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가 에세이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을 출간했다. 90년대 후반부터 SF작가로 활동한 듀나는 소설 집필과 더불어 각종 매체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사회 곳곳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다. <씨네21> 초창기부터 영화에 관한 글과 평론을 기고해온 오랜 필진이기도 하다. 광활한 여백이 연상되는 제목에서부터 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가능한 꿈의 공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은 ‘잡식에세이’다. 영화에 관한 글과 사회 비평을 비롯해 극장 환경, 디지털 문화 등 듀나가 꾸준히 관심을 표현해온 이슈들까지 빼곡하게 담았다. 듀나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SF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영역을 커버한다. 일반적인 이야기꾼은 현실세계에서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SF작가는 존재 가능한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룬다.” 뾰족한 듯 섬세하고, 냉정한 듯 사려깊은 그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무심결에 지나치고 말았던 공간들의 존재를 감지하게 될 것이다. 책 너머 다른 이야기도 들어보고자 듀나에게 필담을 청했다.
-여러 지면과 게시판을 통해 독자와 만났지만 인터뷰는 낯섭니다. 평소 글을 쓸 때의 환경도 궁금한데요. 습관이나 원칙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니 제가 마치 금욕적인 프로페셔널리즘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안 그렇습니다. 원칙이 있어도 못 지켜요. 프로페셔널한 장르 작가에 대한 판타지는 있지만 끝까지 판타지로 남겠지요. 시간 관리는 늘 엉망이고 마감 몇 시간 전에 초치기를 하고 전 제가 하는 일에 확신이 없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습니다. 작업은 그냥 아무 데에서나 합니다. 모바일 환경 덕택에 이게 가능해졌죠. 이제 데스크톱 컴퓨터로는 작업하지 않아요. 전철 안에서 의외로 작업이 잘되고 침대 위에 굴러다니면서도 쓰는 편이고요. 이전에는 집중하려고 도서관 같은 곳을 시도해봤지만 전 어느 정도 어수선한 환경에서 작업이 더 잘되더군요. 지금은 방 안을 빙빙 돌아다니면서 태블릿으로 쓰고 있습니다. 답변을 처음 시작할 때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코미디 빅리그> 재방송을 들으며 침대에 쪼그리고 있었어요. 그 사이사이에 화장실, 부엌 등을 방황했고요. 멋진 신세계입니다.
-아카이빙은 어떻게 하나요. 고수하는 DVD, 책, 자료 정리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드디스크에 ‘원고’ 폴더를 만들어 넣어둡니다. 관리하기 어려워지면 ‘원고2’를 만들어 그 안에 넣고요. 지금까지 폴더가 8개 생겼습니다. 전 정리엔 정말 재주가 없어요. 그나마 블루레이와 DVD는 알파벳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책은 불가능하죠. 주제와 장르별로 분류하긴 하는데 이게 그렇게 만만치가 않지요. 그러는 동안 새 책은 계속 쌓이고. 그래서 전자책의 발전에 기대가 큽니다. 세월이 흐르면 제 책장엔 전자책으로 완전히 변환 불가능한 그림책 종류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렵겠죠. 물건에 대한 애착이 심한 편이라.
-책을 미처 읽지 않았을 독자를 위해, 비평에세이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을 출간한 계기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든 모든 책들과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만들자고 했어요.
-원고는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분류했습니까.
=철저하게 랜덤이에요. 그냥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따라가봤던 거죠.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습니다. 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저 혼자만 생각해서도 안 되지요.
-영화에 관한 글, 취미에 관한 글, 특정 이슈에 관한 글, 혹은 이의 제기까지 짧고 다양한 글들이 일관되게 때로는 자유롭게 널려 있다는 인상입니다. 책의 구성에 관해 의견을 낸 바가 있다면.
=규칙 같은 것 없이 자유연상으로 흐르는 책.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목표도 그것이 될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된 책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써야죠. 저에겐 그게 그렇게 올바른 작업 같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놓은 논리에 내용을 맞추기 시작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니까요. 앞뒤가 맞지 않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일관성보다는 찰나의 진실이 더 중요하죠.
-“극장에서는 상체를 숙여선 안 된다”는 내용으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극장 에티켓을 말미에 배치한 덕인지 굉장한 강조로 보이는데요.
=모두에게 유익한 정보로 끝내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우선순위에 따르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실제로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어깨에 잔뜩 힘주어 이야기하는 추상적인 주제보다 중간에 슬쩍 흘리는 실용적인 지식이 더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죠.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야 늘 후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고. 그래서 영화가 종종 잘못된 정보를 주면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신경이 쓰여요. 예를 들어 <다이하드2>의 클라이맥스 장면. 비행기는 그런 식으로 폭발할 수 없거든요.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사용에 관해 쓴 ‘다들 그렇지 않나요?’를 읽으며 든 생각입니다만, 트위터를 사용하시며 글쓰기 방식에는 어떤 변화나 영향이 있었습니까.
=트위터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그냥 트위터를 해요. 제가 이 매체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럴 의도가 있다면 장난감 사진을 올리거나 게임 화면 캡처 따위는 하지 않겠죠. 맞춤법에 더 신경을 쓸 거고 다음에 쓸 내용을 트위터에 흘리지도 않을 거고 140자의 한계를 보다 야무지게 활용하겠죠. 어차피 놀자고 시작한 건데 굳이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크게 달라진 건 없죠. 단지 트위터를 하면서 쌓은 생각들을 정리해 글로 옮기는 일이 늘어나긴 했죠. 이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게 그렇게 문제인가 싶습니다. 어디서인가 일어날 일이 트위터에서 일어나는 것뿐인걸요. 여기서 손해보는 쪽이 있다면 그건 작업하는 사람이고.
-비슷한 맥락에서 “대중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쓴 것이 인상 깊습니다. ‘대중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관점인가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관점인가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죠. 잠재적 독자나 대상으로서 대중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대중을 상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걸 상상하기 시작하면 언젠간 자신과 독자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겠죠. 사람들이 대중이라고 부르는 순결하고 단순하고 멍청하고 현명하고 기타 이것저것 모두인 무언가가 존재하긴 할까요?
-최근 주목하는 이슈나 소재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언제나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요.
-젊은 여자 배우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에 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그들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요.
=‘젊은 여자 배우’는 착시예요. 한국 배우들에게 그런 편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특정한 환경 때문이죠. 90년대 이후 제가 관심을 가질 만하고 감정이입에 가능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걸리는 건 나이가 아니라 세대예요. 이들 중 상당수는 30대고요. 제가 팬질하는 외국 배우들에겐 그런 환경적 편향이 없죠.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고인이고 심지어 몇명은 탄생 100주년을 넘겼어요. 한국 배우들에겐 그런 ‘팬질’이 힘들어요. 아무리 좋은 배우라고 하더라도 캐릭터에 대한 거부감이 ‘팬질’을 막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캐릭터들과 이들을 연기할 배우들이 움직일 만한 영역이 한심할 정도로 비좁은 게 한국 영화계죠. 어딜 가나 남자들이 지나치게 많고 그들은 제가 보기에 다들 비슷해요. 여성 캐릭터들이 많은 텔레비전으로 가면 또 비슷비슷한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보게 되고요. 다들 한국 사회에서 적당히 용인되는 전형성을 연기하고 있는데, 전 그게 많이 갑갑하고 무섭습니다. 이들의 욕망과 행동은 대부분 저랑 클릭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틈 사이에서 제가 견딜 만한 그리고 기왕이면 감정이입도 가능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그 전형성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몇몇 배우들이 보이는 거고.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게 뻔하니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이들이 연기할 수도 있는 10% 정도 가능성에 대한 제 투자인 거죠. 이들 배우들이 40대를 넘어서도 아줌마나 사모님 역할에 갇히지 않고 제 관심을 끌 수 있는 캐릭터를 꾸준히 찾아낼 수 있다면 저도 좋겠죠.
-올해는 <씨네21> 창간 20주년입니다. 오랜 필진으로서 앞으로의 <씨네21>의 방향에 목소리를 보탠다면요.
=전 장르를 다루는 사람이니까 장르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면 좋겠죠. 책에서도 썼지만 극장 환경에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어요. 요샌 다른 매체에서도 이에 관심을 갖고 다루고 있는데, 일반 관객의 불편함만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멀티플렉스의 무책임함에 맞설 수 없어요. 보다 전문적인 관점이 따라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