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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이거나 코카인 누아르이거나

01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읽는 세 가지 경로 - 어지러운 서사, 그리고 미국의 정신사적 기원

그저, 이게 뭔가, 싶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그런 영화다. 코카인에 취한 내러티브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신작 <인히어런트 바이스>다.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영화화된 적이 없는 토머스 핀천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영화의 지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미지의 땅을 탐험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우리를 누아르의 세계로 초대한다. 비밀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여인의 등장, 탐정과의 만남, 그리고 음모로 가득한 사건 의뢰 등. 하지만 거기까지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탐정이 진실 앞에서 미끄러지며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누아르의 서사적 틀을 빌린 후, 우리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에서 헤매게 한다. 기이한 영화적 경험.

원심력의 내러티브

우리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1997)와 <매그놀리아>(1999)를 연출한 감독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매그놀리아>에서 퀴즈쇼를 중심에 놓고 다수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는 로버트 알트먼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다(실제로 그는 자신이 로버트 알트먼의 적자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과 로버트 알트먼, 그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바깥으로, 하나에서 다수로 퍼져나가게 하는 데 탁월한 감독들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이 지배하는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대하는 방식, 또는 그에 대한 선입견과 싸워왔고, 이를 통해 또래 감독들(가령 크리스토퍼 놀란, 웨스 앤더슨, 대런 애로노프스키 등)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이러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서사적 취향이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처럼 다수의 인물과 다수의 사건이 이리저리 얽히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이 서로 자리를 바꾸고, 서브플롯이 또 다른 서브플롯으로 이어지면서 영화가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한다. 루이스 브뉘엘이 <범죄에 대한 수필>(1955)에서 선보였던 서사적 시도를 몇배는 더 강렬하게 밀어붙인 듯한 이 작품은 서사의 진행에 대한 예상이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예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에게는 할리우드의 인과율적인 서사적 논리가 코카인의 환각보다 더 거짓의 세계인지도 모를 일이다. 로버트 알트먼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시작했지만, 이제 폴 토머스 앤더슨은 ‘마스터-로버트 알트먼’의 자장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적 삶은 <마스터>(2012)에서 마스터 없는 삶을 살기로 결단했던 프레디의 성공적 버전이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두고, 초현실주의적인 자동기술법의 영화라 불러도 좋고, ‘코카인 누아르’라 불러도 좋다. 물론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인 설정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마스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영화는 과잉된 기교와 서정성, 현실과 초현실, 리얼리즘과 오페라의 격정이 묘한 긴장을 이루며 영화를 풍요롭게 한다. 특히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현실(리얼리티) 속에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이 불쑥 끼어들 때 발생하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충만하다. <인히어런트 바이스> 역시 초현실주의적인 자동기술법에 의존한 듯한 서사를 구축하면서도, 탐욕스러운 부동산 개발과 마약 범죄가 만연했던 1970년대 미국 사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초현실주의적인 자동기술법으로 그린 1970년대 미국의 초상화인 셈이다. 실제로 폴 토머스 앤더슨은 줄곧 미국 사회의 치부를 건드리는 영화적 소재를 다뤄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보기에, 미국은, 아니 미국 사회의 욕망은 이미 오래전에 병들었다. 그는 미국 사회의 병든 욕망의 추악성을 도박 산업(<리노의 도박사>), 섹스 산업(<부기 나이트>), 방송(<매그놀리아>), 석유 산업(<데어 윌 비 블러드>)을 경유하며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미국 사회의 정신사적 기원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해왔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전반적으로 몽롱하면서도 의뭉스럽고, 의뭉스러우면서도 신비스러우며, 신비스러우면서도 음울하고, 음울하면서도 코믹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코믹한 분위기가 뜬금없이 펼쳐지는 닥(와킨 피닉스)의 슬랩스틱 연기에서 비롯된다면, 코카인을 깊게 빨아들인 듯한 몽롱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60mm 필름으로 촬영된 거칠면서도 아련한 질감의 화면과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음악적 페르소나로 자리를 굳힌 조니 그린우드(록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의 사운드트랙에 힘입고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마스터>에서 웅장하면서도 때로는 섬세한 조니 그린우드의 사운드트랙과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스탠더드 재즈 음악을 함께 사용하며 1950년대의 시대적 공기를 흡수하려 했던 것처럼(또한 <부기 나이트>에서 쉬지 않고 들려오는 펑키 음악으로 1970년대를 되살려냈던 것처럼), <인히어런트 바이스> 역시 샘 쿡, 닐 영, 무엇보다 ‘캔’의 음악을 통해 당시의 라디오를 켜놓은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고유의 하자, 또는 죄의 잔상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지금까지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끝맺는다. 영화의 말미에 반정부 운동으로 죽은 척 위장하여 집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를 자식 곁으로(또는 남편이 부인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지금까지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한데 머무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매그놀리아>에 등장한 두명의 아버지를 기억하라. 개구리 비가 쏟아지던 날, 영화에 등장했던 세명의 아버지 중 두명의 아버지가 목숨을 잃는다. 이렇듯 개구리 홍수로 온 땅을 치리라던 출애굽기의 심판은 죄 많은 아버지를 겨룬다. 죄지은 아버지, 그리고 그의 자식. 그것이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다. <매그놀리아>에서 반복되는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았어”라는 대사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영화 대부분이 미국 사회의 과거를 다루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닥은 옛 연인인 샤스타(캐서린 워터스턴)에게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이 그가 이 괴상한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히피 문화에 대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가치 판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1970년대 미국 사회의 히피 문화(와 그 계승자들)에는 (<매그놀리아>의 도니의 말처럼) 아버지(세대)의 죄가 덧씌워져 있다. 무력한 희생자들. 꽤 경쾌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현실 인식에는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유의 하자’(inhernt vice). 아무리 감춰져 있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죄의 잔상. 그리고 그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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