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한 친구 하나가 요즘 사진을 배우고 있다. 올 6월이면 자신의 치과 병원을 개업할 예정인 그는, 사진과는 아주 거리가 먼 생활을 해온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사진에 빠진 이후로 가끔 술자리에서 사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새삼 사진이란 것이 참 매력적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 그가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자신이 수강하고 있는 사진강좌의 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십년간 사진을 찍어온 그 강사는 어느날 예상치 않았던 사건의 현장을 목격하고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겨우 구한 일회용 카메라로 그 현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들이 그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 스스로도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사진의 힘이란 사진기의 성능이나 찍는 이의 노련함이 아니라 그 사진이 담고 있는 내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적인 삶을 살아간 복서 알리는 당시 사진작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였음에 틀림이 없다. 영화 <알리> 속에서 그려진 것처럼 그가 언제나 기자들을 몰고 다녔고, 수많은 매체들이 그의 사진을 경쟁적으로 실은 이유도 아마 ‘내용’을 가지고 있는 그의 삶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리라는 인간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잡아낸 사진들을 찍은 이가 <뉴욕타임스>의 사진기자도 아니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사진기자도 아닌, 한 평범한 아마추어 사진가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영화 속에서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한 하워드 빙햄이란 이름의 사진작가다.
빙햄이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규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LA 근교에 있는 일종의 직업학교에서 단기 사진강좌를 수강하면서였다. 그러나 사진을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열망에 불타고 있던 빙햄에게 돌아온 것은 ‘F’학점과 ‘뭔가 네가 잘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라는 강사의 싸늘한 평가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빙햄은 당시 미국 내에서 가장 큰 흑인 주간신문이었던 <Los Angeles Sentential>에 사진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기술로 사진을 찍던 그에게 알리를 취재하라는 임무가 내려진 것은 1962년. 기자회견장에서 알리의 사진을 찍은 몇 시간 뒤, 빙햄은 알리가 풍기는 묘한 느낌에 이끌려 알리의 일행을 찾아가 LA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잖아도 LA를 궁금해 하던 알리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순간은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얻게 된 운명적인 순간이 되어버렸다.
그뒤 빙햄은 알리의 개인 사진작가로 그와 함께 전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복싱 경기들은 물론이고 방글라데시 방문, 아프리카 방문 등 알리의 공식일정에 그가 빠지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빙햄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런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알리라는 인간의 매력을 발견한 이후 사진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과 말까지 직접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소박한 소망은 알리가 슈퍼스타로 커가면서 예상치 않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그가 찍은 알리의 사진들이 주요 매체에 실리기 시작하더니 그 자신에게도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던 것.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그는 <뉴스위크> <피플> <라이프> 등을 위해 일을 하기에 이른다. 특히 폭동과 데모가 있는 현장을 주로 취재하고 마틴 루터 킹, 말콤 X 등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저명 인사들을 사진에 담음으로써 그는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진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우연한 기회에 코미디언 빌 코스비의 전속 사진작가로 일하게 되면서 빙햄은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된다. 한때 그가 로버트 레드퍼드의 사진작가였다는 사실은 할리우드에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 하지만 그렇게 스타급 사진작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리의 삶을 기록하는 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에 개봉된 <알리>가 그의 손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축적한 수많은 사진들과 기록들을 토대로 그는 11년간이나 알리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마침내 직접 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해 <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리>가 그의 사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는, 영화 속 주요 장면들과 빙햄이 찍은 실제 사진들을 비교해보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명의 아마추어 사진사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빙햄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포토저널리즘의 포레스트 검프’라고 부른 적이 있다. 40여년의 세월을 알리와 함께하며 알리라는 인간의 삶을 통해 미국의 환부를 필름 위에 담아내는 작업을 했던 것에 비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찍은 사진들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그곳에서 ‘우연과 재수’에 의해 스타가 되는 포레스트 검프의 이미지는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한 흑인 복서를 응시하는 절친한 친구의 편견없는 시선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철민/인터넷 칼럼리스트chulmin@hipop.com
<알리> 공식 홈페이지 http://www.spe.sony.com/movies/ali/
하워드 빙햄 공식 홈페이지 http://www.howardbingham.com/
빙햄의 카메라를 통해 본 알리 http://www.kodak.com/US/en/corp/features/ali/
빙햄의 작품 페이지 http://www.pdn-pix.com/legends/archive/bingham/bingham_menu.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