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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평범한’ 삶에 대한 간절함

드라마 <미생>, 웹툰 원작만큼 인기 끄는 이유는

‘사회생활’의 첫 한달은 이유 없이 서러웠다. 이제는 더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일’을 하고 돈을 받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에 설레기보다 두려웠다. 하지만 한 사람 몫도 제대로 해낼 수 있게 되기 전, 첫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일자리를 구하던 몇달간은 그에 비할 수 없이 더 괴로웠다. 고칠 수도 없는 초라한 성적표와 보잘것없는 경력으로는 세상 어디서도 내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면접에서 떨어진 날 밤에는 몇 시간씩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나는 어쩌다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나온 모든 시간과 경험을 부정하고 후회하면서 스스로를 미워했다. 이 넓은 세상에 내 자리 하나 만들지 못하고 ‘어른’의 줄에 서게 된 기분은 외롭고 초라했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바탕으로 한 tvN <미생>은 그렇게 내 자리 하나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바둑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프로 입단의 문턱에서 자꾸 미끄러지며 길을 잃고 만 장그래(임시완)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의 인턴이 된다. 품이 맞지 않아 어색한 양복을 입은 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흠칫대는 장그래에게는 모든 직장인들의 초년생 시절 모습이 담겨 있다. 선배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시키지 않은 일을 벌이고, 칭찬 한마디를 은근히 기대하다가 핀잔을 들으면 세상 모두가 내게서 등 돌린 것처럼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신입의 통과의례다. 그러나 남들이 학교에 갈 때 바둑을 두고 그들이 스펙을 쌓을 때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장그래의 ‘평범한’ 삶에 대한 간절함은 운명 같은 사랑도 처절한 복수도 없이 평온해 보이는 화이트칼라의 세계를 무엇보다 스펙터클하게 만든다.

옆 팀에 빌려주었던 딱풀 때문에 장그래가 서류를 유출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를 발견한 전무가 고성을 지르는 대신 오 과장(이성민)에게 “잘하자”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는 순간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만큼 긴장하게 되는 것은 회사가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未生)의 목숨이 오가는 세계라서다. 그리고 엄격한 오 과장으로부터 ‘우리 애’라 불리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 기뻐하던 장그래가 자신감을 얻어 동기 한석율(변요한)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것은 작지만 분명한 성장이다. 그러니 장그래가 <시마 과장>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날이 오지 않더라도, <미생>을 지켜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다.

안영이, ‘커리어우먼’ 캐릭터의 진화

직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해맑게 민폐를 끼치거나 부담스럽게 센 척하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은 대개 동료로 곁에 두기 싫은 타입이다. 그러나 <미생>의 ‘능력자’ 인턴 안영이는 일이 최우선이면서도 유난 떨지 않고 차분히 좋은 결과를 내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에는 적당히 무심하다. 게다가 업무상 호의를 베푼 뒤에도 생색 따위 내지 않는 쿨함이라니, 이렇게 괜찮은 동료라면 꼭 스카우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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