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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욕심 내려놓으니 감정의 작은 알갱이들이 보이네”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15-04-15

<장수상회> 강제규 감독

“아직 최종 믹싱 마무리가 안 돼서 걱정이다.” <장수상회>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렸던 3월26일, 영화 잘 보겠다고 보낸 문자 메시지에 대한 강제규 감독의 답장이었다. 흥행 참패한 <마이웨이>(2011) 이후 오랜만에 내놓는 신작이라는 사실이 그의 입술을 더욱 마르게 했을 것이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부터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 <마이웨이>(2011)까지 덩치가 큰 영화만 찍어온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로맨스를, 그것도 30대나 40대가 아닌 70대의 사랑을 그린 <장수상회>는 다소 낯설다. 잘 알려진 대로 <장수상회>는 재개발을 앞둔 서울 변두리의 한 동네, 장수상회라는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는 노년의 직원 성칠(박근형)이 앞집 여자 금님(윤여정)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소동에 휘말리는 내용을 그린 이야기다. 전작과 달리 기술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3년이라는 공백 기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강제규 감독이 영리하고 노련하게 돌아왔다.

-지난 주말 김용화 감독 결혼식에 온 걸 봤다. 결혼 선배로서 뭐라고 조언해줬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얘기해줬다. 허허허.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린 날 최종 믹싱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시사회 하루 전날 믹싱을 체크했는데 사운드 밸런스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이 많았다. 작업을 다시 해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극장 가서 볼륨을 낮추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걱정과 달리 첫 공개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 많이 긴장했을 텐데.

=개봉할 때까지 계속 긴장할 것 같다.

-개봉을 앞둔 지금 무엇이 가장 신경 쓰이나.

=울림이 큰 이야기였기에 하고 싶다는 의지가 컸지만, 노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이 앞으로 다양하게 나오기 위해서는 이 영화부터 잘돼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니 부담도 되는 게 사실이다. 좀더 많은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지 궁금하다.

-그간 <장수상회> 같은 로맨스 드라마를 찍을 기회가 한번도 없었나.

=내 필모그래피를 보면 강제규라는 사람이 만들고 싶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이웨이>를 만들 때까지는 한국영화라는 큰 틀 속에 나를 대입해 생각해왔던 것 같다. <마이웨이>가 흥행에 참패한 뒤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면서 개인 강제규로 돌아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해 만든 영화가 <장수상회>다.

-차기작으로 <장수상회>를 선택하겠다고 하자 아내(배우 박성미)는 뭐라고 하던가.

=힘을 좀 빼고, 부담 없는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게 아내의 생각이었다. 흥행을 비롯해 영화 외적인 부분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만드는 걸 옆에서 계속 지켜봤으니 얼마나 걱정이 됐겠나. <장수상회>를 하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떤가라고 물어보니 “당신은 오히려 이런 영화를 더 잘 만들 거”라고 얘기해주더라.

-<장수상회>의 두 주인공인 성칠과 금님의 나이가 70대다. 주요 관객층이 20, 30대에서 중장년층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해도 부담스러운 연령대가 아닌가.

=남들이 잘 안 하는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선한 상상력이 배가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나이지만, 저 나이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사람에 대한 감정은 나이를 먹더라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캐릭터들이 어떤 상황에서 만나 어떻게 연출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70대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할까 같은 상상을 하며 작업을 하니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시나리오 초고는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화와 많이 다른가.

=이야기의 큰 줄기나 맥락은 비슷하다. 디테일이 많이 바뀌었다.

-각색할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나.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경쾌함을 잘 유지하는 것. 인물이 조•단역까지 포함하면 40명 가까이 등장한다. 각각 분량은 적더라도 조금 더 살아 숨쉬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는 것도 중요했고. 성칠과 금님의 사랑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주변 가족들에게서 발생하는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에 특히 신경썼던 것 같다.

-성칠을 캐스팅할 때 가장 고민됐던 건 뭔가.

=누가 성칠을 연기하면 흥미로울까라는 상상을 했을 때 박근형 선생님만 한 분이 없었다. 그간 여러 드라마에서 포마드를 머리에 바르고, 정장을 입었던 그가 백발의 동네 할아버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박근형 선생님도 그런 변신을 흔쾌히 동의해주셨다.

-캐스팅을 할 때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도 봤나.

=평소에 TV를 많이 보진 않는데 그 프로그램은 봤다.

-박근형 말고 다른 후보 배우는 없었나.

=없었다.

-보통 1순위 배우가 캐스팅 안 되는 것을 대비해 2, 3순위 후보를 따로 생각해놓지 않나.

=그렇긴 한데 박근형, 윤여정 선생님은 2순위 배우가 없었다. 시나리오 작업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두분이고, 시나리오를 드리자마자 곧바로 캐스팅이 됐다.

-금님 역할에 윤여정을 캐스팅한 이유는 뭔가.

=사람들은 윤여정 선생님이 소녀 같은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반대로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귀엽고 예쁜 모습이 많이 보였다. 평소 윤여정 선생님의 ‘절친’인 아내로부터 팁을 얻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팁이었나.

=아내가 윤여정 선생님을 만나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선생님 얘기를 해준다. 그가 여러 면모를 가지고 있고, 드라마나 영화 속 윤여정은 지극히 그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윤여정이라는 배우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앞으로 저 배우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생기면 관객이 잘 모르는 그의 이면을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장수상회> 직전에 찍었던 단편 <민우씨 오는 날>이 있긴 하나, 장편 촬영은 <마이웨이> 이후 3년 만이다. 크랭크인 날 기억이 많이 날 것 같다.

=많은 느낌을 담아내야 하는 신이 몇개 있었다. 그 신 중 하나를 어쩔 수 없이 촬영 첫날 찍게 됐다. 원하는 대로 잘 찍으면 이 영화 준비를 잘한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박근형 선생님이 남은 촬영을 큰 걱정 없이 냉정하게 잘 이끌어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을 주셨다.

-전작에서 꽉 찬 화면을 주로 찍다가 인물의 감정에 집중해 가야 하는 드라마를 찍어보니 낯설진 않던가.

=요리할 때 재료를 20가지 정도 넣어야 하는데 <장수상회>는 재료가 5가지밖에 안 들어가 있더라. 무언가가 비어 보이고, 싱겁고 맛이 없는 것 같고. 항상 숏을 꽉 채우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전체 회차의 20%를 찍을 때까지는 자꾸 스스로 의심했다. 이렇게 찍어도 되는 건가. 쌓여가는 신들을 조금씩 보면서 의심이 신뢰감으로 바뀌었다.

-촬영은 몇 회차로 진행됐나.

=처음에는 조감독이 55회차 정도로 스케줄을 짜왔다. 속으로 생각했던 회차와 달라 왜 이렇게 회차가 많냐고 물어보니 박근형, 윤여정 선생님을 모시고 하는 작업이라 좀더 편안하고 쾌적하게 찍을 수 있도록 짰다고 하더라. 그걸 내가 생각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이 제시간에 오시고 열정적으로 작업하셔서 촬영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 많았다.

-윤여정 선생님은 너무 일찍 퇴근해서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웃음) 리허설을 많이 하고 테이크를 적게 간 이유가 뭔가.

=테이크를 아무리 많이 가도 배우의 감정이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자연스럽게 보일 때는 첫 번째 테이크를 능가하는 숏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배우의 감정이 중요한 이야기인 까닭에 배우가 편하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테이크를 오케이로 이끌어내기 위해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리허설을 해야 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한축이 성칠과 금님의 사랑 이야기고, 또 다른 축이 장수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재개발을 반대하는 성칠을 금님이라는 미인계를 이용해 설득하는 이야기다. 이 두 가지 축이 영화의 반전을 향해 달려가는 구조이다 보니 반전이 드러나기 전까지 금님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알쏭달쏭하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굉장히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영화의 반전이 드러나기 전까지 금님은 재개발을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칠에게 접근했지만, 서로 가까워지면서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여러 감정이 맞물려 있는데 관객에게 어느 한쪽으로 생각하지 않게끔 밸런스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중국집 이름이 ‘철가방 휘날리며’였다. 전작의 제목을 유머로 활용할 줄 몰랐다. (웃음)

=원래는 오복성이었다. ‘철가방 휘날리며’ 아이디어를 낸 미술팀에 이게 재미있냐, 낯간지럽지 않냐고 물었다. 감독님이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지만, 관객은 재미있게 받아들일 거라고 하더라. <태극기 휘날리며>를 떠올려도 유쾌하게 다가오지, 불편하진 않을 거라고 해서 간판 제목을 그렇게 짓게 됐다.

-강제규 감독 영화 하면 폭탄 터지는 장면이 익숙한 반면 남녀 주인공이 일상적인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거의 없지 않았나. 그런 까닭에 성칠과 금님이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꽤 낯설었다.

=과거에는 큰 감정들이 만나야 그보다 큰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지금은 작은 감정끼리 서로 잘 만나면 큰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감정의 작은 알맹이들이 보이고, 그 알맹이들을 가지고 좀더 큰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한국과 중국을 바쁘게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중국영화에 진출하는 한국 감독들이 많은데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영화가 있다면 중국이 됐든, 일본이 됐든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이 감독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다른 제작사나 작가들이 쓴 시나리오를 우선적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중국 메이저 투자배급사 완다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투파창궁>은 어떻게 발전되고 있나.

=<투파창궁>은 아이템이 재미있어서 단계적으로 밟아가자고 논의한 상태다. 기획개발 계약만 해서 시나리오를 만든 뒤, 그 작품의 연출을 직접 할 건지는 그 이후에 얘기하기로 했다.

-중국의 펑샤오강 감독과 함께 제작 총괄(EP)로 참여하는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감독 손하오•출연 진백림, 손예진)가 지난 3월28일 제주도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펑샤오강 감독은 오랜 영화 동료이자 가장 가깝고 존경하는 선배 영화인이다.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 있다면 한•중 합작영화로 만들어 한국과 중국에 같은 날 개봉하면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항상 해왔다. 마침 펑샤오강 감독의 조감독을 10년 동안 했던 후배인 손하오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제주도에서 촬영한다고 해서 공동제작 총괄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장수상회>를 찍기 전에 준비했던 시나리오가 나왔는데 그걸 보고 결정할 것 같다. 계절이 중요한 영화라 잘 준비해 내년 상반기 봄에 촬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도치 않게 지난 2년 동안 강제규 감독을 무려 세번이나 인터뷰했다. <장수상회> 직전에 찍었던 단편 <민우씨 오는 날>(2014) 촬영할 때 만났던 그는 오랜만의 인터뷰였던 까닭인지 초조하고 긴장했으며, <장수상회> 후반작업 때 만난 그는 영화가 아직 공개되기 전이라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오랜 시간 걱정했던 것에 비해 영화의 반응이 좋았던 까닭일까. 이 인터뷰 때 만난 그는 이제야 한숨을 돌린 듯 편안해 보였다. 3년 동안 와신상담해 내놓은 <장수상회>를 그도 이제는 부담없이 즐겨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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