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iew
[유선주의 TVIEW] 다행스러운 폭력의 환기

MBC 드라마 <킬미 힐미>

납치, 감금, 폭발, 난폭운전, 자살예고 등 여주인공이 휘말리는 사건사고만 나열하면 로맨틱 코미디보다 막장으로 기우는 드라마. 우연히 채널을 돌렸다면 검은 아이라인을 그린 지성이나 여장한 지성, 비명을 지르거나 통곡하는 황정음을 만날 확률이 높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 무슨 괴작인가 했는데, MBC 드라마 <킬미 힐미>는 ‘해리성 주체장애’(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재벌 3세 차도현(지성)과 그의 비밀 주치의가 된 정신과 레지던트 오리진(황정음)의 힐링 로맨스란다. 파괴적이고 자기애가 강한 인격인 신세기, 밥솥을 분해해서 사제폭탄을 만드는 페리박, 자살 지원자로 불리는 안요섭 등 차도현의 인격들은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고, 이들을 케어하는 리진은 돌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비명과 안도의 눈물을 오간다. 여주인공을 이렇게 계속 공포와 위험에 빠뜨리는 로맨틱 코미디가 또 있었나 싶다.

잠시 드라마에 숱하게 반복되는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자.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남자들의 원시적인 주먹다툼이다. 현실에선 경찰차가 등장해 싸움을 일단락지을 때까지 여성은 공포와 망신을 피할 수 없는데,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도 싸움을 통제한다. 어쩌면 판타지는 이 남자와 저 남자 모두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둘의 분쟁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전한 위치인지도 모른다. 오리진 역시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 속성을 두루 갖춘 캐릭터다. 영리하고, 유일하며, 솔직하다. 도현의 인격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이다. 그런데도 드라마 속의 리진은 완벽하게 안전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장르 안에서 너무 오래 반복되어 무감해진 폭력을 환기하는 역할을 맡는다. 싫다는데 억지로 손목을 잡아끌고 오토바이 헬멧을 씌우려드는 세기에게 진심으로 짜증을 내고 밀치거나, 자살하려는 요나를 구하러 옥상에 갔다가 무너지는 파이프 더미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기도 한다.

또한 <킬미 힐미>는 정신없는 소동극으로 코믹하게 넘어간 폭력도 제3자의 시선을 다시 거친다. 차도현의 교대인격인 17살 여고생 안요나와 리진이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장면은 지성이 틴트를 바르고 분홍색 교복을 입은 여성인격을 연기함에도 구경하는 이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남자가 여자를 때린다’고 언급된다. 오리진의 지도교수 석호필 박사(고창석)는 리진이 두번이나 응급실에 실려오게 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중인격 환자와 정신과 의사. 두 사람이 서로 지워진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교감하는 드라마에서 굳이 폭력만 집요하게 들춘 이유는, 아픈 남자와 밝고 명랑한 여자의 지워진 기억에 양육자의 신체적, 정신적 학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방관자가 침묵하고, 피해자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고 덮어버린 고통스런 기억을 되살리는 드라마가 다루는 폭력이 무신경하지 않아 다행이다.

“이름이 뭐야?”

<킬미 힐미>는 등장인물과 등장인격의 작명에 숨겨진 과거와 관련한 트릭과 복선이 깔려 있다. 언제나 나직한 목소리로 “차도현입니다”라고 말하던 남자는 진짜 차도현이 아니었고, 오리진의 근원은 차도현이며, (구)차도현의 교대인격인 신세기는 성냥갑에 적힌 ‘new centry’에서 유래했단다. 아아! 웃기고 또 슬프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