 한다. 기수제이긴 해도 선후배 개념이 아니다. 1기나 지금의 166기나 다 똑같은 영화인 동료다. 강사들에게도 서로 경험을 공유한다는 입장으로 생각해달라고 부탁한다. 독립영화워크숍 클럽(inde1990.cyworld.com)에 가면 예산 운용 내역까지 모두 공개돼 있다.

-민간 최초의 영화제작 실습교육터다. 영화제작 실습교육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인가.

=낭희섭_당시의 현장이 내겐 맞지 않았다. 굳이 감독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제작을 하기도, 스탭을 하기도 애매했다. 감독 위에 제작자가 있고, 제작자 위에 배급업자가 있는 그런 시스템에 적응하기도 어려웠고.

-경험에 바탕해 평등하고 실천적인 영화교육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낭희섭_공동작업 방식으로 참여회원 모두가 기회를 균등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예전 도제 시스템도 그러했지만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영화교육도 점점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쟁도 심해지고 동료를 배려하지 않는 것 같다. 비제도권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런 말 하는 것도 뭣하지만 영화과 나온다고 다 감독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같이 영화 만드는 사람들과 제대로 논의하고 소통하는 법,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공동작업을 권장하는 까닭은 그래서인가.

=윤중목_‘내 작품’이 아닌 ‘우리 작품’을 만들게 한다.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배우는 과정이다. 가령 다섯명이 한팀이라고 치자. A, B, C, D, E가 각각의 다른 기획안을 만들어온다. 그중 B의 기획안을 골랐다고 하면 그걸 다시 자기 것처럼 다섯 팀원이 각각의 트리트먼트를 만들어온다. 그중 또다시 하나의 트리트먼트만을 고르고 고른 것으로 최종 시나리오를 쓰게한다.

낭희섭_자기가 쓴 각본이 아니니까 찍던 중에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본다. 독립영화워크숍이 개인작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초반부터 주지시킨다. 참여회원들에게 우리의 실체를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워크숍 일주일차가 되면 다같이 산행을 한다. (웃음) 같이 산에 가면 성격이 나오거든. 중간에 못하겠다고 징징거리던 친구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기수 중 유일하게 그 친구만 영화를 하더라.

-손쉽게 개인 작업이 가능한 시대다. 제작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독립영화워크숍의 지향점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낭희섭_물론 회의도 든다. 나름 변화를 꾀하며 대학 영화과에도 협력을 제안했는데 별 반응은 없었다. 원형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걸음마만 떼게 하면 방향은 자기가 잡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독립영화발표회, 독립영화의 재발견 행사도 꾸준히 열고 있다.

=낭희섭_중요한 것은 재생산이다. 과거엔 한 동네 사는 것처럼 서로 누가 뭐하는지 뻔히 알았다. 요즘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모른다. 정보 교환의 장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독립영화발표회는 나 이런 영화 만들었다고 보여주는 자리다. 이 과정에서 참여회원들에게 뭐가 어려웠는지 진솔하게 발표해달라고 한다. 듣는 사람들이 허상을 보지 않게끔. 장산곶매 초기 인력이 모였을 때의 교류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윤중목_매번 제작일지를 수록한 자료집을 만든다는 게 특징이다. 감독들에게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까지 어떤 시행착오와 사건들, 생각들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제작일지를 쓰게 한다. 후학들이 생동감 있게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과정이다.

-앞으로의 비전은.

=윤중목_목선재를 온전한 문화그룹으로 이끌어가고 싶다. 도서출판, 영화영상사업, 사회적 문화사업까지 크게 세 가지 사업을 진행 중이다.

낭희섭_돈도 안 되는 거 왜 하냐고 하지만 재투자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영역에 소방수로서 남고자 했는데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웃음) 공동작업을 다른 데 이식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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