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의 ‘잭슨 황’을 기억하는가. 이름과 의상만 마이클 잭슨의 그것에서 가져왔을 뿐, 모습은 영 딴판인 웃기는 캐릭터다. 크고 우람한 체구의 ‘잭슨 황’이 뭐든 춤으로 표현해보겠다며 요상한 몸짓을 해보일 때면 객석이 들썩이곤 했다. 그 ‘잭슨 황’이 개그맨 황영진이다. 그런 그가 무슨 일인지 요즘은 <씨네21> 사무실에서 종종 목격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CAMPUS CINE21>(<씨네21>이 제작, 발행하는 격주간 대학생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서 주관하는 청년 팟캐스트 방송 <청년들의 일자리 전쟁>(이하 <청일전쟁>)의 MC로 활동 중이었다. <청일전쟁>의 기획부터 진행까지 재능기부로 참여 중이라고 해 이참에 만남을 청했다. ‘잭슨 황’ 이후의 활동과 근황을 전해 들으며 웃음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들어봤다.
-<씨네21> 1000호 마지막 장에 들어간 ‘<씨네21>을 만드는 사람들’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다.
=팟캐스트 <청일전쟁> 때문에 요즘 <씨네21>에 자주 들른다. 그러다 창간 20주년이라며 사진을 찍으러 오라는 연락까지 받게 됐다. 내가 같이 찍어도 되나 고민하다가 얼떨결에 그만. (웃음)
-<청일전쟁> MC로서 프로그램 소개를 부탁한다.
=비싼 등록금, 취업난 등 청년세대가 맞닥뜨린 현실적인 고민을 들어보고 대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게 목표다. 나를 포함해 출연자 전원이 이런 취지에 공감해 재능기부로 함께하고 있다. 일단 학생들의 사연을 들어보고 6개월 뒤에 사연을 추린다. 청취자와 내부 투표를 거쳐 학자금 지원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에게 지원금을 줄 예정이다. 지원금의 출처는 광고 수입인데 요즘 조금씩 광고가 들어오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기획부터 참여했다고 들었다.
=<씨네21> 사업기획팀 (김)한배 형이랑 내가 함께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는 SBS 개그맨 선후배 사이다. 둘 다 뭔가 해볼 만한 아이템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KBS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처럼 대학생들의 고민거리를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사람이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주고 왜 실패했는가를 설명할 때 공감대가 생기지 않나. 그래서 큰 성공 없이 살아온 내가 나섰다.
-방송 중에 공약을 하나 내걸었다. <청일전쟁>이 일주일간 팟캐스트 순위 10위권을 유지하면 직접 460만원을 지원금으로 내놓겠다고 했다.
=사연을 보내온 학생 중에 한명은 갚아야 할 학자금이 400만원이라고 하고, 또 한 친구는 아르바이트비 60만원을 못 받고 있다는 거다. 둘 다 상당히 힘들어하더라. 사연을 듣다가 순간 내가 ‘욱’했다. 그런데 자꾸만 순위가 오르고 있어서 불안하다. 뭐, 일주일 내내 10위 안에 든다는 게 어디 쉽겠는가. (하하)
-과거 본인의 학창 시절과 지금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비교해보면 어떤 것 같은가.
=매주 방송 전에 요즘 청년들의 삶에 대한 기사들을 여럿 찾아본다.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 나 때만 해도 중소기업의 취업 문이 열려 있었고 비정규직으로 몇년간 일하고 나면 정규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중소기업들도 인력 충원을 확 줄였고 비정규직을 뽑았다가 자르고 또 비정규직을 쓰는 상황이 아닌가.
-개그맨 활동에 대해서도 좀더 물어보자. SBS 공채 7기 개그맨으로 시작했다.
=사연이 많다. 스무살 때 달랑 10만원을 들고 고향 대전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고시원 생활을 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개그맨 시험만 준비했다. 그런데 시험에 8번이나 떨어졌다. 처음에는 떨어지고 일주일간을 울었는데 나중에는 떨어지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음에 또 보면 되지 뭐’ 하면서 보고 또 보고.
-왜 그렇게 많이 떨어진 것 같나.
=누구나 자기 인생에 신파는 있지 않나. 어린 시절 집안이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했다. 자취 경력만 15년이 넘는다. 가난한 삶을 살아서 그런지 웃지를 못했다. 어린 시절 TV에서 나오는 ‘봉숭아학당’을 보며 녹음기로 소리를 따로 녹음했다. 그걸 매일 들으면서 잤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혼자 자야 했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우울할까, 나도 좀 웃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그런데 한평생을 웃지 않고 산 사람이 하루아침에 개그맨이 되겠나.
-그래도 웃길 자신이 있었나보다. 어릴 때부터 ‘웃긴다’, ‘재밌다’는 소리는 좀 들었던 건가.
=정말 못 웃겼다. 흔히 말하는 ‘개그 루저’였다. 친구들 앞에서 내가 한마디를 하면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근데 또 남들 앞에 서는 건 그렇게 좋아했다. 도대체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나중에 방송국 PD님도 그러시더라. ‘쟤는 실력은 없는데 자신감 하나는 있다!’
-합격하고는 나름 승승장구였다. ‘잭슨 황’ 캐릭터도 그때 꽤 인기가 많았고.
=데뷔와 동시에 방송을 했고 내리 3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웃찾사> 시청률이 30%를 넘길 때라 덩달아 나도 인기를 좀 얻었다. 개그맨 지망생 시절에 준비한 걸 그때 다 쏟아부은 것 같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줘서 어디 다니는 게 어색할 정도였다. 지금이야 너무 자유롭게 다니고 있지만.
-기억에 남는 팬이 있나.
=매일같이 내 자취방 문고리에 치킨을 걸어놓고 가는 분이 있었다.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면, ‘오빠, 치킨 맛있게 드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치킨이 떡. 6개월 넘게 치킨을 가져다줬다. 한번은 ‘피자로 바꿔주면 안 되니?’라고 적어뒀더니 정말 피자를 걸어주더라. ‘족발로 바꿔줄 수 있니?’라고 한 뒤로는 다른 개그맨에게 간 것 같다. (하하) 또 어떤 분은 내 집 문을 열고 들어와 물건을 가져갔고, 요리를 하고 있는 분도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그때는 참 인기가 많았구나.
-본인의 ‘리즈 시절’을 만들어준 <웃찾사>가 부활했다. <웃찾사> 시즌2에 합류할 계획이 있는 건가.
=함께하고 싶다. 사실 지난주에도 녹화는 했는데 방송이 안 됐다. 계속 도전 중이다. 후배들에 맞서서 통과를 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 조금이라도 인지도가 있으면 좀더 큰 웃음을 줘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실제로 제작진도 그런 걸 바라고. 여기서 내가 조금 더 잘하면 공개 코미디 무대에 오르는 개그맨으로서 좀더 살 수 있을 것이고 안 되면 다른 길을 또 찾아야겠지. 어쨌든 올해 목표는 <웃찾사> 시즌2로 꾸준히 인사드리는 거다. 더워지기 전에 시청자들을 만나 봬야 하지 않겠나.
-그동안 <베이스볼 워너비> <K-STAR news>를 비롯한 방송 프로그램의 리포터, MC로도 활동해왔다. 그럼에도 공개 코미디 무대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건 무대만이 주는 강렬한 매력이 있어서일 텐데.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잭슨 황’이더라. 역시 내가 갈 길은 개그라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공개 코미디 무대는 700, 800명의 관객 앞에서 진행된다. 관객이 다같이 한번 웃으면 그 웃음소리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다. 그 소리를 한번 듣고나면 절대 잊을 수 없다. 마약 같다. 개그맨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발 동동 웃음’이라고 하는 그 소리. 그 희열을 맛보기 위해 다시 무대로 가야 한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회심의 아이디어가 있을 것 같다.
=아이디어를 20개도 넘게 짜고 있다. 그중 회사는 가난한데 사장은 허세와 허풍기가 가득하다는 내용의 극이 좀 괜찮아 보인다. 더 공개하면 개그맨들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요즘은 어떤 식의 코미디가 필요하다고 보나.
=tvN <SNL 코리아>처럼 수위가 높은 코미디가 더 필요하다. 시청자들의 눈도 높아졌고 이미 공개 코미디가 보여줄 건 다 보여준 것 같다. 식상한 걸 버리고 수위를 좀더 높여서 성인들을 위한, 성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개그를 만들어야 할 때다.
-<SNL 코리아>에 한번 나가야겠다.
=사실 시즌1의 1회 때 사전 MC였다. 근데 내가 그만둬버렸다. 더 할 수도 있었는데 순전히 내 자격지심 때문에. 출연자로 무대에 서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한번도 못 나가보고 있다. 그걸 왜 그만둬가지고. 이런 일이 또 있었다. 고3 때 잠실 주경기장에서 <드림 콘서트>를 할 때 카메라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근데 리허설 도중에 내가 고향으로 내려가버렸다. 그때도 또래 가수들은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때 그냥 더 했어야 하는데.
-올해로 데뷔한 지 13년째다. 3년 후면 40대가 되기도 하고. 개그맨으로서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도 크겠다.
=방송을 50살까지는 했으면 좋겠다는 게 지금 내 꿈이다. 방송이 너무 좋다. 공중파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큰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방송을 즐기고 싶다. 꾸준히 방송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좋은 웃음은 뭐라고 생각하나.
=아무 생각 없이 봤는데 그냥 웃게 되는 것. 사람을 비방해서 웃는 게 아니라 개그를 하는 나 자신을 낮춰서 상대를 웃게 하는 웃음 아닐까. 서른 전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누구를 공격하면서 웃기려고 했는데 그 뒤로는 나를 더 낮춘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다보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나.
=상대가 웃어만 준다면 스트레스는 하나도 없다. 안 웃으면 그땐 정말….
-유쾌한 사람이 되는 노하우를 알려준다면.
=‘헐, 진짜, 대박.’ 이 말을 잘 써보라. 상대의 말에 리액션을 잘해주고 무조건 많이 웃어줘라. 그리고 자신을 낮춰라. 요즘은 다 자기 자랑하기 바쁜 세상이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 되레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오히려 인기인이 될 거다. 상대가 힘들 때 제일 먼저 찾게 되는 사람이 되는 거다. 결국 그런 사람이 최후에 웃게 되는 게 아닐까.
‘460만원 학자금 공약’은 실현될 것인가
“뭐라고? 녹음이 안 됐다고?” <청일전쟁> 첫 번째 녹음 날, 대형 사고가 났다. 신나게 첫 방송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녹음이 안 된 것이다. 결국 황영진과 개그맨 김한배, 게스트인 개그우먼 홍현희가 다시 모여 재녹음을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호된 신고식을 제대로 치른 덕일까. 팟캐스트 프로그램 순위 318위로 1회 방송을 시작한 이후 어느새 18위까지 쭉쭉 상승세다. 과연 황영진이 내건, ‘460만원 학자금 공약’은 실현될 것인가. 청년들이 직접 스튜디오를 찾아 고민을 털어놓고 재기발랄한 개그맨들이 조언을 덧붙이는 참여형 방송 <청일전쟁>은 팟빵과 몽팟, 아이튠즈에서 청취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