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레이크는 1940년대 필름누아르의 스타다. 당시는 누아르의 팜므 파탈들이 스타덤을 형성할 때인데, 이를테면 에바 가드너, 바버라 스탠윅, 리타 헤이워드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외형에서부터 남성을 압도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관능적인 몸매 혹은 큰 키는 물론이고, 공격적인 눈빛까지 돋보였다. 이들에 비하면 팜므 파탈로서의 베로니카 레이크의 외형은 너무 왜소했다. 대단히 작은 키에(1m50cm 겨우 넘는다), 몸매도 결코 도발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 시기 최고의 팜므 파탈’로 대접받았다. 한쪽 눈을 거의 가리는 긴 금발로 표현되는 레이크 특유의 ‘모던하고 범죄적’인 분위기가 그녀의 매력이 됐다. 레이크의 말에 따르면 ‘남들이 벗었다면, 자신은 머리칼만으로 유혹’했다. 일반적인 팜므 파탈들과 다른 개성, 그것이 레이크의 스타성이 됐다.
앨런 래드와 필름누아르의 커플로 유명
베로니카 레이크가 팜므 파탈의 스타 대열에 합류한 것은 <백주의 탈출>(This Gun for Hire, 1942)을 통해서다. 프랭크 터틀 감독이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필름누아르다. 여기서 레이크는 카바레에서 마술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나온다. 특유의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여유 있는 웃음을 띠며, 남성 관객의 시선을 한번에 빼앗는 여성이다. 터틀 감독에 따르면 레이크의 모습에선 ‘기계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났다. 유난히 번쩍거리는 금발은 미끈한 마네킹의 그것처럼 보였고, 부서질 듯 대단히 가는 얼굴선은 과거에는 못 보던 낯선 인상이었다. 그것을 터틀 감독은 ‘기계적이고 세련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레이크는 자신의 스크린 파트너인 앨런 래드를 만난다. 킬러인 앨런 래드는 ‘까마귀’(Raven)라고 불리는 냉혈한이다. 무표정한 킬러 래드의 모습은 뒷날 알랭 들롱의 그것과 비교된다.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와 납처럼 굳은 표정의 킬러는 래드의 개성이 됐고, 레이크는 그 킬러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레이크는 범죄자를 피하기보다는 왠지 그 어두운 자기장에 끌려가는 ‘위험한’ 캐릭터이다. 레이크는 킬러의 인질이 되지만, 동시에 그와 우정을 나누는 파트너가 된다. 결국 그 우정이 냉정한 킬러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말이다.
<백주의 탈출>은 대단한 흥행 성공을 거뒀고, 두 배우를 단번에 스타로 만들었다. 할리우드는 두 배우가 주연하는 필름누아르를 연속하여 내놓는다. 이번엔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표 작가인 대시엘 해밋의 <유리열쇠>가 각색됐다. 영화 <유리열쇠>(감독 스튜어트 헤이슬러, 1942)에서 래드는 부패한 정치거물의 오른팔로, 레이크는 그 정치인과 경쟁하는 상원의원의 딸로 나온다. 말하자면 적대진영의 두 인물이다. 그런데 상원의원 딸인 레이크는 여기서도 갱스터 같은 남자인 래드에게 첫눈에 반한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위험한 관계를 이어가는 레이크의 태도 자체가 누아르에 긴장감을 불러오는데, 나중에는 정치거물마저 레이크에게 반하면서 세 사람은 대단히 위험한 삼각관계를 그려나간다. 이 영화를 통해 폭력과 위험 앞에 냉정함을 잃지 않는 레이크의 여유 있는 태도는 다른 팜므 파탈들과는 구별되는 매력으로 각인됐다. 팜므 파탈로서의 레이크는 히스테릭하지 않았다.
잠시 각자 활동했던 두 배우는 4년 뒤 다시 만나 <블루 달리아>(1946)를 내놓았다. 역시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조지 마셜이 연출했다. 래드는 종전 뒤의 귀향용사로, 레이크는 비밀 많은 나이트클럽 주인의 아내로 나왔다. 래드는 제대하자마자 졸지에 살인자로 오인돼 경찰의 추적을 받는데, 레이크는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돕는다. 레이크 특유의 여유 있는 태도로 비오는 밤거리를 헤매는 래드를 자신의 차에 태우는 시퀀스는 <블루 달리아>의 명장면으로, 또 두 배우의 영원히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아 있다.
오마주의 대상, 금발의 긴 곱슬머리
베로니카 레이크는 억척엄마 덕분에 배우가 됐다. 10살 때 부친이 바다의 시추선에서 사고로 죽는 바람에 레이크는 심한 충격을 받았고, 이는 결국 평생 그녀를 괴롭히는 정신적 쇼크가 됐다. 스크린에선 여유 있는 배우였지만, 아쉽게도 현실에선 극심한 신경증을 앓았다. 10대 때 모친이 딸의 뛰어난 외모에 주목하여 연기학교에 보냈고, 또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레이크는 19살 때 <나는 날개를 원했다>(1941)에서 클럽의 가수로 나오며 주목받았다. 푸른 눈이 호수처럼 맑다고 하여 ‘레이크’(Lake)라는 예명을 갖게 됐고, 또 여기서 특유의 긴 금발 곱슬머리가 그녀에 대한 페티시즘의 상징이 됐다.
곧장 코미디의 장인인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눈에 띄어, <설리반의 여행>(1941)에서 조엘 매크레아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마치 ‘채플린과 키드’처럼 두 남녀는 부랑자 차림으로 미국을 돌며, 하층민의 가난한 현실을 목도하는 내용이다. 거물감독, 스타배우와의 협업과 흥행 성공으로 레이크는 할리우드에 당당히 이름을 알리게 된다. 여기서 발휘된 코미디 감각은 당시 미국에 망명해 있던 프랑스 감독 르네 클레어의 주목을 받아, <나는 마녀와 결혼했다>(1942)에서 주연을 맡게 했다. 과거에 청교도 집안에 의해 화형됐던 마녀가 복수로 그 집안에 불행한 결혼이라는 영원한 저주를 걸었는데, 자신이 인간으로 환생한 뒤 하필이면 그 집안의 남자에게 반하고 마는 희극이다. 그리고 그해부터 앨런 래드와의 ‘누아르 커플’ 시대가 열렸다.
거칠 게 없어 보이던 레이크의 발목을 잡은 건 어릴 때의 충격이 주요 원인이 된 신경증이었다. 레이크는 촬영 도중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고, 극심한 분노에 빠져 동료들과 싸우기도 했다. 술을 퍼붓듯 마시더니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결혼과 이혼이 이어졌는데, 그런 반복의 주요 이유도 히스테리와 술이었다. 앨런 래드와의 협업, 특히 두 사람 사이의 3대 누아르로 꼽히는 <백주의 탈출> <유리열쇠> <블루 달리아>가 없었다면, 배우로서도 잊힐 정도로 활동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레이크는 필름누아르의 운명처럼 짧게 만발하고, 금세 시들었다.
그런데 다른 팜므 파탈들과 구별되는 모던한 개성, 그것이 레이크의 이름을 영화사에 남겼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1988)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제시카는 바로 레이크에 대한 오마주이며, 또 <LA컨피덴셜>(감독 커티스 핸슨, 1997)에서 킴 베이싱어가 연기한 인물도 레이크를 인용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레이크의 개성을 시대를 앞선 매력으로 해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