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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타인의 시선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 관계망 속에서 여자를 읽어내는 방법

<착하지 않은 여자들>

멘토 역을 맡은 명사의 강연이나 감성 에세이의 상투적인 문구 중에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말이 있다. 삶의 주도권을 잃지 말고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충고와 깨달음이 오가는 자리에서 잠시 이탈해,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가 서술자이자 주인공이 되어 인생을 극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만의 느낌과 감정으로 사소한 일상의 파문을 증폭하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등짝을 후려치며 ‘드라마퀸’ 같다고 놀린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지만, 쟤 인생의 나는 사소한 일에 호들갑 떨고 모든 화제를 자기 위주로 빨아들이는 대화의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을 드라마에 빗대야 한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배역을 품앗이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김인영 작가의 KBS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각자가 서술자가 되고 또 서술의 대상이 되는 촘촘한 관계망 속의 여성을 다룬다. 남편을 사이에 둔 연적 관계에서 시작해 모녀, 자매, 사제지간에서 빚어지는 갈등마다 각자의 콤플렉스가 돌출하고, 그로 인해 왜곡되는 진술은 타인의 목소리가 보태지며 비로소 온전한 상을 그린다. 결혼기념일에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남편에게 그 여자와 함께 먹으라고 설사약 넣은 도시락을 싸줬던 일화를 요리교실 수강생들에게 입담 좋게 풀어내던 ‘안국동 강 선생’ 강순옥(김혜자)의 쿨한 회고는 과거의 연적 장모란(장미희)과 재회하면서 풀리지 않은 울화로 드러난다. 우아한 흰옷을 차려입고 등장해 “난 곧 죽어요”라던 장모란은 수술이 잘됐음에도 스스로 삶의 의지를 버린 비련의 여주인공 역에 심취해 있고, 순옥은 이를 “꼴값한다”고 일갈하면서도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여고 때 교사 나말년(서이숙)의 주도로 따돌림을 당하다 퇴학당하고 집안의 사고뭉치가 된 순옥의 작은딸 현숙(채시라)은 망한 인생의 책임을 모조리 말년에게 전가하지만, 현숙이 분방하게 사는 동안 엄마의 공허를 감당하던 큰딸 현정(도지원)의 이야기가 보태지며, 유대가 강한 엄마와 큰딸의 관계에 살이 붙는다.

순옥이 모란을 재우고 먹이면서 소설 <불륜>을 선물하거나, 현숙이 충족되지 못한 사랑과 관심을 모란에게 얻는 모습은 가해자와 피해자, 원인과 결과로 나눠서 보면 괴이하기 짝이 없다. 다만, 각자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연장하고, 앙금을 풀어 콤플렉스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모란을 보자마자 버선발로 킥을 날렸던 순옥은 굳이 모란과 함께 살며 여러 술수를 꾸미다가도 모란의 인생, 그녀의 콤플렉스에 귀를 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순옥의 일방적인 연민이나 한풀이와 다를 수 있는 이유 역시, 각자 인생의 주인공일 타인들의 시선과 목소리 덕분이다.

+ α

당신 인생의 조연

죽은 줄 알았던 ‘철이 오빠’(이순재)를 길에서 마주친 모란은 이를 순옥에게 전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떨리는 순옥은 고운 옷을 입고 모란이 남편을 보았다는 길가를 종일 서성이지만, 타인의 눈엔 “부잣집 마나님이 부동산 보러 오셨나,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유동인구 체크하고 있다”고 코믹하게 묘사된다. 각자 애틋한 사연을 품고, 서로의 조연이 되는 장면들이 유독 빛나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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