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웃느라고 바쁘다.” 에픽하이의 정규 8집 앨범 ≪신발장≫이 각종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에 대한 타블로의 말이다. 올해로 데뷔 11주년을 맞이한 에픽하이의 세 멤버들은 순간의 감정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 찰나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얻은 듯 보였다. 지난 앨범의 부진, 학력위조 논란 등의 시련을 겪으며 타블로와 투컷, 미쓰라가 떠올렸던 건 지난 11년간 그들과 함께했던 다양한 감정의 파노라마였다. 그 감정들을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처럼 차곡차곡 눌러담은 에픽하이의 8집 앨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신발장≫의 타이틀곡 <헤픈 엔딩>이 각종 차트에서 2주간 1위를 했다. <Born Hater>와 <스포일러> 등 다른 곡들도 상위권에 오르는 등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 최근 서로 어떤 얘기들을 나누나. =타블로_그냥 웃느라고 바쁘다. 다시 음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런 놀라운 결과는 기대도 안 했고 예상도 못했던 터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원래 사람이 선물을 받으면 소감을 얘기하기보다는 마냥 웃잖나. 지금 딱 그런 기분이다. 처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은 느낌.
미쓰라_그래서 요즘은 그 사랑을 어떻게 돌려드려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한다. 사인회도 그런 의미에서 기획한 것이고, 콘서트도 준비하고 있고.
투컷_현실적인 얘기를 하자면, 월급 정도 나오겠지 했는데 보너스로 연봉이 나온 느낌이다. (웃음)
-수많은 후보곡 중 어떤 곡을 선택할지가 늘 중요한 문제일 거다. ≪신발장≫의 경우 어떤 느낌의곡들에 더 주목했나. =타블로_지난 11년의 감정들을 최대한 많이 담으려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음악을 시작할 때 미쓰라가 열아홉살이었는데,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뮤지션으로서 남자로서 10대, 20대, 30대를 함께 보낸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의 감정들을 굉장히 농도 짙게 겪었다. 이번 앨범을 들어보면 음악을 막 시작했을 때의 초심에 가까운 열정과 천진난만함도 있고, 쓸쓸함과 외로움의 감정들도 들어 있다. 지난 11년 동안 우리가 경험한 모든 감정들을 담으려 하다보니 다양한 색깔의 음악이 담기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앨범으로 느껴지게 되더라. 요즘 어린 친구들이 ‘인생00’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인생영화, 인생앨범, 인생문장 등. 인생을 통틀어 최고라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우린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신발장≫이 ’인생앨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셋의 인생을 담은 앨범이랄까.
-그렇지 않아도 이번 앨범을 들으며 다양한 감성을 담은 음악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영화 한편의 사운드트랙을 듣는 느낌이었달까. =타블로_지난 앨범을 작업할 때였나. 투컷이 2, 3년 전에 ‘무성영화’라는 제목으로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예전부터 우리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가 극장에 함께 가서 영화를 보는 거다. 그런 우리의 관심사를 반영해서 ‘무성영화’라는 제목과 다르게 소리로만 구성된 영화 같은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말이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앨범을 작업하며 오직 소리로 채우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한 것 같다. 평소에도 영화에서 음악의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다. 절대 <씨네21>과의 인터뷰라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웃음)
-그렇다면 혹시 ≪신발장≫을 준비하며 자주 본 영화가 있나. =투컷_과거의 명화들을 다시 보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스타워즈> 시리즈, <대부> 1, 2편을 자주 보고, <쥬만지>도 좋아한다. (웃음)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다.
타블로_(휴대폰을 뒤적이다) 한창 편곡하고 있었을 때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봤는데, 숨이 콱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신발장≫을 편곡할 때 영향을 줬던 것 같다.
미쓰라_나는 작업하기 전 꼭 보는 영화가 있다. <8마일>. 볼 때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투컷_다시 생각해보니 이번 앨범 작업하며 가장 많이 본 영화는 <신세계>네. (웃음)
타블로_<신세계>의 정서가 <Born Hater> 같은 곡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투컷_영향을 많이 줬지.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많이 봤다. 속편 언제 나오나. 빨리 보고 싶다. (웃음)
타블로_옛 프랑스 영화 중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여자는 여자다>라는 작품이 있잖나. 그 영화의 주연배우인 안나 카리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아직도 그녀의 영화 클립들이나 스틸들을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자주 들여다본다. 그녀의 눈빛이 음악에 영감을 많이 준다고 해야 하나. <헤픈 엔딩>을 작업할 때에도 안나 카리나가 길을 걷는 모습, 그녀가 이별하는 모습을 많이 상상했다.
-타이틀곡 <헤픈 엔딩>은 피처링으로 참여한 조원선(롤러코스터의 보컬)의 음색과 무척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는. =타블로_롤러코스터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고, 그들의 음악이 가요계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신보를 기다려왔는데 나오지 않아서, 그냥 롤러코스터의 신보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조원선씨를 생각하며 작곡했다. 우리가 듣고 싶은 노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하잖나. 그 좋은 예였던 것 같다.
-앨범마다 피처링에 참여하는 보컬들을 잘 선택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공통점이 뭘까 생각해보면, 다소 고전적인 톤의 목소리를 가진 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타블로_우리 노래를 들어보면 단 한순간도 열창이 없다. 지난 11년 동안 과한 비브라토나 열창, 기교를 담은 노래는 단 한 곡도 만들지 않았다. 이건 취향의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는 그냥 그런 노래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혼잣말하는 듯한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아무도 혼자 생각할 때 <나는 가수다>식의 화법을 쓰진 않잖나. (웃음) 누군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아무리 그 감정이 극한 감정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과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우리 앨범에 참여하는 보컬들을 보면, 소리 이전에 정서가 느껴지는 분들이다. 어떻게 보면 영화 캐스팅과 비슷할 것 같다. 어떤 감독들은 배우가 지니고 있는 인생 이야기와 실제 감정들이 탐나서 그를 캐스팅하는 경우가 있잖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Born Hater>의 경우 최근 힙합신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뮤지션들-빈지노, 버벌진트, 바비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타블로_아무래도 ‘헤이터’가 주제이다보니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이나 안티가 많은 사람들을 섭외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헤이터’가 많은 사람들을 한명씩 모으다보니 가장 핫하고 인기 많은 사람들이 한곡에 모였다. 신기하더라. 가장 미움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모으려 했더니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을 모으게 됐다는 게. 그게 그 노래의 가장 큰 아이러니다.
-이 노래에 참여한 모든 뮤지션이 직접 가사를 썼는데, 미쓰라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을 표현하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미쓰라_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잖나. 당시의 나는 그런 경우였던 것 같은데, 그때 상당히 자괴감에 시달리던 때라 그런 가사를 쓰게 된 것 같다.
-그렇게 멤버 중 한명이 힘들어하는 걸 느낄 때,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풀어나가는 편인가. =타블로_그런데… 사실 그 정도의 상처는 우리 팀에서 쳐주질 않는다. (웃음)
투컷_안 웃으려고 했는데, 빵 터지네 이거. (웃음) 타블로는 모두가 다 아는 그 사건을 겪으며 많이 힘들었을 거고, 나는 작업할 때 하루에 서너번씩은 꼭 좌절을 느끼는 것 같다. 미쓰라는 이제까지 힘든 걸 내색 안 해오다가 당시에 한번 크게 다가왔는지 <Born Hater> 같은 가사를 쓰더라.
타블로_서로에게 크게 위로를 청할 필요가 없는 건 매일 그걸 이겨내는 모습을 서로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를 받는 상황이 오면 그 문제를 가운데 두고 우리 셋이서 크게 웃는다.
투컷_어느 정도냐면 서로의 상처와 치부를 가지고 놀릴 정도니까. 그걸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게 좋잖나. 우리는 그런 단계까지 왔다. (웃음)
타블로_사실 고생이라는 표현이 우리가 하는 일엔 어울리지 않는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창작을 하는 사람은 없잖나. 매 순간이 즐겁고 신날 순 없다 해도,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알아서 감당해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있는 것 같다. 솔직히 그 정도는 즐거운 거다. 그렇지 않아? (멤버들도 동의한다) 이젠 그런 생각이 좀 뚜렷해지는 것 같다.
-이제 타블로와 투컷은 ‘아버지’가 되었다. ≪신발장≫에는 어두운 감성의 사랑 노래들이 많은데, 현실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곡을 작업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나. =투컷_나는 사실 이별하든 만남을 가지든, 만드는 곡들에 큰 영향을 받진 않는다.
타블로_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윤)종신이 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 “앞으로 이별 노래 어떻게 쓸지 고민되지?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그 안에서만 네가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기쁨과 슬픔들이 있다”고. (좌중 웃음)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아빠가 되니 진짜 그렇더라. 부모가 돼서야만 느낄 수 있는 슬픔이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은 넓고 깊고 짙고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이전에 다뤘던 주제들을 그대로 다루되 훨씬 더 폭넓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1월14일부터 16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콘서트를 연다. =타블로_힙합 콘서트인데도 공연장 자체를 클래식한 정원처럼 꾸몄다. 인디밴드 칵스와 라이프 앤 타임의 멤버가 함께 콘서트 밴드로 참여하기도 한다. 힙합과 클래식, 인디음악. 서로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이 어떻게 우리의 공연에서 맞물리는지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을 거다. 그게 에픽하이 스타일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