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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아름다운 진흙투성이
2002-03-06

신경숙의 이창

꽃샘추위는 남아 있겠지만 요즘은 간혹 어마, 봄볕이네, 싶게 따사로운 햇살을 불쑥불쑥 만난다. 내집 근처의 북한산 자락을 오르다보면 졸졸졸 물흐르는 소리도 귀에 섞이기 시작했다. 흰바위는 더욱 희어 보이고 다소 풀이 죽은 듯했던 소나무는 푸른색이 생기있게 되살아났다. 무슨 까닭인지 계곡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어 내내 얼음 속에 서 있던 나무의 밑둥(벌써 몇해째 겨울이면 그 길을 오갈 적마다 그 나무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에도 지난해처럼 또 얼음이 풀렸다. 기회가 있어 일본엘 며칠 다녀왔는데 교토의 용안사에 깃들기 시작한 햇볕도 따사로웠다. 각국의 사람들이 길쭉하고 널따란 마루에 발을 뻗고 앉아 론리 플래닛 같은 책을 들여다보거나 나른하게 졸거나 나무 한 그루 없는 돌의 정원의 비질의 자취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속에 나도 끼어 앉아 있던 순간, 햇살이 머리에 어깨에 등짝에 어찌나 따사롭게 내려앉던지 잠시 내가 여행자라는 것도 잊고 조용해질 수 있었다.

그저껜가는 양평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바람은 불었으나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급히 나오느라 아침도 거른데다 만나기로 한 분과 약속이 늦어 허둥지둥하다 점심시간도 지나버린 때에 메밀로 비빔국수나 물국수, 막국수를 만들어주는 집엘 들어갔다. 식당의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거기 앉으려 하니 예약된 자리라 하였다. 다시 보니 앞뒤로 스무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는 다른 빈자리와 달리 흰 물컵이 놓여 있었다. 단체 손님인가보다 생각하며 꽤나 시끄럽겠네, 어서 먹고 나가자, 생각하며 비빔국수와 두부구이를 시켰다. 배가 고프던 참이라 먼저 나온 두부구이를 열심히 먹고 있는데 이미 노년에 들었거나 중년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 같은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예약된 자리에들 앉았다. 반백의 여성도 있었고 모자를 눌러쓴 밑으로 색깔있는 안경을 쓴 남성도 있었다. 등산화가 말짱한 사람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흙투성이인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어디 질퍽한 곳을 밟았는지 물흙이 묻어 진창이 된 등산화를 신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지긋이 든 분들이고 등산복 차림들이라서 무슨 모임에 있는 분들이 봄을 맞아 함께 산에 왔나 보다, 고만 생각하고 뒤에 배가 고프던 참이라 뒤에 나온 메밀국수를 비벼먹는 일에 몰두했다. 다 먹고 좀 느긋한 마음으로 오차를 마시다가 나는 그제야 뭐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이 앉은 자리가 너무 조용하질 않은가. 봄날, 그것도 저리 여럿이 산행을 나와 점심을 먹고 있으면 당연히 그 자리가 왁자해야할 것 같은데, 예약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 모두가 조용히 얘기를 하거나 음식을 가만가만 먹고 있을 뿐이었다. 여럿이 모인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좀 낯선 모습이라 주의를 끌었다. 어느 순간 나와 가까운 축에 앉은 사람이 그 옆사람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무슨 개울물소리처럼 귀에 잡혔는데 이건 물김치입니다, 하며 옆사람의 숟가락을 물김치 그릇에 담가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자세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국수를 비벼서 주는 사람, 백김치를 집어서 입에 넣어주는 사람, 주전자 채 나온 육수를 따라주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사이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앉아 있었다. 앞이 보이는 사람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짝을 맞추어 봄맞이 산행을 나온 모양이로구나, 깨닫는 순간 왜 그렇게 정신이 반짝 들었는지. 다시 보니 등산화에 유난히 흙이 많이 묻거나 진창이 된 분들은 대개가 앞이 보이는 분들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분들에게 마른길을 가게 하느라 그리 된 것일 터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누가 시각장애인이고 누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그들은 나직나직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오래 만나 서로를 아는 사이들 같았고 또 웬만큼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듯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분이 그런다. 세상에는 좋은 일 하는 분들이 참 많아요. 다 먹은 비빔국수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식당의 의자가 따사로운 햇볕이 등짝을 간질이던 돌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마루 같았다. 그들이 온화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또 볼일도 잊어버리고 잠시 조용해졌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