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하셨습니다.” 당직 수련의가 시트를 끌어당겨 아내의 얼굴을 덮었다. 시트 위로 머리카락 몇올이 빠져나와 늘어져 있었다.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으로 떨어지자 램프에 빨간불이 깜빡거리면서 삐삐 소리를 냈다. 환자가 이미 숨이 끊어져서 아무런 처치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삐삐 소리는 날카롭고도 다급했다. 옆 침대의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저편으로 돌아누웠다.(…) 라고 김훈 작가의 <화장>은 시작한다. 고작 40장 남짓한 이 단편소설은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권한다, 는 말을 하면서 추천했다. 내가 처음 들은 소식은 2005년 겨울 무렵 허진호가 이 소설을 연출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허진호는 그 대신 <행복>(2007)을 찍었다. 그런 다음 여러 차례 드문드문 영화화가 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뒤이어 들려오는 소문은 결국 포기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영화에서 소설 <화장>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어 섰다. 누군가는 은밀하게, 누군가는 공공연하게 이 소설을 건드리고 싶어 했지만 결국에는 어디에선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임권택은 <취화선>(2002)을 막 찍고 난 다음이었으며, 그런 다음 <하류인생>(2004)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권택이 김훈을 읽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감독님을 뵈면 이따금 <칼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드셨다. 하지만 단 한번도, 내 기억으로는 단 한번도, <화장>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런 다음에도 임권택은 <천년학>(2007)과 <달빛 길어올리기>(2010)를 찍었다. <화장>은 임권택의 102번째 영화이다.

추은주와 아내라는 두개의 세계

소설은 일련번호를 붙인 다음 여섯개로 다시 나누었다. 화장(化粧)품 회사 상무인 쉰다섯살의 나는 오랜 시간 뇌종양으로 입원한 아내를 병간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무실에서 매일 업무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낸다. 게다가 전립선염으로 수시로 가득 차는 방광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런 내게 은밀한 비밀이 있는데 그건 오년 전에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 추은주에게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마음이다. 추은주는 젊고, 건강하고, 무엇보다 피어나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당신은 목둘레가 둥글게 파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당신의 목 아래로 당신의 빗장뼈 한쌍이 드러났습니다. 결재서류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칸막이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가슴의 융기가 시작되려는 그곳에서 당신의 빗장뼈는 당신의 가슴뼈에서 당신의 어깨뼈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김훈) 물론 나는 그녀를 하급직원에 대한 예의로 대했고, 그녀도 나를 회사 상무에 대한 깍듯한 예의로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죽었다. 사흘 동안 장을 치른 다음 아내를 화장(火葬)했다. 추은주는 남편이 워싱턴에 발령 나자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났다. 나는 아내가 남겨놓은 애견 보리를 안락사시킨 다음 오랜 동안 결정을 망설이던 두개의 광고 컨셉 중 “내면여행”을 버리고 “가벼워진다”를 결정한다.

이 소설에는 아무 사건도 없고 일시적인 감정적인 동요는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김훈 작가는 종종 자신이 신문기자 출신이라는 것을 일깨우듯이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어떤 연민도 없이 무자비하게 관찰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기술해나간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의 장을 끝내고 다음 장을 열면서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라고 호소하듯이 부를 때 무언가 뭉클하듯이 이 남자의 때늦은 마음이 사무치게 가련해진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의 문체를 찍을 수 있는 예술이 아니다. 카메라를 들고 소설 안으로 들어설 때 문학이 된 언어는 일제히 자기의 자리에서 철수하기 시작할 것이다. 은유는 문을 잠글 것이며, 문장들 사이에 불 밝혀졌던 등불들은 차례로 꺼지면서 자신의 공간을 온통 어둠 속에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거기에 조명을 켜고 배우들이 소란스럽게 붐비기 시작하고 그들의 육신을 빌려 대사를 할 때에도 문학은 영화에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인색하게 내어주지 않을 듯이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오직 작가에게만 허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작가가 문장을 쓸 때만이 그 문장이 작가의 존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화감독은 소설 안에서 외롭다. 낯선 곳을 찾아온 기분. 조금도 환대받지 못한 채 그렇게 버림받은 상황.

임권택은 소설 <화장>을 읽은 다음, 아마도, 행간을 살펴보는 대신 먼저 인물들 사이의 거리를 와해시켰다. 그런 다음 마치 다시 시작하지 않고서는 독서가 불러일으킨 감흥에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는 듯한 방법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이것이 임권택의 인사법일 것이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쉰다섯살 상무인 일인칭 나는 오정식 상무라는 이름을 얻고 안성기라는 육신을 가졌다. 회사에는 지금 막 입사한 추은주 대리가 그의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이때 김훈 작가는 추은주를 그저 공손하게 예의를 갖춰 감상하듯이 일정한 거리 바깥에서 수사를 동원한 관찰의 자리에서 즐기고 있다면 임권택은 자석에 이끌리듯 걷잡을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더듬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래서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멀리 출장을 와서 텅 빈 새벽 해안가를 바라보다가도 그저 침대로 시선을 돌리면(리버스숏) 어느새 벌거벗은 그녀의 몸이 하얀 시트 위에 누워 있는 (환상의) 숏이 찾아온다. 추은주는 조금씩 그 시선을 알아차린다. 욕망의 신호들. 그렇게 세계 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에 영화의 시청각 기호들이 반응하기라도 하듯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잠깐. 나는 지금 절반만을 설명했다. 지금 오 상무의 곁에는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있다. 첫 번째 수술을 마쳤지만 종양은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면서 생명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은 매일매일 바짝 말라간다. 그런 다음 그녀의 구멍에서 똥과 오줌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죽음의 법칙. 그렇게 세계 안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소멸해간다. 병원이라는 기술은 생명이라는 힘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장치이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피로에 지친 오 상무는 그래도 저녁이 오면 병원을 찾아와 그녀의 침상 곁에서 수발을 들며 잠을 청한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사람은 추은주, 그녀이다. 이제 죽음 위에 욕망이 겹쳐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찾아오는 추은주의 인서트숏은 때로 병원의 장면을 절단하듯이 침입해 들어온 다음 밀어낸다. 두개의 숏은 공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일종의 칸막이로서의 무참한 편집. 그건 또한 영화의 약속이다. 그런 다음 각자 활동했던 두개의 세계가 겹쳐지는 순간 죽어가는 아내는 곁에 누워 있는 남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알게 된다. 속수무책의 배움. 그녀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녀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매일 죽음은 그렇게 그녀 곁을 한 걸음씩 찾아온다. 그리고 죽는다. 영화도, 소설도, 그녀의 심장이 멈추고 심전도 계기판이 0을 가리켰을 때 시작한다.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혹은 그 사이의 이야기. 그런 다음 사흘간의 장례식과 평행하면서 소설은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나간 시간의 과거 시제를 따라가고, 영화는 플래시백을 불러온다.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들

이때 영화가 소설에 대해서 자기를 과시하는 듯한 장면이 두번 나온다. 한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펼치면서 모래사막 위를 걸어가는 긴 상여 행렬 장면이다. 모두 검은 상복을 입었고 죽은 아내가 마치 깊은 잠에라도 빠진 듯이 관에 누워 있다.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만 같은 표정. 그때 상주인 오 상무는 무언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아내를 내려다보는 대신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검은 상복을 입은 행렬 안에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귀걸이까지 한 추은주가 한껏 머릿결을 쓰다듬으면서 따라오는 중이다. 이 장면은 소설에 없을 뿐만 아니라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이미지를 임권택은 예전에 찍은 적이 없다. 영화 <화장>은 자기의 세계를 해독하기를 요구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여기서 글과 세계의 관계는 중단되고 이미지가 또 하나의 가시적인 세계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의 이미지를 읽어야 한다. 다른 또 하나의 장면은 회식이 끝난 다음 먼저 떠나는 길에 추은주에게 와인을 선물받은 오 상무가 문득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차를 되돌려 밤새 시내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놓친 채 그 허망한 마음으로 유흥가를 걸어가는 숏이다. 한손에는 와인 병이 들려 있고 오 상무는 마치 흐느적거리듯이(슬로모션) 걸어간다. 그때 분명히 이 남자는 울고 있었다. 이 상황도, 이 장면도, 이 순간도 소설에는 없다. 임권택은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예술가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을 느린 속도로 한껏 늘려놓고 있다. 우리가 임권택의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슬로모션을 본 것은 언제였던가. 아마도 1980년 <짝코>. 무엇이 이미지에 감정이 누설되는 것을 허락해도 괜찮다고 여기게 만든 것일까. 나는 이 장면이 오 상무의 커다란 얼굴, 안성기의 클로즈업이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여기서 임권택은 욕망의 표정, 죽음의 얼굴, 그 사이를 건너가는 재난의 시간을 찍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그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가장 오랜 전투. 욕망. 그런데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죽음.

사흘간의 장례식이 끝나면 소설은 자기의 세계가 사라졌음을 받아들인다. 영화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다. 오 상무는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와 아내의 유품을 모두 불태운다. 그때 그는 죽은 아내가 살아생전 자기 앞으로 보낸 와인이 담긴 택배를 발견한다. 물끄러미 거기에 멈춘 시선. 언젠가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병실에서 추은주를 떠올리며 마시던 것과 같은 와인. 거기에 담긴 뜻. 그 시간에 추은주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뵙고 싶다면서 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말하자면 소호리 별장에서의 이 마지막 숨바꼭질은 욕망과 죽음의 마지막 내기이다. 이때 이것이 오 상무와 추은주 두 사람 사이의 이항관계가 아니라 여기에 죽은 아내의 유령이 함께 참석하여 벌이는 삼항관계의 얼룩진 왜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핵심이다. 아내의 자리를 괄호친 다음 다시 아내가 거기에 나타났을 때 거의 아무것도 아닌 사라진 존재인 그녀가 사실상 거의 그 전부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림자가 된다. 이때 이제까지 환상의 자리를 차지했던 추은주가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찾아올 때 반대로 아내는 실재의 자리에서 환상의 자리로 물러난 다음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돌아온다. 가시적인 존재의 환상으로부터 비가시적인 존재의 환상에로의 이행. 이 둘 사이의 교환관계는 경제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마치 채무관계처럼 셈을 치른다. 곤경에 처한 선택. 죽지 않으려는 죽음.

죽음 대신 선택한 것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 오 상무는 죽은 아내가 키우던 애견 보리를 안락사시키고 그런 다음 추은주 문자를 전화기에서 삭제하고 나서 회사 홍보팀에 광고 컨셉을 “가벼워진다”로 지시한다. ‘그날 밤,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내 모든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버리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 (끝) 영화에는 이 마지막 대목이 없다. 그 대신 (…) 오 상무는 죽은 아내가 키우던 애견 보리를 안락사시키고 그런 다음 추은주 문자를 전화기에서 삭제하고 나서 회사 홍보팀에 광고 컨셉을 “가벼워진다”로 지시한다. 그리고 대낮 정오 길거리를 활기차게 걸어간다. 그때 명량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끝) 나는 둘 사이의 간극을 일깨우고 싶다. 김훈 작가는 일인칭 주어의 내면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침잠해 들어가면서 잠든다. 나는 그 잠이 마치 죽음처럼 읽힌다. 임권택은 그걸 찍을 생각이 없다. 그저 멀리서 망원렌즈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으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제자리걸음을 한 것만 같은 오 상무의 걸음만이 있다. 여기엔 욕망도 죽음도 없다. 증발해버린 욕망. 말라버린 죽음. 그저 버석거리는 모래와도 같은 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오 상무는 그렇게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인터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