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인공들이 사는 방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아쉽게도 캐릭터 설정에 맞춘 초기 컨셉 이상을 끌고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상처를 숨긴 남자주인공의 황량한 내면을 암시하는 컬러로 꾸민 넓은 오피스텔이 따분하기로 치면 제일이고, 거실 중앙에 계단이 있는 재벌가 저택이나 신혼부부의 방도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제작비 효율을 높이는 패턴화된 세트와 촉박한 촬영일정에서 우선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일일극이나 주말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미니시리즈에서도 공간과 캐릭터의 조응을 고민하는 연출자는 드물다. 그리고 예외에 속하는 연출자를 말할 때 이윤정 PD를 빼놓을 수 없다.
tvN <하트 투 하트>에서 대인기피증을 앓는 여주인공 차홍도(최강희)의 집을 보자.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7년간 혼자 지낸 홍도의 집은 짝이 안 맞는 서랍장을 비롯한 묵은 살림을 가꾸는 젊은 여자의 아기자기한 취향이 배어 있다. 양파 물꽂이와 패브릭처럼 손이 많이 가는 소품들, 작은 온실과 책꽂이로 활용하는 계단이 얼핏 인테리어 화보 같기도 한데 여기에 먹고, 읽고, 눕고, 기대는 집주인의 일상 동선이 겹치며 공간이 생기를 얻는다. 짝사랑하던 경찰 장두수(이재윤)와의 식사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와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에 사로잡힌 날엔, 줄곧 아늑해 뵈던 홍도의 집도 형광등 불빛 아래 어수선하고 궁상맞은 분위기를 띠기도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단 한 사람의 지금 이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면 같은 장소도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심리에 따라 다른 각주가 된다.
정신과 의사 고이석(천정명)과 그의 환자인 홍도의 사랑은 드라마로 치면 새로울 것도 없고, 매일 툭탁거리며 싸우던 남녀가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 예정에 없던 키스를 나누는 것도 처음 본 건 아니다. 그런데 술의 힘을 빌리지 않은 갑작스런 키스가 이들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경우는 또 흔치 않았다. 알다시피 감정의 인과와 논리를 앞질러 어느 순간 점프하는 연애의 마법은 구구절절 설명하면 신비가 사라지고 불친절하면 동조가 어렵다. 자기중심적인 소악마 이석이 언제 홍도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해봤자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에게 느끼는 호감을 분리할 수 없다. 다만,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이석이 전날 홍도의 토사물을 닦은 흔적이 남아 올이 뭉친 러그를 보고 빙긋 웃는 장면을 보면 ‘아 그렇구나’ 끄덕이게 된다. <하트 투 하트>는 무엇 때문에 마음이 선을 훌쩍 뛰어넘었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지금 그들이 어떤 기분인지를 전염시키는 드라마다. 이들이 머무는 공간은 훌륭한 매개물 역할을 해낸다.
+ α
현실적인 1인가구
tvN <식샤를 합시다>는 주기적으로 이사를 다니는 현실적인 1인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한 사이즈의 오피스텔에 사는 세 사람 중에 1인가구 생활 9년차 구대영(윤두준)의 살림이 제일 적은데, 이불 주위 손닿는 범위에 잡동사니를 늘어놓고 24개들이 두루마리 화장지 비닐 포장의 귀퉁이만 뜯어 쓰는 타입인 그는 처음 독립해 이사 온 이웃에게 어떤 가구든 짐만 되니 사지 말라고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